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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의 달콤한 유혹
 엿의 달콤한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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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 사시오. 엿. 구멍난 냄비나 떨어진 고무신 받아요."

엿 장수의 쩔그렁거리는 가위 소리에 금세 아이들이 모여 들었다. 누구는 벌써 고물과 엿을 바꿔 입에 넣었고, 바꿀 고물 없는 아이들은 엿판과 엿 장수 가위만 쳐다볼 뿐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니, 1970년 후반쯤 일이다. 새마을 사업으로 한참 분주했던 시기. 엿 장수는 리어카(수레)에 엿판을 싣고 마을 구석구석을 돌며 고물을 모았다.

변변한 과자 하나 구경하기 힘든 시절. 엿 장수가 오는 날은 단 것을 맛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동네 아이들은 언제 올 지 모를 엿 장수를 기다리며, 깡통과 쇳조각 등을 모았다. 산 지 얼마 되지 않는 고무신을 찢어서 엿을 바꿔 먹다가, 어머니에게 혼 나는 친구도 흔했다. 엿 장수가 오는 날은 아이들에게 잔칫날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엿 장수가 온다고 모두가 엿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찌그러진 냄비, 부러진 호미나 그것이 아니면 비료 포대라도 있어야 엿으로 바꿀 수 있었는데, 매번 집에서 그걸 찾아내기란 불가능했다. 그럴 때면, 엿은 더 달아 보이고, 엿 장수의 가위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엿판을 가지고 튀었다

"쌔비('홈치다'의 속어)먹자. 고물 거두러 리어카 놔두고 다른 곳에 갈 데 쌔비 도망가지 뭐. 큰 도랑(개울)으로 튀면 아무도 모를 거야."

한 친구에게서 불쑥 튀어 나온 제안에 몰려 다니는 친구 몇몇이 금세 화답했다. 구체적인 작전도 짰다. 좁은 길을 한참 올라가야 닿는 언덕에 집이 있는 친구가 엿 장수를 유인하기로 했다. 리어카가 올라가기 힘들어, 골목에 세워 놓을 것이니 그 때 나와 친구가 엿을 훔쳐 내기로 하고, 또 한 친구는 망을 보기로 했다. 쩔그렁거리는 가위 소리가 났다. 범죄를 모의한 친구들이 모였다.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 리어카 뒤를 따랐다. 단맛의 유혹과 범죄의 두려움이 동시에 엄습했다.

범행을 계획했던 장소에 다다르자, 친구가 자기 집에 못 쓰는 솥이 있다고 엿 장수에게 말했다. 깨진 가마솥은 어른들 허락이 있기 전에는 가져 가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다. 집까지 올라가서 깨진 가마솥을 보고 내려오는 시간까지 20여 분, 그 정도면 엿 몇 조각 훔쳐 도망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앞장서고 엿 장수가 가위 소리를 쩔그렁거리며 골목길을 올라갔다. 모퉁이를 돌아 이제 친구도 엿 장수도 보이지 않았다. 망을 보던 친구가 지금이라고 손짓을 했다. 가뜩이나 더운 여름날 땀이 비오듯 흘렀고, 온몸은 사시나무 떨리듯 했다.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빈 엿판 아래에는 녹지 않도록 밀가루를 뒤집어 쓴 엿 반판이 고스란히 있었다. 엿 장수가하듯 끌을 대고 가위로 땅땅 쳐서 엿을 떼어 내면 그만이었다.

겨울에는 막대 엿을 팔았지만, 여름에는 쉽게 녹기 때문에 사각 나무판에 판엿을 담아서 끌을 대고 뚝뚝 쳐서 끊어 팔았다. 윗 판을 들어내자 반 판 정도 엿과 끌. 여분의 가위와 엿을 담아주던 종이도 있었다. 입에 침이 한가득 고였다. 

