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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2006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타계 때까지 10년간 낙관적 삶의 태도를 보였다. 백남준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그가 뉴욕거리를 휠체어를 타고 불편한 몸으로 활보하면서 이마에 손을 얹고 손가락으로 날갯짓하며 "나는 행복해(I am happy I am happy)"를 연발하는 동영상을 볼 수 있다. 이런 여유는 과연 어디서 오나. 그건 인간에 대한 신뢰, 예술에 대한 신념 또한 어떤 난관도 인드망 같은 소통의 도구 '네트워킹'으로 풀어낼 수 있다는 그의 자신감에서 온 것이리라. 그는 죽은 순간까지 유쾌했고 아내가 해준 저녁을 맛있게 먹고 눈을 감았다 - 기자 말

백남준미술관, 국제공모전에서 건축가 선정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백남준아트센터' 정면(파사드)사진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백남준아트센터' 정면(파사드)사진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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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은 2001년에 시작한 백남준미술관의 건축 국제공모전에서 430여 명의 응모자 중 수상자가 정해진 해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독일 젊은 건축가 크리스텐 쉐멜(K. Schemel)이었다. 공사비가 예상을 훨씬 초월해 난관에 부딪혔으나,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캐나다 건축가 마리나 스탄코빅(Marina Stankovic)의 수정안이 나와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가칭 '백남준미술관(경기도 용인시)'은 그 후 이름을 '백남준아트센터'로 확정했다. 총 부지 3만983㎡, 5600sqm(6만300sft)로, 지상 3층과 지하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선 레이어(layer)처럼 여러 겹으로 만들어진 TV 화면이 연상되는 거울로 된 전면이 보인다. 1층과 2층 전시실, 비디오보관실, 다목적공간전시실, 비디오 아카이브 등으로 이뤄졌다.

백남준아트센터는 그가 떠난 후 반년이 지난 2006년 8월 말부터 착공에 들어가 2008년 5월에 완공된다. 백남준의 이니셜 'P' 모양을 본뜬 것인데 그의 퍼포먼스에 등장하는 피아노 모양을 하고 있어 흥미롭다. 걸작 '3원소'를 비롯해 'TV 물고기', 'TV 시계', 'TV 로봇(K-456)' 등이 소장된다. 그리고 이 아트센터는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라는 별칭도 있다.

말년에 로봇걸작 '쿠베르탱'을 남기다

백남준 I '쿠베르탱(옥외작품)' 2004, 모니터, 철재, 네온, DVD 플레이어 결합, 150×150×200cm 소마미술관소장. 옥내작품도 따로 있다. 밤에 보면 더 멋지다. 예술과 기술의 조화를 추구하는 21세기 인간전형을 제시한다
 백남준 I '쿠베르탱(옥외작품)' 2004, 모니터, 철재, 네온, DVD 플레이어 결합, 150×150×200cm 소마미술관소장. 옥내작품도 따로 있다. 밤에 보면 더 멋지다. 예술과 기술의 조화를 추구하는 21세기 인간전형을 제시한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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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이 평생 많은 로봇을 만들었는데, 그중 우주인 같은 '쿠베르탱'이 압권이다. 국민체육진흥공단 소속 소마미술관 측은 88서울올림픽 유산을 기리기 위해 백남준에게 의뢰한 작품으로 2004년에 소마미술관 야외에 설치됐다. 스포츠와 예술이 공통점인 순수하고 열정적 인간형을 표현해보고자 했다는 게 공단 측의 설명이다.

쿠베르탱은 유럽에서 수없는 전쟁을 겪으면서 인류가 평화롭게 사는 길은 없는가를 늘 고민했고 그래서 '근대올림픽'을 창안했다. 백남준 또한 '위성아트'를 통해 전쟁을 피하고 지구촌이 공존의 길을 모색하며 경계 없는 인류공동체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생각이 서로 같다. 작업하기에 불편한 몸에도 '쿠베르탱'이라는 걸작을 남겨 그 의의가 더욱 크다.

이 작품의 구성을 보면 전자우산이 로봇 위에 하이테크시대를 상징처럼 세워져 있고, 오륜기가 정보시대 감각에 맞게 디자인했다. 네온으로 모니터에 색감을 살려줘 로봇을 최고 멋쟁이로 만들었다. 이 작품에는 40년간 로봇을 만들며 쌓은 그의 노하우가 다 녹아있다.

