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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첫 기사를 송고한 날은 2002년 7월 8일이다. 이후 오늘까지 만 13년 4개월째 모두 1268꼭지의 기사를 썼다. 못난 녀석이 밥그릇 수 헤아린다는 말이 있는데, 현재 등록된 8만여 시민기자 가운데 아마도 선임 축에 들 것이다.

기자가 이화학당에서 28년 봉직한 뒤 이대강당에서 학생들에게 퇴임의 말을 하고 있다(2004.3).
 기자가 이화학당에서 28년 봉직한 뒤 이대강당에서 학생들에게 퇴임의 말을 하고 있다(2004.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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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박수칠 때 떠나는 게 좋다는 생각에 그만 두었다가 5개월 만에 슬며시 등록하여 오늘까지 기사를 쓰고 있다.

사실 1268꼭지의 기사를 쓰면서 내 주변이나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은 거의 모두를 드러낼 정도로 별별 기사를 다 쓴 듯하다. 그런 덕분으로 내 생활에 큰 변화도 있었다.

누리꾼들의 도움과 이런저런 연유로 미국, 일본, 중국 등 해외에도 몇 차례 취재 및 답사여행을 하였고, 국내에도 꽤 여러 곳을 둘러보기도 했다.

그런 탓인지 <오마이뉴스> 다른 시민기자나 본사 편집부 기자와의 인터뷰도 몇 차례 가졌는데 한 기자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 10년 넘게 시민기자로 꾸준히 활동하고 계십니다. 롱런의 비결을 알려주신다면?
"외람된 말이지만 독자와 편집자 그리고 시민기자 3자 간의 신뢰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련 기사 : "<어떤 약속> 매일 연재하라는 요청도 있었어요")

모든 시민기자들이 다 그렇겠지만 나도 기사를 쓸 때 프로야구 마무리선수마냥 최선을 다해 쓴다. 그래서 아직도 현역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처음 기사를 쓸 때는 누리꾼들의 악플도 달리고, 본사 편집부 기자로부터도 '퇴짜'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최근에는 그런 일은 뜸한 편이다.

동해바다
 동해바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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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기자의 전화

지난 월요일(11월 2일) 갑자기 동해바다가 보고 싶어 시외버스를 타고 강릉으로 가는데 본사 편집부의 한 기자로부터 손전화를 받았다. 전화의 요지는 지난 10월 31일 밤에 송고한 한 유명 화백과의 추억을 쓴 나의 기사를 검토하는 도중에, 다음 문장(작은 따옴표 부분)에 대한 사실 확인 및 그 대목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천 화백은 살림이 매우 궁색했던 탓인지 몇 번이나 대문을 두들겨야 구독료를 받을 수 있었다. '신문 구독료를 독촉하면 그때마다 가정부가 대단히 미안해하며 어떨 때는 자기 주머닛돈을  주기도 했다.'

게다가 반세기가 더 지난 지금도 내가 그 집을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대문의 독특한 문패 때문이었다. … 이따금 천 화백을 만났는데 그때마다 신문 값을 제때에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빠트리지 않았다."

기자의 말인즉, 그 화백이 가정부까지 두고 살면서 신문값을 제때에 주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기사가 나간 뒤 독자들도 얼른 이해가 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나는 그때 그 사실은 분명했고, 그러기에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집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편집기자는 그래도 수긍이 안 되는 듯, "신문 구독료를 독촉하면 그때마다 가정부가 대단히 미안해하며 어떨 때는 자기 주머닛돈을 주기도 했다"는 그 한 문장을 삭제하고 싶다는 제의였다.

그때 나는 달리는 시외버스 안이라 전화를 길게 할 수 도 없거니와, 그 기사에서 그 문장은 지엽적이기에 그만 편집기자의 삭제 제의에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관련 기사 : "신문값 제때 못 줘 미안해요" 천경자 화백과의 추억)

그날 귀가 후 <오마이뉴스> 화면에 뜬 기사를 보니까 그 문장은 빠진 채 편집기자가 아주 매끈하게 잘 가다듬어 주었다. 나는 편집부 담당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기사를 잘 봤다는 인사와 함께 그 시절 배경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그래서 우리나라가 아직도 선진국이 되지 못한 까닭이라고 말하자 그제야 수긍하는 듯하였다.

