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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런 전화가 많이 오네요. 참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지난 6일, 민주노총 울산본부로부터 한 통의 취재요청서를 받은 기자는 민주노총에 전화를 걸어 "현대차노조도 참여하냐"고 문의했다. 이에 울산민주노총 조이영자 국장이 씁쓸한 어투로 한 답변이다.

당시 민주노총은 "'민중총궐기 울산지역준비위원회' 발족 기자회견을 10월 7일 오전 11시 울산시청 앞에서 하니 취재를 해달라"고 언론사에 요청했다. "노동시장 구조개악으로 노동기본권이 말살 위기에 놓여 이를 사수하기 위해 각 분야 사회시민단체들과 손잡고 울산지역준비위원회를 발족한다"는 것이다.

기자뿐 아니라 취재기자들의 관심사는 역시 현대차노조의 참석여부였다. 조합원 4만8000여 명에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의 핵심인 현대차노조의 참여 여부는 이 위원회의 실질적 효과를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날 조이영자 국장은 현대차노조의 참석여부에 대한 확실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단지, 그렇게 답을 하는 민주노총 국장이나 기자도 격세지감을 느낄 만했다. 한때 민주노총이 시민사회와 함께 진행하는 총파업이나 촛불집회 등에서는 현대차노조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때부턴가 오히려 현대차노조의 참여 여부가 주요 관심사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차노조가 근래 들어 민주노총 총파업에 불참하는가 하면, 그나마 지난 4월 현대차노조 집행부 간부들만 참여한 총파업 대회장에서는 이를 비난하는 연대노동단체 대표를 폭행하는 사태까지 빚어졌기 때문이다.

몇 달 사이 상황이 급변했다. 정부여당과 회사측이 기필코 관철시키려고 하는 노동개혁이 현대차노조를 포함한 대기업노조라는 점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올해 현대차 임단협에서의주요 쟁점이 노동개혁 수용 여부였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위원회에 참석하느냐 마느냐를 묻는다는 자체가 좀 이상하기도 하다.

현대차노조는 올해 임단협 타결에 실패한 후 그 임무를 담당할 새 집행부 선거를 다음 달 치른다. 대체로, 노조집행부 선거를 앞두고는 관련한 기사를 쓰는 것은 언론사 입장에서는 불문율로 여겨져 있다. 그런데도 굳이 집행부 선거와 관련해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위의 내용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노조, 예전처럼 민주노조의 역할 할 수 있을까   

현대차노조가 지난달 23일 울산공장 노조사무실에서 '임금피크제 저지 파업돌입'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현대차노조는 새 집행부 선거를 위해 쟁의행위를 잠정 중단했다.
 현대차노조가 지난달 23일 울산공장 노조사무실에서 '임금피크제 저지 파업돌입'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현대차노조는 새 집행부 선거를 위해 쟁의행위를 잠정 중단했다.
ⓒ 현대차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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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기본권을 사수하기 위한 총궐기에 민주노총의 핵심이자 직접 당사자이기도 한 현대차노조의 참석여부가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몇 해 전의 현대차노조 집행부 선거 전후를 살피면 그 답이 나온다. 바로 현대차노조에 시나브로 자리잡은 '실리주의'가 그 배경이다.

현대차노조는 그동안 보수층을 중심으로 "귀족노조"로 매도당하는데 대해 "세계 최장의 시간을 일한다"는 등으로 적극 대응해 왔다. 이 때문에 그동안 현대차노조를 이끄는 집행부의 선거는 노조 내의 여러 조직 중 누가 더 강성이며 저항적이냐가 당락의 관건이었다.

그렇게 당선된 현대차노조의 사회적 역할은 컸다. 지난 1996년말부터 1997년초까지 진행된 노동법 개정 반대파업에 현대차노조가 앞장서면서 김영삼 정부의 사과와 법 수정을 이뤄낸 것은 유명한 일화다.