2004년 10월, 뉴욕에서 마지막 퍼포먼스

백남준 공식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백남준의 마지막 퍼포먼스. 장조카 하쿠타 켄은 아리랑을 부르며 악보종이를 씹어 먹는 동안 백남준은 그의 모자에 색칠을 하고 피아노반주를 한 후 조카를 시켜 피아노를 넘어뜨렸다
 백남준 공식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백남준의 마지막 퍼포먼스. 장조카 하쿠타 켄은 아리랑을 부르며 악보종이를 씹어 먹는 동안 백남준은 그의 모자에 색칠을 하고 피아노반주를 한 후 조카를 시켜 피아노를 넘어뜨렸다
ⓒ Ken Haku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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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사망하기 약 1년 반 전인 2004년 10월, 뉴욕 백남준 자택 근처 그의 분관인 소호 그랜드가(街)에서 국내외 기자를 초대했다. 그는 그의 멘토였던 '존 케이지'에게 바친다는 부제를 붙이고 그의 장조카인 하쿠타 백 켄(Hakuta Ken)과 함께 파트너가 되어 그의 생애 마지막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2000년 구겐하임 전시 이후 4년 만에 처음이었다.

한국 기자와 인터뷰에서 "아직도 못한 게 뭐냐"(<조선일보>)를 물으니 백남준은 "연애"라 말했고, "한국 민주화에 기여한 김대중 대통령은 훌륭하다"고도 했다. 또 "미친놈 소리 많이 들으셨죠?" 하니까 "그럼, 미국선 지금도 내가 미친놈이래" 등등의 대화를 나눴다. "뭘 가장 하고 싶으냐"(MBC)하고 물으니 "창신동 가고 싶어, 한국 가서 묻히는 게 내 소원이야"라고 답했다.

이날 관객으로 참여한 엘리자베스 브룬 스미소니언 미국 미술관 관장은 백남준에 대해 한 마디 부탁한다는 한국기자 질문에 "백남준은 미래를 보여주는 예술가로 500년 뒤에는 미켈란젤로와 같은 급의 예술가로 받아들여지고 그 같은 추앙을 받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2005년 유작 '엄마(Ommah)' 발표

백남준 I '엄마(Ommah)' 2005. 백남준의 마지막 작품으로 위 사진은 워싱턴에 사는 재미동포 도정숙 씨가 찍어 보내준 것이다
 백남준 I '엄마(Ommah)' 2005. 백남준의 마지막 작품으로 위 사진은 워싱턴에 사는 재미동포 도정숙 씨가 찍어 보내준 것이다
ⓒ 도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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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백남준은 가장 한국적인 분위기가 나는 작품 '엄마(Ommah)'를 발표한다. 이 작품은 팔을 활짝 벌린 듯한 대나무에 살굿빛 나는 모시옷을 끼워 넣고, 아래 중앙에 TV 모니터를 설치했다. 마치 엄마 품처럼 편안한 느낌을 준다. 백남준은 어려서 막내로 자랐다. 엄마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그의 아련한 추억 그리고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듬뿍 담긴 작품이었다.

제목을 영어로 쓸 때 '맘(Mom)'이 아니고 우리말 소리대로 '엄마(Ommah)'로 한 건 이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 속에 한국적 정감과 이미지가 풍부했기 때문이리라.

여기 모니터에는 색동옷 입은 3명의 한국 소녀가 등장해 비디오게임이미지를 배경으로 춤을 추고 공놀이를 하면서 '엄마'를 반복해 외친다. 이 아이들이 바로 백남준이 돌아가기 3달 전, 인터뷰 요청으로 그와 인연을 맺은 문인희(아이리스 문, Inhee Iris Moon) 재미 독립큐레이터의 세 딸이라는 걸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들었다.

2006년 1월 29일, 마이애미에서 숨지다

60년대 질풍노도의 독일시대, 쾰른성당 앞에서 찍은 백남준 사진. 이제는 신화가 된 그의 모습이 많이 그립다. TV화면 캡처
 60년대 질풍노도의 독일시대, 쾰른성당 앞에서 찍은 백남준 사진. 이제는 신화가 된 그의 모습이 많이 그립다. TV화면 캡처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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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전 세계를 누비며 '노마드 아티스트'로 살았다. 마침내 2006년 1월 29일 오후 8시쯤,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은 채 육신의 고향인 서울도 아니고 예술의 고향인 뉴욕도 아닌, 낯선 휴양지 마이애미 자택에서 숨을 거둔다. 누구도 알 수 없는 죽음 직전 그의 근황을 시게코 여사는 저서 <나의 사랑 백남준>을 통해 이렇게 들려준다.