엿장수가 하듯, 엿에 끌을 대고 가위 손잡이로 옆을 쳤다. 떵! 떵! 떵!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가위와 끌이 부딪히는 소리는 너무 컸다. 그러나 소리만 요란할 뿐 엿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또다시 떵! 떵! 떵. 엿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고, 멀리서 망을 보던 친구가 소리가 너무 크다고 손가락을 입에 갔다 댔다. 누군가 등 뒤에서 '요놈들'하면서 뒷덜미를 움켜잡을 것 같았다.

엿은 떼어지지 않고 끌에 엉겨 붙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끌을 쳐본들 소리만 울렸다. 그러나 그냥 가기엔 눈앞에 있는 엿이 너무 달콤해 보였다. 친구가 비닐에 싸인 판 엿을 통째로 감아 들었다. 엿 몇 조각이 졸지에 엿 반판으로 바뀐 것이다. 어린 도둑 셋은 뒤도 안 돌아보고 뛰었다. 엿 반판을 큰 도랑(개울)가에서 배가 울렁거리고 이가 시큰할 정도로 먹었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고자질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후한 인심을 베풀었다. 유인책으로 맡았던 친구가 오지 않았지만 엿맛에 취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나 범행은 금방 탄로 났고 범인들은 금세 체포되었다. 엿을 잃어버린 엿장수가 이장님을 만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고, 이장님은 유인책 역할을 했던 친구를 채근해 범행 일체를 자백 받은 것. 그것도 모르고 단맛에 취해 있던 범인들은 이장님 지시를 받은 고등학교 형님들에게 체포되어 구판장(동네서 운영하는 구멍 가게. 동네 어른들이 술추렴하는 곳으로 동네 중심에 위치했고 큰 공터가 있었다)앞으로 끌려왔다. 범인들만 몰랐지 벌써 동네가 한바탕 난리가 난 것이었다.

부끄럽고 죄스러운 기억, 그러나 그립다

판에 엿을 가위로 뚝뚝 끊어 판다. 예전에는 신문지나 밀가루 포대 종이에 싸서 줬다.
▲ 재래시장에서 산 엿 판에 엿을 가위로 뚝뚝 끊어 판다. 예전에는 신문지나 밀가루 포대 종이에 싸서 줬다.
ⓒ 안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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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들. 간도 크다. 엿을 판째로 가지고 도망쳐? 경찰서 갈 거여? 여기서 벌 설 거여?"

이장님의 호통에 아이들보다 부모님이 연신 고개를 숙였고, 엿장수 아저씨는 애들이 오죽 먹고 싶었으면 그랬겠냐며 이장님이 건네는 막걸리 잔을 받았다. 동네 어른 모두가 나서서 고물을 모아 변상해 주었고 막걸리를 내며 용서를 구했다. 어린 범인들은 한쪽 구석에서 막걸리 추렴이 끝날 때까지 팔이 빠지도록 손을 들고 있어야 했다. 처벌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종아리에 피멍이 들도록 싸리 회초리를 맞았다.

그 일이 있고나서 한동안은 엿장수의 가위 소리를 피해 다녔다. 엿 몇 조각을 떼먹으려다 엿판을 통째로 훔친 도둑질. 벌써 40년이 다 된 나의 숨겨놓은 범죄 이력이다. 공소 시효로 치자면 한참 지났고, 엿 장수 아저씨도 돌아 가신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마음 깊숙이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이 남아 있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랬겠냐며 오히려 우리를 감싸주시던 엿장수 아저씨, 내가 지은 죄처럼 용서를 빌던 동네 어른들... 생각하면 아직도 고맙고 죄스럽다.

부끄럽지만 이 이야기를 꺼내 놓은 건 명절 때가 되면 떠나온 고향이 그립기 때문이다. 고향에서는 아직도 엿장수 아저씨가 쩔그렁 가위 소리를 내며 아이들을 불러 모을 것 같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태그:#도둑질, #엿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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