이외 2000년 대우자동차 매각 반대파업, 2003년 비정규직법·주 5일 근무제 파업, 2006∼2008년 한미 FTA 반대파업과 미국산 쇠고기 반대 파업 등도 그 연장선이다. 보수층으로부터 귀족노조로 매도당하는 현대차노조를 시민사회가 옹호하고 나선 이유였다.

하지만 2009년 현대차노조 집행부 선거에서 느닷없이 '실리'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자신들이 만든 것인지, 언론에서 먼저 나온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당시 조합원들은 실리노선의 집행부를 선택했다.

실리주의 집행부가 탄생한 후 현대차노조 사상 처음으로 3연속 무분규를 이끌면서 경제계와 보수층의 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한솥밥을 먹는 비정규직 문제를 등한시하는 등 시민사회로부터는 사회적 역할에 대한 실망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실리주의의 공과가 드러나는 모양새였다.

이처럼 '실리주의'는 지난 몇 년간 아우격인 비정규직노조가 호소해온 "법원 판결에 따른 정규직 전환"으로의 도움요청을 외면하고, 회사측과 '비정규직 대상 특별고용' 협상을 성사시켜 이를 진행하는 결과로 나왔다. 집행부와 입장 차이가 있는 다른 현장조직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묻혔다.

그 후유증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청업체(비정규직)에 취업시켜 주겠다"는 취업사기도 극성을 부리고 있다. 급기야 지난 9월에는 현대차 사장의 친동생이 여러 명을 속여 억대의 금품을 챙긴 혐의로 구속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 일을 두고 소위 노조내 강성 현장 조직들은 검찰의 철저한 조사와 사장 사퇴를 요구했다. 현장조직 들불의 하부영 대표는 소식지에서 "현대차 명예를 훼손시킨 사장이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고 했다. 

현장조직들의 이 같은 요구는 앞서 지난 5월 26일 반장 특강에서 현대차 사장이 한 폭탄발언이 그 배경이다. 일부 현장조직은 점심시간 현대차 울산공장 안 식당 앞에서 "사장이 동생과의 관계가 깨끗하면 노조협박 말고 취업청탁 활동가를 오픈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특강에서 "자녀 취업 청탁하는 활동가가 많다. 성질나면 확 까발려 버린다"고 했다. 이를 두고 현장조직내에서는 강경대응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집행부는 큰 이슈를 만들지 못했다.

최근 발생한 취업비리 사건에서 이처럼 사장의 책임을 요구했던 현장조직 들불의 하부영 대표가 언급되면서 소위 실리주의 집행부가 역공을 펴는 모양새다. 하부영 대표가 이번 사기사건을 두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으로, 내가 오히려 피해자"라고 호소하고 있지만 오히려 호재로 삼는 듯한 분위기인 것. 

집행부 선거를 앞두고 실리조직에서는 오히려 이를 기정사실화하면서 후보직 사퇴를 요구하는가 하면 하부영 대표의 행보를 두고 "지난달 윤 사장이 (동생의) 취업비리 검찰 조사 결과 무혐의로 밝혀졌으나 '(하부영 대표가 사장이) 현대차 명예를 훼손시킨다'고 한 만큼 (하부영도)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며 SNS로 조합원들에게 유포하고 있는 것.

이에 하부영 대표는 "사실이 아닌 것을 기정사실화 하는 데 대한 흑색비방 유포를 책임져야 한다. 현장에 떠도는 취업비리 소문도 규율위원회가 엄정 조사한 후 밝혀지면 전원 징계하겠다. 노조간부 징계권을 조합원에게 주겠다"고 맞받아쳤다.

이 같은 공방은 과거 현대차노조가 걸어온 길에 비추면 역시 격세지감이다. 한때 한 목소리로 회사측에 맞서 싸우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오히려 비난 화살을 동료들에게 겨누는 셈이다. 이것도 실리주의가 만들어낸 결과로 보인다.


태그:#현대차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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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 일간지 노조위원장을 지냄. 2005년 인터넷신문 <시사울산> 창간과 동시에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활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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