"남준과 나는 여느 겨울처럼 추운 뉴욕 떠나 따뜻한 마이애미에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드디어 2006년 1월 1일이 밝아 "남준! 축하해요. 당신이 몸져누운 지 10년이 지났지만 이렇게 건강하잖아요. 우리 열심히 살아요" 그는 "고마워! 다 당신 덕분이야", "4월에 뉴욕 돌아가면 당신 잘 다니는 한국음식점에서 자축 파티해요" 남준은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2000년 1월 6일 한밤중 곤히 잠들어있던 남준이 갑자기 큰 소리로 잠꼬대를 했다. "존스 에밀리, 하비, 알 로빈스…!" 다들 '플럭서스' 시절의 친구 이름이다. 그들은 다 젊어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알 로빈스'는 하버드대학 출신의 시인이었다.

"남준 무슨 일이에요 꿈을 꾼 거예요" 잠에서 깨어난 그가 멍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왜 갑자기 죽은 친구이름을 불러요?" 남준은 "그랬어.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어"라고 답한다.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죽은 친구들이 왜 꿈에 나타났단 말인가. 설마 그를 데려가려고 다시 잠든 그를 바라봤다. 나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꿈을 꾸고 3일 후인 1월 29일 이날은 음력정월 초하루였다. 늘 그랬든 우리는 단골식당에서 아침과 점심을 먹으며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남준은 장어를 좋아해 저녁엔 정월초하루 기념으로 장어덮밥을 먹기로 했다. 남준은 일찍이 떠돌이 생활을 해 입맛이 까다롭지는 않았다. 그날따라 시장서 사온 장어가 싱싱해 그는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는 평소보다 일찍 오후 6시 무렵에 잠자리에 들었다. 2시간이 지났을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남준은 숨결이 거칠어지더니 급기야 헉헉 대더니 자신의 몸을 제어 못했다. "남준! 남준! 정신 차려요. 내 말 들리면 내손 잡아줘요". 조금 전에 식사를 잘 하던 그였는데 급한 마음에 911 누른 뒤 전화기에 대고 "빨리 와요. 남편이 쓰려졌어요!"

그의 숨소리가 가늘어지고 그 순간이 내 생애 가장 긴 시간이었다. 난 울기 시작했다. 그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1964년 처음 그에게 연정을 품은 시간 등이 떠오르면서 그와 함께 한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남준의 얼굴이 핏기가 없이 새하얗게 변하더니 결국 내 팔 안에 안겨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 <나의 사랑 백남준> 본문 중에서

2006년 2월 3일, 뉴욕에서 장례거행

권현정 전시기획자가 2006년 우연히 뉴욕출장을 갔다 백남준 장례식(1시간 반 진행) 참석하게 되어 그 생생한 현장을 사진에 담았다. 그날 뉴욕에는 눈이 많이 왔단다
 권현정 전시기획자가 2006년 우연히 뉴욕출장을 갔다 백남준 장례식(1시간 반 진행) 참석하게 되어 그 생생한 현장을 사진에 담았다. 그날 뉴욕에는 눈이 많이 왔단다
ⓒ 권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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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떠난 지 5일 후인 2006년 2월 3일 시게코 여사를 비롯해 환경작가 장 클로드 크리스트 부부, 독일 브레멘미술관 W. 헤르젠고라트 관장, 스미스소니언 미술관 E. 부룬 관장, 작가 빌 비올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등등 400여 명이 뉴욕 프랭크 캠벨 장례식장에 참가했으며 관 안에 누운 백남준의 마지막 얼굴을 보려고 조문 행렬이 끝이지 않았다.

이날 장례식은 하쿠타 켄이 사회를 봤고 '오노 요코'가 첫 번째로 추모사를 했다. 그녀는 "1963년 일본 자신의 집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래전부터 알던 옛 친구처럼 친근감을 느꼈다"며 "백남준은 늘 조용히 나를 지지하고 내 편을 들어주어 어려울 때마다 정신적으로 의지한 내 마음 속 부처였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그가 너무나 그립다"고 애도했다.

그리고 백남준의 평생 벗이었고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전시에도 함께 한 '존 핸하르트' 수석 큐레이터는 "그는 영감을 준 사람이었고 항상 뭔가를 창조하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인생은 계속 변화 속에 있었고 비디오아트의 조지 워싱턴 같은 예술가였다"고 추모했다.

