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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화에서 이어집니다)

알람은 정확하다. 오전 4시, 양양 낙산사 일출을 보러 가기 위해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해 뜨는 시각이 오전 7시 30분 언저리라고 한다. 조금 늦게 일어나도 넉넉하지만 꼭 미키와 해뜨는 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두른다. 마침 날씨가 맑을 것으로 예보돼 더욱 기대한다. 먼저 일어나 미키의 얼굴을 바라본다. 안온하고 자애롭고 청초해 보인다. 도저히 간밤 야성과 관능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하릴없이 픽하는 웃음이 나온다.

커피 내릴 준비를 하고는 아직 잠든 미키를 뒤에서 껴안는다. 다시 그의 남성이 굳는다. 미키는 그를 느껴 잠에서 깨고는 K에게 미소 띤 얼굴로 가볍게 입 맞춘다. 둘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듯 잠시 서로에게 서로의 알몸 가슴을 비벼댄다. 미키는 샤워를 했지만 K는 마다한다. 그냥 미키의 체취를 자신의 몸에 담고 싶다는 핑계를 댄다.

경춘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동홍천 인터체인지로 빠져 설악산 가는 길을 탄다. 새벽이라 간간이 보이는 차들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속도가 무시무시하다. 터널을 몇 개 지나서 미시령 요금소로 나온다. 꼬불꼬불 산길을 빠져나오니 멀리 바다가 보인다. 늦겨울 새벽 아직도 깜깜하다. 먼 바다의 오징어잡이 배 집어등만 반짝인다. 속초 시내 외곽을 지나면서 몇 개의 신호등을 받고 나니 낙산사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을 견뎌왔던 낙산사는 없다. 10여 년 전인가, 화재로 거의 전소됐다. 천년 이상 전쟁과 세월의 풍파도 이겨낸 고찰이 대비가 소홀한 틈을 타 산불에 홀랑 타버린 것이다. 다행히 바닷가 홍련암만이 옛날을 담고 있다. 새로 단장한 홍예문을 지나 낙산사의 중심이 되는 원통보전으로 향한다. 새벽 예불이 끝나서인지 적막하다.

원통보전에서 종각과 해수관음상으로 이어지는 길, '꿈이 이루어지는 길' 이름이 아름답다. 미키와 함께 처음 걷는 길이라 더욱 뜻 깊다. 모든 사람들이 이 길을 걸어서 모든 좋은 꿈이 이뤄지는 때가 왔으면 하고 무모하게 발원한다.

지은 지 20여년 밖에 안 됐지만 1500 관음을 모셨다는, 현대 양식의 티가 많이 나는 보타전은 불시의 화재에도 제 모습이다. 여름에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연꽃으로 가득 찼던 연못 관음지에는 지금 얼음만이 차갑다.

의상대가 저만치다. 벌써 오전 7시가 훌쩍 넘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의상대가 마주보는 동해에 불기운이 서서희 비치는 느낌이다. 오늘 따라 하늘 언저리에도 구름이 비켜간다. 누르스름하면서도 짙붉은 먼 바다는 해산할 준비가 한창이다. 의상대에는 두 손을 마주잡은 미키와 K, 그리고 중년부부 몇 쌍이 동해의 출산을 간절히 기다린다.

양수가 터진 모양이다. 끄물끄물 붉은 빛과 주황 빛이 야금야금 퍼진다. 민머리 모양 햇님 끄트머리가 보인다. 점점 주변 어둠의 장막을 걷어치운다. 이제는 아주 서서히 이글거린다. 눈이 부시도록. '어느 안전이라고…' 하는 태양의 꾸짖음은 시선을 잠시 돌리게 만든다.

