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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들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코스모스.
 가을 들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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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과자굽기


이 나라에 빵이나 과자 같은 먹을거리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됩니다. '빵'이나 '과자'라는 낱말을 쓴 지도 얼마 안 돼요. 빵이나 과자를 마련할 적에 쓰는 낱말도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그러나 빵이나 과자를 놓고 예전에 쓴 말을 헤아리면 '빵굽기·과자굽기'입니다. 수수한 여느 사람들은 '빵굽기·과자굽기'라 했고, 일본을 거쳐서 전문 지식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제빵·제과'라 했어요. 전문으로 빵이나 과자를 굽는 사람은 예전에는 한자를 빌려 서 '製'를 썼는데, '製'는 "지을 제"입니다. 그러니 이 한자를 쓴 '제빵·제과'는 '빵짓기·과자짓기'처럼 옮겨야 올발랐다고 할 만합니다. '밥짓기'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제빵·제과 전문가나 국어학자는 '밥짓기·밥하기'를 한국말사전에 올림말로 싣지 않았고, '빵짓기·과자짓기' 같은 낱말도 따로 다루지 않았습니다. 빵이나 과자는 밥과 달리 굽습니다. 그래서 '빵굽기·과자굽기' 같은 낱말을 새로 지어서 한국말사전에 실어야 맞지만 '제빵·제과'만 한국말사전에 싣고 말아요. 게다가 '밥짓기·밥하기'는 한국말사전에 없고 '요리(料理)'만 싣는데, 요리라는 한자말을 "음식을 만듦"으로 풀이하고 맙니다. 한국말사전부터 이러다 보니 "요리 만들기·밥 만들기·빵 만들기·과자 만들기" 같은 엉터리 말이 퍼져요. '밥짓기·빵짓기·과자짓기'하고 '밥하기·요리하기'하고 '빵굽기·과자굽기'처럼 써야 알맞습니다.

[둘] 밭흙·논흙·숲흙

밭이나 논은 흙으로 이루어집니다. 흙이 있어야 밭이나 논을 가꿉니다. 숲도 흙으로 이루어집니다. 숲에 흙이 없으면 나무나 풀은 자랄 수 없습니다. 흙이 없을 적에는 아무것도 못 삽니다. 사람이 지구라는 별에서 살 수 있는 까닭도 흙이 있기 때문입니다. 흙에서 밥을 얻고, 흙에서 집을 짓는 바탕을 얻으며, 흙에서 잘 자란 나무를 베어서 살림살이를 가꾸고 불을 지펴요. 흙이 있기에 풀과 함께 풀벌레가 있어요. 흙이 있으니 새도 풀밭이나 숲에 보금자리를 틀어요. 흙을 살피고 읽으며 헤아릴 줄 알아야 삶을 짓고 가꾸며 보살필 만합니다.

한국말사전을 들추니 '논흙'하고 '개흙'이라는 낱말은 올림말로 나옵니다. 그렇지만 '밭흙'이라는 낱말은 없어요. 오늘날은 누구나 도시에서 사느라 밭을 살피지 않기 때문일까요. '숲흙'이라는 낱말도 한국말사전에는 없어요. 가만히 생각하면 논흙이나 밭흙이나 숲흙은 모두 달라요. 개흙도 다르지요. 사람 손길을 타지 않는 숲에서 저절로 가랑잎이 쌓이고 벌레와 짐승이 죽고 나면서 태어나는 흙은 까무잡잡하면서 폭신합니다. 비료와 농약과 비닐을 머금은 흙은 누렇거나 허여면서 딱딱합니다. 거름을 잘 머금은 흙도 빛깔이 다르고, 풀이 잘 자란 곳도 흙빛이 사뭇 달라요. 사람이 흙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줄 깨달으면서 흙하고 얽힌 말을 슬기롭게 바라본다면 삶을 곱게 다스리는 길에 눈을 뜰 수 있지 싶습니다.

[셋] 배움바라지

뒤에서 도와주는 사람은 '뒷바라지'입니다. 그러면 앞장서서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면? 이때에는 '앞바라지'라 하면 돼요.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은? 이때에는 '옆바라지'가 될 테고, '곁바라지'도 있을 테지요. 다만, 한국말사전에는 없는 말입니다. 그저 우리가 신나게 쓰고 즐겁게 나누는 말이에요.