송태호 당시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는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훌륭한 미술관을 짓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추모사를 한 하쿠타 켄은 자신과 오랜 인연,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바지를 내린 사건이 터진 후, 전 세계에서 전화가 쇄도했던 일 등 삼촌에 얽힌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세계적인 예술가의 삶을 회고했다.

시게코 여사는 그녀의 책에서 백남준이 애독한 <뉴욕타임스>가 그의 추모기사를 쓰면서 그를 '성공한 반란자(renegade)'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는 "많은 예술가가 기존의 심미적 개념을 조롱하느라 그 젊음을 바치지만 그런 반란자의 지위를 늙을 때까지 유지하는 경우는 드문데 백남준은 이런 반란에 성공한 위대한 예술가다"라며 기사 내용을 인용하며 특별히 소개했다.

시게코 여사는 장례식장으로 뉴욕 맨해튼 중심에 자리 잡은 고급스러운 프랭크 캠벨 장례식장을 정했다. 그녀 "생전 물질적 부를 경멸한 백남준에게 마지막 가는 길이나마 편하게 그리고 조금은 호사스럽게 보내고 싶어서였다"며 남편에 대한 측은지심을 드러냈다.

백남준 장례식 풍경은 역시 뭔가 달랐다. 그날 사회를 본 하쿠타 켄은 백남준이 1960년 연출한 넥타이 자르기 퍼포먼스를 돌연 제안했다. 그러자 숙연했던 영결식장 분위기는 순식간에 변했다. 오노 요코가 제일 먼저 하쿠타 켄의 넥타이 자르고 다시 옆으로 이어지고 그렇게 잘린 울긋불긋한 넥타이는 고인의 시신에 수북이 쌓였다.

시게코 여사는 백남준을 어디에 안치할까 고민한 끝에 그를 낳은 한국, 공부를 한 독일, 40년간 활동한 뉴욕에 나눠 안치하기로 한다. 그녀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고 우주처럼 심오했던 남자였다"는 한 마디로 요약했다.

49재는 서울에서, 한 달 후 퍼포먼스는 뉴욕에서

지난 2006년 2월 1일 오전 고 백남준씨 분향소가 마련된 경기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1층 중앙홀 고인의 작품인 '다다익선' 앞에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06년 2월 1일 오전 고 백남준씨 분향소가 마련된 경기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1층 중앙홀 고인의 작품인 '다다익선' 앞에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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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백남준의 타계 소식을 듣고 1월 31일부터 2월 3일까지 '특별추모기간'으로 정하고 '다다익선' 앞에 분향소를 마련했다. 그리고 백남준의 초기부터 후기까지 뉴미디어 8점을 포함한 드로잉, 사진 등을 원형전시실에서 전시하며 그를 애도했다. 백남준과 관련된 친지와 인연을 맺은 지인들과 국내외 미술계 인사들이 분향소에 대거 참배했다.

다시 49재를 맞아 백남준 유골은 3월 15일 햇살이 따사로운 초봄, 서울에 도착해 유작인 '내 손'과 함께 오후 6시 서울 삼성동 봉은사 법왕루에 모셔졌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3월 18일 49재를 올렸고 그의 영혼을 달래며 저 먼 하늘로 떠나보냈다.

봉은사에는 백남준의 '다다익선'이 촛불 모형 탑으로 세워졌다. 한국에 온 하쿠타 켄은 바이올린을 땅에 끌고 다니는 백남준의 유명한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또한 그의 벗 핸하르트는 바이올린을 단숨에 내려쳐 부숴버리는 18번 퍼포먼스를 재현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49재가 끝나고 1달 후, 다시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오노 요코는 백남준을 위해 죽은 영을 저승으로 보내는 '진오기 굿' 같은 퍼포먼스를 벌였다. 그녀는 정말 백남준을 열렬히 사랑한 것 같았다. 그 당시 기사(<동아일보>)를 다시 읽어보자.

"4월 26일 오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동그란 선글라스에 검은 옷차림을 한 오노 요코는 백남준을 사랑한 사람들과 지인 등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약속 조각-뼈(PROMISE PIECE-BONES)'라는 제목의 추모 굿을 벌였다. 그녀는 이렇게 "동서남북의 신이시여, 백남준의 영혼을 지켜 주소서"라고 크게 외치며 그를 위한 주술사 역할을 나서서 했다.