어느새 해는 수평선 바로 위에 걸쳐 바로 은쟁반 위 옥구슬이다. 천지개벽을 알리는 동종 소리가 우렁찬 환영으로 보인다. 이젠 탯줄 자르듯 바다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매몰차게 끊어낸다. 홀로 허공으로 떠오른다. 스스로 혼자만 위대하다. 영겁으로 이어지는 태양의 하루가 시작된다. 영상물로만 봤던 온전하고 벅찬 낙산사 해돋이가 눈앞이다. 예전 고교 시절 배웠던 '관동별곡'이나 '동명일기'의 일출에 대한 구절 구절, 그대로다. 그 내용들이 그냥 말로만 꾸민 것이 아니라 찡한 가슴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는 사실을 몸소 느낀다.

일출이라는 사건에 잠시 미키를 잊은 것이 사실이다. 혼자 미안한 마음에 K는 미키에게 무슨 소원을 빌었냐고 묻는다. 이틀에 걸쳐 부처님과 햇님에게 무엇을 축원했는지 묻는 것도 재미있는 우연이다.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뭐랄까 그냥 해 뜨는 아름다움만 느꼈어요.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고 할까요. 무념무상이라는 그 상태?"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K조차 미키를 잊고, 모든 삶의 단편들을 내려놓고, 그저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인간이라는 자연계 동물의 한 가지 종(種)에게 모든 것은 초라하다. 국가 혹은 사회라든지, 이념 혹은 철학이라든지, 필연이나 우연이라든지, 욕망이나 허영, 오만이나 편견이라든지 한낱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해돋이는 깨우친다.

추운 새벽 일출을 보기 위한 노력은 속을 따뜻하게 해 줘야 보상받는다. 두말 없이 양양시내에 있는 소머리국밥집으로 향한다. 미키에게 소머리국밥 소리를 꺼내자마자 단박에 '혐오 음식' 아니냐는 반응이다.

K는 웃으며 서양 사람들도 소나 양의 뇌를 삶아 먹거나 소스로 만들어 먹는다고 설명한다. 덧붙여 일본식 불고기 '야키니쿠'에도 소 혀를 구워 먹지 않느냐고 반문하며 소머리국밥집의 일반성과 보편성을 꿔 온다. 식당은 예전에 왔을 때보다 많이 달라졌다. 방송에서 '맛집'으로 선정된 다음 규모가 커졌으나 맛과 소박한 정취는  반비례한 것 같다. 뭔가 좀 부족한 듯해서 소머리 수육 반접시를 시킨다. 미키가 운전하기로 하고 소주 반 병을 반주 삼는다. 추운 데 있다가 실내로 들어와 따뜻한 국물과 소주가 들어가자 조금 불콰해진다.

다음 예정지는 고성 통일전망대다. 한국의 분단 현실을 보고 싶다며 미키가 정한 일정이다. 출발하기에 앞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마실 커피도 준비하기 위해 양양시청 근처에 만화가가 주인인 '커피창고'라는 이름의 카페를 찾는다.

핸드드립 커피라 더 마음에 들었다. 커피 맛도 꽤 좋다. 세 가지 커피 콩을 섞어서인지 쓴 맛과 단 맛 그리고 약간의 신 맛도 비친다. 사람들이 커피를 좋아하는 이유가 삶의 맛이 모두 담겨져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증명하듯.

미키가 무심코 핸드폰을 꺼내 전원을 켠다. 아무리 휴가라지만 어제부터 오늘 오전까지 핸드폰을 꺼놓았다는 것은 기자라는 직업을 가진 미키에게는 보기 드문 일이다. 언제, 어디서나 현장으로 뛰어갈 준비가 돼 있어야 하는 게 소위 알량한 기자들의 직업윤리이기 때문이다.

'아차' 싶다. 억지로라도 그냥 핸드폰을 꺼놓으라고 고집을 부려야 했다. 하루 동안 밀려있던 문자메시지가 쇄도한다. '동딩… 동딩… 동딩….' 처음에 무슨 내용인가 궁금해 하는 표정이던 미키 낯빛이 갑자기 납빛으로 변한다.

