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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화에서 이어집니다)

김의 문화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문화야말로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 동력이야. 그리고 문화를 함께 나눔으로써 인간과 인간은 인간적인 만남을 이룰 수 있는 것이지. 문화라는 끈끈하고 질긴 매듭을 통해 사람을 묶어야 어떤 사회든, 어떤 국가나 국가 간이든 그 관계가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는 얘기야."

그때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김에게 과외를 받던 중학교 2년 겨울 방학은 어쩌면 지금의 K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거푸집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렇게 어둠을 비쳐주던 한 줄기 햇빛 같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 김이 군에 입대한 이듬해 봄에 과외는 끝났다. 김은 군대에 가면서 선물로 자신이 그간 모아놓은 일본문화와 관련된 모든 것을 K에게 물려줬다.

"사람은 못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라"는 말과 함께.

김은 자신의 앞날을 예상했을까. 그는 군 입대 후 6개월 만에 원인이 알려지지 않게 죽었다. 그리고 한참 기억의 뒤켠에 숨겨져 있다가 지금 K에 의해 추억된다.

K의 이야기에 모두 크게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김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이번에는 사회선생 리에가 묻는다.

"K선생님, 그럼 그때부터 K선생님께서 느낀 일본 문화의 특색이나 특징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K는 잠시 한숨을 돌리고 말한다.

"사실 문화라는 것은 전반적으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라고 꼭 집어서 얘기하기는 어렵고요. 특히 음악에 대해서는 배운 게 없어서 들어서 좋으면 그냥 좋아요. 영화와 소설에 대해서는 조금 말할 수 있겠네요.

뭐라고 할까. 일본 것은 미시적인 부분이 많아요. 집요한 것도 있고요. 어느 작은 것, 그러니까 아주 평범하고 사소하다고 볼 수 있는 소재를 해부하고, 작은 이야기로 나누고, 미세한 심리적 부분까지 표현하는 것처럼. 영화의 경우 코미디물도 많지만 대체로 너무 심각한 게 많아요.

내용이 심각하다기보다 내용은 일상적인데 분위기가 뻣뻣해서 조금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눈에 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한때는 '웰컴 미스터 맥도널드',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 '간장선생', '기쿠지로의 여름', '춤추는 대수사선' 시리즈와 같은 코미디를 많이 좋아했고요. 극사실적으로 폭력적인 것 빼놓고는 사극이나 액션물도 좋아합니다.

아, 실화를 소재로 한 '아무도 모른다'는 영화 혹시 본  분 있습니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잘 사는 일본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고 안타까웠죠. 아이들끼리 남겨진 각박한 현실이 참담해서요. 일본은 한국보다 현대화, 그리고 그에 따른 도시화가 먼저 이뤄진 곳이에요. 그래서 일본보다 짧게는 5년 길게는 10여년 뒤에 한국에서도 그 도시화-현대화에 따른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 환경오염부터 급격한 노령화, '묻지마' 살인, '오타쿠'나 '히키코모리', '이지메' 문제, 심지어 원조교제와 같은 나쁜 현상들이 일본의 뒤를 좇아 한국에서도 불거져 나오니까요. 그래서 영화나 소설은 현실의 거울이니만큼 관심을 갖고 보고 있습니다.

영화나 소설처럼 '센과 이치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천공의 라퓨타'를 비롯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도 좋아합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왈츠곡 '인생은 회전목마'를 핸드폰 연결음으로 쓴 적도 있을 만큼요. 전체적으로 일본 영화의 미덕은 참으로 정성들여서 만든다는 점입니다. 일본 사람들의 섬세함과 세심함을 반영하고 있다고 봅니다."

한국문화를 주제로 한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이상하게 K의 일본 문화관에 대한 청문회처럼 흘러간다. 처음 모임에 참여한 미키는 재미있다는 듯 말없이 웃으며 바라본다. 비바람이 더욱 거칠어졌다. 캠프 모닥불이 꺼져가듯 하나 둘씩 풀처럼 눕고, K는 미키와 마주보고 밀어를 나눈다. 날이 모질어도 또 다시 그렇게 창밖은 희뿌옇게 밝아온다.

태풍이 할퀸 상처는 깊었다. 최근 유래 없이 무려 28명이나 목숨을 잃었다. 실종된 사람도 10명을 넘어 모두 40명 가까이 태풍에 스러진 것이다. 태풍 복구 소식이 시끄러운 일본 언론에 작은 단신 기사가 묻혀 있다. '일-미, 에셜론 일본 참여 비밀 조약'이라는 내용이다.

섬나라 일본의 가장 큰 섬인 혼슈 최북단 아오모리현 미사와(三澤) 주일미군 공군기지의 감청시설은 공식적으로는 2014년 철거됐다. 하지만 일본의 요청으로 비공식적인 감청을 벌여오다가 미사와와 다른 2곳을 합쳐서 북한과 러시아, 중국에 대한 감청을 아예 일본에 맡긴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에 일반인들은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전략이나 군사전략 전문가들에게 이는 곧 일본이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진정한 군사대국으로 나아가겠다는 야망의 발톱을 드러낸 사건으로 다가왔다. 그렇지 않아도 전세계적으로 통신감청 정보 수집, 이른바 '시진트(SIGINT)'의 강국인 일본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기 때문이다.