이에 앞서 오노 요코는 커다란 꽃병 사진을 배경으로 450여 개의 꽃병조각을 테이블에 쌓아 놓은 뒤 백남준 죽음을 상징하는 말 "꽃병이 깨졌다"고 선포하고는 거기 참가한 수많은 사람에게 그 깨진 꽃병조각을 가져가게 했고 그걸 통해 그를 추모하게 했다." - <동아일보> 2006년 4월 28일 "'백남준의 영혼을 지켜주소서' 오노 요코, 굿판 같은 추모공연" 기사 중에서

장례 후, 시게코 여사가 남긴 소회

백남준이 부인 시게코 여사에게 선물한 연가(戀歌)로 먼저 시를 쓰고 그 위 그려준 드로잉
 백남준이 부인 시게코 여사에게 선물한 연가(戀歌)로 먼저 시를 쓰고 그 위 그려준 드로잉
ⓒ Shigeko Kubo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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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게코 여사는 장례와 49재를 다 마치고 자택에 돌아와 자신의 소회를 이렇게 술회했다.

"1996년 쓰러진 후 10년. 그는 생일을 앞두고 정말 세상을 떠났다. 작업실은 예전 그대로다. 많은 소품 중 방 벽에는 남준이 투병 중 소일거리로 그린 글과 그림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거기에 '시게코는 내 생명을 6년간 연장해줬고, 그동안 나는 내 생애 최고점에 도달했다. 그걸 여기에 증명한다'는 남준의 유머와 익살로 넘치는 글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시게코는 자신도 모르게 남편을 위해 천 개의 손으로 자비를 베푸는 '관음보살(千手觀音)'이 된 셈이다. 그러면서 남편이 자신을 위해 연서 위에 드로잉을 그려준 점을 털어놓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 짧은 연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시게코! 우리가 젊었을 때 당신은 내게 최고의 연인이었고, 이제 내가 늙으니 당신은 최고의 어머니 그리고 부처가 되었어!"

백남준 장례 중 그의 '유작전' 열려

2011년 '아트링크'에서 최재영 사진작가가 선보인 '백남준 굿(1990)' 사진전 때, 이 전시의 기획을 맡은 '문인희' 독립큐레이터 모습(맨 중앙)
 2011년 '아트링크'에서 최재영 사진작가가 선보인 '백남준 굿(1990)' 사진전 때, 이 전시의 기획을 맡은 '문인희' 독립큐레이터 모습(맨 중앙)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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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가기 약 1주일 전인 2006년 1월 20일부터 뉴욕 한국문화원에서는 앞서 말한 문인희 큐레이터 등이 기획한 백남준 전 '무빙 타임(Moving Time)'이 열리고 있었다. 백남준의 장례 진행 중, 그의 전시회도 동시에 열리고 있는 셈이었다. 장례 참석차 왔던 전 세계 미술계 거물들이 다 이 전시를 참관했다. 백남준은 운 좋게 돌아가서도 현역 작가처럼 전시회를 열었다.

이제 백남준 이야기는 여기서 끝을 맺고, 사후 그의 추모전시와 기사에 대해 알아보자.

<오마이뉴스>는 2006년 2월에 백남준 추모기사인 '내 구멍 난 양말은 가난한 자의 TV'를 올렸고, 그해 3월 국립현대미술관은 백남준 추모 특별전 '지상에서 영원으로'전을 그해 5월 국립고궁미술관에서 '백남준 스튜디오의 기억과 메모라빌리아' 전도 열었다. 그리고 그해 7월 리움미술관에서는 '백남준에 대한 경의'전을 선보였다.

같은 해 해외에서는 뉴욕의 구겐하임, 현대미술관(MoMA), 아시아협회에서 그리고 독일 브레멘미술관, 영국 테이트미술관, 프랑스 퐁피두미술관에서 회고전이 개막됐다.

2007년 백남준 타계1주년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과천)에서 3월에 시게코 여사를 모신 가운데 백남준 사진전 '부퍼탈의 추억'이, KBS에서 8월에 백남준전 '비디오광시곡'이 열렸다. 2009년 백남준 3주년에는 백남준이 남긴 "다음 전시는 중국이야"라고 했는데 문인희 큐레이터가 베이징 카파(CAFA)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을 열어 그 유언도 이뤄졌다.

또 2010년과 2011년에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랜덤 액세스'전 'TV코뮌전' 그리고 2011년 아트링크에서 최재영 사진작가가 찍은 '백남준 굿' 사진전이 열렸다. 같은 2010년에서 시작해 2011년까지 그의 '회고전'을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팔라스트 미술관과 함께 공동기획으로 영국 테이트리버풀(TATE Liverpool) 미술관에서 개최했다.