좋지 않은 예감은 왜 늘 맞는 것일까. 미키는 바로 버튼을 눌러 통화를 시도한다. 애타는 모습이다. 한두 번 통화가 안 된다. 다른 번호로 통화하려 애쓴다. 통화가 된다. 빠르고 격한 말로 긴박하게 얘기한다. 그렇게 3분여 지나자 전화가 끝난다.

미키가 흐느낀다. 부친이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급히 와달라는 소식이다. 이런 상태로 운전은 위험하다. 이내 술기운이 모두 달아난 K가 비상등을 켜고 서울을 향해 밟아댄다. 미키는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항공편을 알아보고 가장 빨리 도쿄에 닿는 것으로 예약한다. 서울 그녀의 숙소에서 짐을 쌀 겨를도 없다. 옷을 갈아입은 다음 여권만 챙겨서 인천공항으로 내달린다. 그렇게 황급히, 황망하게 떠난 게 K가 본 미키의 마지막이다.

비행기에서 내린 미키의 눈이 퉁퉁 부었다. 아버지의 급작스러운 뇌졸중 소식에 흘린 눈물 때문이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택시를 잡는다. '동대병원', 정확히 '동경대학의학부부속병원'으로 급히 가달라고 청한다. 택시에서 내려 핸드폰으로 받은 문자를 확인하고는, 병실을 찾아 미친 듯이 뛰어간다.

신경외과 병동의 특실 문에는 '이토 신타로 / M / 72세'라고 적혀 있는 명패가 달려있다. 미키 눈에서 다시 눈물이 글썽인다. 정신을 추스를 틈도 없이 묵직한 미닫이문을 연다. 창가에 있는 병상에 아버지가 누워 있다. 잠이 들었는지 의식을 잃었는지, 눈감고 있는 늙은 아버지의 수액 주사바늘이 꽂힌 손을 두 손으로 꼭 잡는다. 그렇게 잠시 넋을 놓고 있을 때 어머니가 나타난다. 미키는 어머니를 부여잡고 흐느낀다.

그래도 다행이다. 저녁 식사 끝내고 나오던 중 쓰러진 아버지를 지인들이 가까운 이 병원으로 재빨리 옮겨 응급조치를 한 터라 심각한 상황은 아니란다. 마비된 부위도 없고, 재발을 막기 위해 스텐트 시술을 했으며, 약물로 다스리면 예전과 같이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는 전문의의 말을 듣고서야 미키는 안도한다.

조금 안정이 되자 아버지 뜻을 거스르고 한국행을 고집한 것이 잘못한 일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 이토 회장은 미키의 서울 근무를 반대했다. 대신 결혼을 서둘렀다. 서른을 코앞에 둔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일보다도 결혼을 먼저 해야 한다고 한사코 외국, 그것도 한국 근무를 말렸다.

그러나 미키는 커리어를 먼저 쌓고 싶다며 아버지를 뿌리쳤다. 그렇게 찜찜하게 떠나서 아버지에게 뇌졸중이 오지 않았나 하는 나쁜 생각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 때, 특히 불길한 일이 일어날 때, 사람들이 상관관계가 없는 사건을 연결시켜 비논리적인 판단을 하는 일이 미키에게도 일어난 경우다.

미리 알리기는 했지만 회사에 다시 연락해서 여러 가지 사정을 알리고 출근 일정을 추후에 조정하기로 한다. 미키는 그 다음에야 K를 떠올리고 전화한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 궁금하기는 하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음성이나 문자 메시지도 남기지 않는다.

불과 하루 전, 뜨겁게 사랑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의 뇌졸중 소식에 그의 곁을 떠나 지금 도쿄로 돌아왔다. K는 잠시지만 미키의 안중에도 없었다. 어제는 그가 없으면 죽을 줄 알았는데, 오늘 그가 없어도 죽지는 않는다는 것 알게 된다.