'에셜론'은 조지 오웰 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빅 브라더'나 다름없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호주, 뉴질랜드 등 영연방국가들과 함께 전 세계 4개 권역으로 나눠 인공위성은 물론 최첨단 IT장비들을 이용해 전화, 핸드폰, 팩스를 비롯한 모든 통신의 감청과 이메일, 심지어 문자메시지까지 무차별적으로 감시하는 네트워크를 운영해 왔다. 냉전 시대에는 비교적 단순하게 적성국들의 군사적 감청과 감시에 국한됐지만, 이젠 동맹국도 예외가 없다.

그 분야도 군사에 국한된 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방위적으로 확대돼 모든 통신내용이 감시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K가 미키와 핸드폰으로 나누는 대화도 엿들을 수 있고, 어떤 인물들이 특정 장소에서 모임을 갖는다고 하면, 그들의 대화도 몽땅 감청할 수 있다는 얘기다. 수년전 에드워드 스노든이라는 미국 NSA 계약직 직원이 동맹국 지도자들의 핸드폰까지 감청하고 있는 미국의 추악한 행태를 언론에 알려 동맹국 간 갈등을 빚기도 한 게 그 사례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감시체계에 일본이 참여하게 된 것은, 미국의 일본을 앞세워 중국의 팽창을 막아보려는 속셈과 에셜론을 통해 아시아의 패권에 가까이 가고자 하는 일본의 계산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일본은 북한과 중국, 러시아는 물론 한국까지 손바닥 안에 놓고 현미경처럼 살펴 볼 수 있게 됐다. 아시아 동부를 일본의 거대한 '피놉티콘', 다시 말해서 수용된 죄수들의 모든 것을 감시할 수 있는 거대 원형 감옥으로 만들게 된 것이다. 또 다시 불어올 내밀하고 치밀한, 그리고 거대한 태풍의 전조였다.

깡패들이 혼자 다니지 않는 것처럼 나쁜 일도 몰려다닌다. 이 뉴스가 나온 지 2주만에 일본이 센가쿠열도로 부르는 댜오위다오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인들이 어선에 나눠 타고 섬에 상륙하려 하자 일본 경비함이 접근해서 위협을 가하던 중 충돌로 어선 한 척이 침몰했다.

일본 경비함들은 이들을 구조하지 않았고, 함께 온 어선들이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려다 물대포를 쏘면서 접근을 막던 일본 경비함 때문에 두 명이 숨졌다. 가뜩이나 중국 내에서 중국인들의 시위와 위협에 일본 기업들이 철수를 서두르고 있는 상태다. 이젠 주재원이나 유학생들은 아예 일이나 학업 등을 포기하고, 줄을 이어 귀국하고 있다. 점점 중국의 반일 정서는 극에 달했다. 중국 당국은 단교까지 얘기하면서 일본을 성토했다.

이 와중에 한국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 지경이다. 한국 정부는 수년간 지속돼 온 중국과 일본의 신경전에 대해 두 나라의 문제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하지만 중국 측의 압력과 회유가 한국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투자 회수 위협과 수출에 대한 클레임과 같이 경제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한편 독도 영유권에 대한 한국 지지, 중국의 방공식별구역에서 이어도를 제외하겠다는 '선심성' 꼬드김으로 한국 정부를 움직였다.

"정부는 일본 경비함의 비인도적 어선 충돌과 조난자들의 구조를 방해한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다. 아울러 댜오위다오는 명나라 때부터 중국의 땅이었으나 19세기 말 일본이 무인도로 무단 편입, 침탈한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일본은 양국 간 분쟁을 조정하는 데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  독도를 자국 영토인 것처럼 근거 없이 주장하는 반복된 거짓말도 즉각 중단해야 할 것이다."

외교부 부대변인의 이와 같은 강성 공식 발표가 나오자 외교가는 물론 국회에서 큰 논란이 번졌다. 야당은 물론 정부, 여당에서조차 적절치 못하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독도의 대한민국 영토 확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편파적으로 중국의 편을 드는 말을 아꼈어야 했다. 하지만 유약하기 그지없는 대통령의 뜻이라니 정부와 여당은 수그러들었다.

야당만 흥분했다. 최대 야당 민주복지당 한석영 대표는 혀를 끌끌 찼다.

"일제에서 해방되자 미국이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하더니 이젠 다시 옛날로 돌아가서 중국의 입김에 꼼짝도 못하는 나라가 돼버렸어. 아무리 일본이 미워도 왜 남의 나라끼리 다투는데 훈수를 둬. 외교의 외(外)자나 아는 거야? 제 코가 석자인줄도 모르고. 외교라는 게 북한처럼 가진 게 없어도 뚝심 있게 해야 하는데, 아무리 중국의 힘이 세졌다 해도 이렇게 바지저고리 노릇을 하는 게 무슨 국가야!"

김충식 원내대표도 보탠다.