2012년 7월 백남준 탄생 80주년을 맞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노스탤지어 피드백의 제곱'전 때 전시장 입구
 2012년 7월 백남준 탄생 80주년을 맞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열린 '노스탤지어 피드백의 제곱'전 때 전시장 입구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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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2년 탄생 80주년을 맞아 그의 추모기사 '문화칭기즈칸 백남준'이 <오마이뉴스>에 올라갔고, 백남준아트센터에서는 백남준의 스승을 기리는 '존 케이지'전과 백남준 예술에서 시간관을 다룬 '노스탤지어 피드백의 제곱'전을 선보였다.

미국에서도 탄생 80주년을 맞아 워싱턴 스미소니언미술관에서 2012년 12월 13일부터 8개월간 '백남준 특별전_글로벌 비저너리(Global Visionary)' 전이 열렸다. 이 전시에는 이 미술관이 2009년에 소장한 '백남준 아카이브' 중 선별된 140점과 67점 작품을 통해 그의 예술철학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이 어떤 과정으로 완성되는지 입체적으로 보여줬다.

2013년 4월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부드러운 교란'이, 2014년 7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독일 아카이브전'이, 2015년 3월 학고재에서 '백남준전'이 열렸다.

백남준 관련 도서(자료) 및 도록, 작품목록 사업 등에 대해서

2010년 4월 2일 프레스센터 20층에서 백남준아트센터 총체미디어연구소가 낸 <백남준의 귀환(백남준 총서 2권)> 출판기념회 축하연 때 사진. 가운데 이영철 초대 백남준아트센터관장이 보인다
 2010년 4월 2일 프레스센터 20층에서 백남준아트센터 총체미디어연구소가 낸 <백남준의 귀환(백남준 총서 2권)> 출판기념회 축하연 때 사진. 가운데 이영철 초대 백남준아트센터관장이 보인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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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출간된 백남준 관련 도서를 보면, 우선 미술비평가 이용우 선생이 2000년에 낸 <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이 있다. 쉬운 책은 아니지만, 대중과 그래도 친근하다. 저자는 해외에서 두루 백남준 작업현장을 가까이 보면서 백남준의 예술적 핵심을 정리한 책이다. 다음으로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 관장이 1992년에 낸 <백남준과 그의 예술>의 증보판으로 2007년에 <굿모닝 미스터 백>을 냈다. 미술사적으로 꼼꼼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시게코 여사가 2010년 아내로서 본 백남준에 대한 이야기 <나의 사랑 백남준>을 비롯해 인류학적으로 접근한 박정진 교수의 <굿으로 보는 백남준 비디오아트 읽기>가 있고, 이경희 여사가 유치원 동창으로 백남준과 겪은 일을 소개한 책 2000년 <백남준 이야기>와 이를 보완한 2011년 <백남준 나의 유치원 친구>가 있다.

또한, 백남준아트센터는 2010년 총서 1권으로 백남준론 번역서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를 냈고, 총서 2권으로 <백남준의 귀환>을 냈다. 이 책의 편자 총체미디어 연구소는 백남준 연구를 하는 후학에게 좋은 기초자료가 되고자 해서 출간했다는 설명이다. 아트센터는 2010년 이후 6년간 1권의 총서도 못 냈다.

몇 해 전에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은 국내에도 '국립 백남준미술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을 한 적이 있는데 그건 차치하고라도 한해 500억 원 정도의 예산을 집행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은 1992년 외국전시 번안인 <백남준 : 비디오 때, 비디오 땅>과 1997년 <부퍼탈 사진전> 외 백남준 관련 도록이나 자료는 낸 적이 거의 없다.

사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93년 뉴욕 휘트니비엔날레 서울순회전 때 백남준이 휘트니비엔날레에서 받은 상금 전액을 기부해 당시 한국의 미술 수준으로 도무지 열 수 없는 세계적 수준의 전시를 성사시켰는데도 아직 국립현대미술관은 그에게 진 빚도 제대로 갚지 못하고 있다. 백남준 사후 10주년을 맞아 어떤 조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끝으로 문화관광부로부터 지원받는 '백남준 문화재단'을 소개하면 이 재단은 전 세계에 얼마나 그의 작품이 어디에 분포돼 있고, 누가 소장하고 있는지 등을 파악해 '백남준 작품전집(catalogue raisonne)'이나 '백남준 작품목록사업'을 연차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나 예산과 인원 문제 등으로 지금 현재까지 그 진행이 지지부진하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태그:#백남준, #시게코, #하쿠타 켄, #오노 요코, #문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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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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