앵두나무처녀

"모든 일은 지금의 기준으로 그때를 보지 말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볼 때, 집에 상주하는 가정부를 두려면 최소한 월수 일천만 원 이상은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1960년 초 당시에는 서울에 웬만한 가정에서는 식모(가정부의 당시의 말)를 두고 살았다. 그만큼 가난한 시골처녀들이 고향에서 춥고 배고픔에 견딜 수 없어 무작정 도시로 진출하는 일이 잦았다. 심지어는 딸이 많은 집은 입을 던다고 '사발농사'라 하여, 부모들이 남의 집에 거저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 당시 유행가로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밋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라는 노래까지 나왔다. 이런 시골처녀들이 상경하면 서울역이나 영등포역에서 인신매매범에게 붙들려 일부는 사창가나 기지촌으로 끌려가기도 하고, 일부는 다방이나 유흥업소로, 또 일부는 소개소를 통해 식모나 공장 여공으로 가는 일이 매우 흔했다.

그들의 인권은 거의 보호받지 못했다. 몇 푼 되지 않는 월급을 주인에게 제때 꼬박꼬박 받는 식모들은 드물었다. 필설로 차마 말할 수 없는 인권침해도 많았다. 그것이 그때의 세태였다. 그런데 그들 가정부는 주인과 달리 대체로 신문배달원들에게 동병상련으로 매우 친절했다. 그들 중에는 주인 대신 자기 주머닛돈을 대납해 주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바로 그 화백집 가정부도 그랬기 때문에 반세기가 더 지난 까마득한 그 시절을 내가 아주 또렷하게, 그때의 그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체험한 바로는 사실 우리나라의 사람들의 갑질은 꼭 최상층만이 아니었다. 나는 고교시절 2년 남짓 신문배달원으로 고학했는데, 정작 하루에 두 번 배달했던 일(그 당시는 하루에 두 번 발간)보다 독자를 관리하고, 신문 값을 받는 일이 더 힘들었다. 월말에 수금을 시작하면 첫 걸음에 주는 집은 미처 1할도 안 되었고, 두세 번 어떤 경우는 꼭 한 달 미뤄주기도, 또 서너 달씩 미뤄주는가 하면, 몇 달 미룬 채 그대로 이사 가기도 하는 등, 가난한 사람과 약자에 대한 배려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아예 내 편에서 수금을 포기하는 독자도 많았다.

가진 자들의 갑질

우리나라가 왜 망했을까? 그 원인의 하나는 바로 권력이나 돈을 가진 자들의 갑질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갑신 이후로 갑오에 이르는 10년의 사이는 그 악정이 날로 심하여 그야말로 큰 고기는 중간 고기를 먹고, 중간 고기는 작은 고기를 먹어 2천만 민중이 어육이 되고 말았다. 관부의 악정과 귀족의 학대에 울고 있는 민중이 이제는 참으로 그 생활을 보존할 수 없이 되었다. 살 수 없는 민중이 혁명 난을 일으킴은 자연의 추세였다.(한국말년사)'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 18권 158쪽

물론 우리 사회가 다 그렇지는 않았다. 내가 신문배달할 당시 만난 누하동오거리 한약국 할머니는 한 번도 헛걸음하지 않게 할뿐 아니라, 당신 손자마냥 배달원을 귀여워해 주었다. 그 할머니는 여름이면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놓고 땀을 닦게 하거나, 겨울이면 따뜻한 보리차를 마시게 하는 등, 여러 온정을 베풀어 주셨다. (관련 기사 : 누하동오거리 한약국 할머니)

전 이화여자대학교 김활란 총장
 전 이화여자대학교 김활란 총장
ⓒ 이화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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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경향신문>을 배달할 당시, 가회동에 사셨던 당시 이화여자대학교 김활란 총장 댁에 수금을 가면 그 댁 가정부는 매달 꼭 가욋돈을 주었는데, 이는 총장님의 뜻이라고 했다.

먼 세월이 흐른 후 나는 이화학당에서 28년을 봉직했다. 내가 부임할 때는 김활란 선생은 이미 작고하셨고, 이화여자대학교 본관 옆에 그분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이화학당(이대부고) 재직 때 자주 대학도서관을 이용하였는데, 매번 그분의 동상 앞을 지나다녔다. 나는 그때마다 마음속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나는 고교시절 신문배달할 때 당시 대재벌 박흥식 씨 등 유명인사 댁에 신문을 숱하게 배달했지만 매달 가난한 고학생 신문배달원에게 가욋돈을 손에 쥐어주는 집은 그댁이 유일무이했다.

용렬하고 모난 내가 교직생활 33년 가운데 유독 이화학당에서 28년간을 보내게 된 것은 아마도 그분이 쥐어준 가욋돈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정말 무섭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태그:#김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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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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