"이러다가 일본이 만만한 우리에게 화풀이라도 한다면 고스란히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지난 대통령 때부터 제대로 된 정상회담도 무려 3년간 전혀 이뤄지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간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가리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우리는 공식적 사과를 요구하면서 국제사회에서 명분에서 앞서왔는데, 이번 외교부의 섣부른 논평 때문에 일본이 공격권을 갖게 되면 우리는 궁지에 몰립니다. 게다가 미국도 요즘 중국에 기울어진 우리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고요."

하지만 이런 걱정은 의석수 30%도 못되는 군소당으로 전락한 제1야당의 한탄일 뿐이다. 여당과 정부는 외교부의 입장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에 따른 후폭풍에 관한 대책이나 향후 한국의 입장에 대해 적극 옹호해줄 국가를 섭외하는 일에는 실패했다. 게다가 국가의 중대한 이익이 달려 있는 외교 정책에서조차 야당을 끌어안아 한 목소리를 못 내고 내부 분열만 거듭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라 안타까울 따름이다.

일본은 들끓었다.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가 잇달았다. 최고의사결정연구단이 그동안 군불을 때 온데다 한국 정부의 일방적인 중국 편들기가 불을 질렀다. 대일영회는 굿판이 벌어진 양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한국인을 죽여라! 다케시마를 즉각 점령하라. 자이니치는 모두 더러운 한국으로 돌아가라!"

섬뜩한 선동과 폭력이 난무했다. 전국에서 조총련 학교를 포함한 한국인 학교 근처에서 '자이니치(在日)'는 물론 한국을 옹호하는 일본인 수십 명이 폭행당했다. 수년 전만 해도 대일영회의 이른바 '헤이트 스피치'에 담겨진 인종적 편견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지금 양심 세력은 거의 사라졌다.

모든 일본의 언론은 우리나라의 80년대 초 언론통제 시절처럼 총리와 정부의 입장만 반복하는 앵무새가 돼 버렸다. 심지어 비교적 객관적 논조를 보인 아사히신문조차 한국 정부 비판에 열을 올리는 열악한 상황이다.

일본 정부는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해 강력히 항의했을 뿐 아니라 주한 일본 대사 소환과 그 이상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엄중히 경고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연구단이 바빠졌다.

"일단 주사위는 던져졌다. 우리 연구단이 그간 준비해 온 전략적 계획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어야 할 시기다. 다케우치 료타, '네오 팍스 자포니카(Neo Pax Japonica) 계획' 실행에는 차질이 없지?"

다나카 겐이치 자민당 간사장이자 연구단장이 묻는다.

"만반의 준비는 마쳤습니다. 실행 디데이만 잡으면 됩니다."

다케우치의 자신감이 가득찬 답이다.

'네오 팍스 자포니카 계획'은 일본의 야망이 담겨 있는, 그러나 자칫 일본을 재앙의 구렁텅이로 빠트릴 수 있는 '대동아공영' 야욕의 새로운 버전이다. 중국의 패권을 꿈꾸는 '중국몽(中國夢)'에 맞서 미국을 등에 업고, 아시아의 중심국이 되고자 하는 다소 허황된 계획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세부계획은 아시아에서 중국 세력의 확대를 막고 한국의 분단을 영구화하는 한편 한국과 중국을 묶어 전 세계적으로 고립시키겠다는 치밀한 책략이다. 미국과 함께 베트남, 태국, 미얀마, 인도, 파키스탄을 이어 중국과 한국을 지정학적으로 가두자는 뜻이다. 일본의 이 같은 속셈은 중국의 부상, 특히 중국이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들어 세계의 경제 패권을 손에 넣고자 하는 움직임을 반드시 막으려는 미국의 속내와 맞아 떨어져서 실현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더욱이 일본에게 위협이 됐던 북한의 불장난도 막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다. 그간 미국의 미사일방어(MD)시스템을 더욱 개량해 해상 이지스함, 인공위성, 고고도 조기경보기 등을 통해 해상에서는 물론 육상에서도 미사일 공격을 당할 경우 미사일이 일본 전함이나 일본 땅에 단 한 발도 떨어지지 않도록 일본미사일방어(JMD)도 완성시켰다. 이젠 어떤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방어는 물론 공격을 받는 순간 무차별적 공격이 가능한 일본의 무력이 완성돼 가고 있는 것이다.

"디데이는 8월 6일이 어떤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날, 이날을 대일본의 회귀 첫 걸음으로 하자는 얘기야."

다나카 연구단장은 사뭇 비장하게 말한다.

"뜻은 알겠습니다만, 한일의원연맹 소속 한국 의원들이 그날부터 4박5일 동안 일본에 머뭅니다. 그날 시작은 무리인 것 같고, 8월 15일은 어떠신지요? 1945년 쇼와 황제폐하께서 옥음(玉音)으로 종전을 선포하신 날로 그때의 수모를 잊지 않고 다시 일어선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다케우치가 조언한다.
           
"오케이, 종전기념일에 다시 우뚝 서자는 뜻, 좋군. 그렇게 하게."

다나카는 음흉한 웃음을 띠며 흡족해 한다.


태그:#대동아공영, #팍스 자포니카, #에셜론, #NSA, #SIG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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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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