어떤 사람은 '책바라지'를 합니다. 이를테면 도서관이 하는 몫이라면 '책바라지'라 할 만해요. 사람들이 책으로 즐거움을 누리도록 돕거든요. '놀이바라지'라든지 '살림바라지'라든지 '꿈바라지'도 있을 만합니다. 노래하는 사람 옆이나 뒤에서 소리를 받쳐 준다면 '노래바라지'라 할 수 있어요.

돕는 일은 누군가 무엇을 배우도록 도울 수 있어요. 요즈음은 아무래도 '배움바라지'가 가장 많으리라 느껴요. 아이들이 넉넉히 배울 수 있도록 돕는 어버이가 많거든요. 나도 우리 아이들이 시골에서 삶이랑 사랑을 기쁘게 배우도록 도우니 배움바라지로 지내고, 우리 집 곁님이 스스로 하고픈 공부를 하도록 도우면서 언제나 배움바라지로 삽니다. 그리고 아이들하고 곁님도 나한테 배움바라지입니다. 웃음과 노래와 춤과 이야기로 서로서로 배움바라지요, 사랑바라지로 하루를 맞이합니다.

[넷] 가을스럽다

가을날 아침에 마당에서 초피알을 훑다가 가만히 생각에 잠깁니다. 초피알은 새빨갈 적에 훑기도 하고, 겉껍질이 짙누렇게 마른 뒤에 훑기도 합니다. 따서 말릴 수 있고, 나뭇가지에 달린 채 말려서 가볍게 훑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훑든 다 좋고, 어떻게 말려도 다 즐겁습니다. 가을이기에 초피나무에서 초피알이라는 열매를 훑어요. 가을볕을 받으며 바싹바싹 마르고, 가을바람이 불면서 가을바람이 퍼지지요. 가을들은 샛노랗게 물들면서 가을빛을 퍼뜨리고 가을노래를 일으킵니다.

감알도 익고 나락도 익는 구수한 시골마을은 더없이 싱그러운 가을이기에 '가을스럽네'라고 하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옵니다. 그리고, 곧 '겨울스러운' 바람으로 바뀌리라 느끼고, 겨울스러운 석 달이 지나면 새롭게 봄이 되어 '봄스러운' 볕이랑 바람이 찾아올 테지요. 이 가을을 온몸으로 한껏 받아들이면서 가을사랑을 꿈꿉니다.

[다섯] 꽃바라기

시골에서 노는 아이들은 늘 풀이랑 꽃이랑 나무를 바라봅니다. 차츰 찬바람으로 바뀌는 늦가을에도 풀이랑 꽃이랑 나무를 바라보기는 똑같지만, 이 무렵에는 해가 잘 드는 곳을 찾아서 '해바라기'를 합니다. 겨울에도 해바라기를 하며 놀아요. 그러니까, 낮에는 '풀바라기·꽃바라기·나무바라기'를 하면서 놉니다. 밤에는 '별바라기·달바라기'를 하며 놀지요. 해나 별을 보려고 하늘로 고개를 돌려 눈길을 두기에 '하늘바라기'입니다. 자전거를 달려 바다로 나들이를 가면 '바다바라기'예요. 샛노란 가을들을 누리려고 논둑길을 거닐 적에는 '들바라기'입니다. 나무가 우거진 숲을 사랑하기에 '숲바라기'가 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갖 놀이를 즐기니 '놀이바라기'가 되고요.

어버이는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는 어버이를 사랑합니다. 서로 '사랑바라기'입니다. 아이도 어른도 가슴에 꿈을 품기에 '꿈바라기'입니다. 살림을 함께 짓는 곁님을 보살피면서 '님바라기'입니다. 책을 좋아하면 '책바라기'이고, 영화를 즐기면 '영화바라기'입니다. 돈이 좋으면 '돈바라기'일 테며, 노래가 좋으면 '노래바라기'예요. 비 내리는 소리와 냄새를 좋아해서 '비바라기'요, 눈 내리는 결이랑 빛을 좋아해서 '눈바라기'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어떤 바라기로 삶을 짓는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최종규 시민기자의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우리말 살려쓰기, #우리말, #한국말, #말넋, #삶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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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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