갑자기 슬퍼진다. 미키가 늘 생각하고 꿈꿔왔던 사랑이나 연애의 감정과 지금 미키의 현실에서 일어난 연애와 사랑이 다르다는 것이. 어쩌면 미키는 K를 사랑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사랑이나 연애에 대한 감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자신의 감정적 나이가 벌써 지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 혹은 연애라는 감정이 참으로 가볍고, 흩어지기 쉽고, 그래서 금세 망각의 강에 빠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고 싶다. 하지만 거부할수록 뚜렷이 각인된다. 이젠 사랑이라는 개념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그런 의심을 부정하고 싶다. 미련은 쉽게 접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그녀의 사랑에 대한, 연애에 대한 이른바 '청춘적' 사고와 실재는 오래 전에 떠났다는 것이 차가운 현실일 따름이다.

이틀 후 이토 회장은 퇴원한다. '자유의 언덕'이라는 이름의 학교가 생긴 이후 마을 이름이 된 지유가오카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키가 동승한다. 아버지 이토 회장은 미키의 손을 잡고, 흐뭇해하면서 자신의 뜻을 확실히 전한다.

"미키, 아빠가 너를 어릴 적부터 아빠, 엄마와 헤어져, 외국에서 공부시킨 게 지금은 후회가 된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무슨 욕심으로 미국에 홀로 유학을 보내 서로 외로운 시간을 보냈는지…. 이젠 아버지도 늙었다. 병원에 입원하고 나니 이 생각, 저 생각이 들더구나. 더 늦기 전에 너를 결혼 시키고 손주를 보는 것이 소원이다."

중견그룹을 이끌고 있는 미키의 아버지 이토 회장은 현재 자민당 중의원 인 경제산업성 다케우치 전 장관의 아들, 검사 출신 다케우치 료타 기획조정 실장과 약혼하라고 채근한다.

"미키, 다케우치 정도면 네 배우자가 될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일도 중요하지만 서른 넘어서 미혼이라는 것은 우리 집안에도 도움이 안 된다. 올해 안에 약혼하고, 내년 봄에 결혼해라."

집안끼리 예전부터 알고 지낸 터다. 미키의 아버지는 미키를 좋아하는 다케우치를 사위로 들여 회사도 키워보고 딸을 권력가의 며느리로 둔다는 셈법이다. 미키는 난감하다.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 사람인 다케우치 실장. 알기는 알지만 남자로서, 결혼의 대상으로서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다.

더욱이 다케우치 실장 집안에서는 약혼을 하면서 방송사 기자 생활을 그만뒀으면 하고 바란다. 다케우치가 검사를 거쳐 현재 재직 중인 최고의사결정연구단 기획조정실장으로서 경력을 쌓은 다음 정치인으로 나서는 것을 뒷바라지해 줬으면 하는 것이다. 미키는 일에 재미를 붙여가고 있다. 그 성과도 나름대로 거두고 있는 직장을 결혼, 아니 약혼과 함께 그만둔다는 것은 전혀 내키지 않았다.

'자신의 배우자를 자신이 선택할 수 없고, 결혼과 함께 전문성 있는 일을 그만둔다는 것 자체가 부조리의 조각들이다.'

미키는 말이 없다. 긍정의 표시는 전혀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한 부정도 아니다. 그러나 부정의 극단을 향해 자신이 다가가는 것은 멈출 수 없다. 아버지의 바람은 알지만 아직 결혼하고 싶지는 않다.

'결혼이라는 '새장'에 일찍, 그것도 아버지라는 타인의 의사로 찾아들어가고 싶지 않다. 언제든지 새장을 벗어나려는 미래의 내 모습이 보인다.'

자신의 인생에서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 결정의 주체는 자신이라는 것, 아버지의 체면을 위해 때가 됐으니 서둘러 결혼하는 일은 결코 없다는 생각이 서울로 떠나기 전보다 더 확고해 진다.


태그:#의상대, #일출, #결혼 새장,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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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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