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뢰머광장의 정의의 여신(Justitia)과 니콜라이교회
 뢰머광장의 정의의 여신(Justitia)과 니콜라이교회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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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처음 나라 밖을 나가 첫발을 딛은 땅이 프랑크푸르트다. 정확하게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이다. 쉰이 넘어 2014년 5월 대산농촌재단에서 보내주는 유럽농촌공동체 연수단을 따라 나선 것이다. 물론 살면서 외국에 나갈 기회는 몇 차례 있었으나 귀찮거나 절실하지 않았다.

사람 사는 곳이 나라 안이나 밖이나 거기서 거기가 아니겠느냐, 사람 사는 일이야 어디나 다 마찬가지 아니겠느냐는 편견이 강했다. 한마디로 외국의 역사, 문화, 자연, 생활환경 따위에 흥미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참 모자라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독일은 한국과 많이 달랐다. 일단 정리정돈이 참 잘 되어 있는 사회였다. 보이는 곳마다 대개 깨끗하고 반듯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모두 제 자리를 잘 지키고 있는 나라가 독일이었다. 그러니까 자연은 마구 훼손되고 사람들은 제 분수와 주제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풍경이 일상처럼 벌어지고 있는 한국과는 다른 차원의 국가이자 사회처럼 보였다.

프랑크푸르트 중심, 뢰머광장(Roemerplatz)에 들어서 광장에 우뚝 선 정의의 여신(Justitia) 상을 마주보면서 그 느낌은 더 강해졌다. 정의의 여신상이 발산하는 정의로운 정기와 상서로운 주술이 짜릿하게 전해졌다. 독일은 사람들이 다르게 사는 나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나라라는 예감이 점점 사실로 다가왔다.

"프랑크푸르트 시청의 발코니에서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의 환호와 찬사를 한 몸에 받은 한국인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 아니 아시아 최고의 축구선수 차범근입니다."

뮌헨에서 생각나는 한국인이 전혜린이라면,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단연 차범근이다. 독일교포인 통역가이드, 그 자신이 축구광인 박동수씨가 뢰머광장의 구 시청사 건물을 바라보며 그 사실을 거듭 상기시켜주었다.

분데스리가 1부 팀인 프랑크푸르트(Frankfurt) 축구팀의 차범근 선수는 만년 하위권의 팀을 단숨에 상위권으로 끌어올리는 발군의 활약을 펼친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4년간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며 122경기 46골을 기록하면서 팀의 전성기를 주도했다. 오죽했으면 독일 국가대표 축구감독이 독일 귀화까지 권유했겠는가.

특히 1979~80시즌 팀 역사상 최초로 유럽축구연맹(UEFA)컵 우승을 이끈 일등공신이었다. 당시 선수들이 우승컵을 들고 프랑크푸르트로 개선, 시청  발코니에 서서 뢰머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는다. 외국인 최초로 한국인 차범근 선수가 시청 발코니에 선 것이다. 그것도 들러리가 아닌 단연 주역이었다. 훗날 시청 발코니에 선 두 번째 한국인은 그의 아들 차두리 선수였다.

조국이 가혹한 군부독재에 시달리던 그 암울한 시절, 그는 불우한 한국인 동포들을 위로해준 거의 유일한 영웅이자 희망이었다. 그가 바로 한국인에게는 정의의 신과 같은 존재였다. 동아시아 변방의 축구선수가 당당히 실력 하나로 세계 최고의 축구 무대인 독일의 분데스리가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한국인. 그 시절 한국 땅에서 들리는 기쁜 뉴스는 차범근 선수의 활약 소식 밖에 없었다고 기억한다.

차범근 선수가 외국인 최초로 발코니에 올라 시민들의 영웅 환대를 받은 프랑크푸르트 구 시청사
 차범근 선수가 외국인 최초로 발코니에 올라 시민들의 영웅 환대를 받은 프랑크푸르트 구 시청사
ⓒ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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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공항에서 만난 '아름다운 농촌주의자' 황석중 박사

초행길의 외국, 그것도 비행시간 11시간 거리의 머나먼 서양이자 유럽의 허브, 독일 프랑크푸르트. 처음 마주친 공항 로비가 마치 피안의 외계와 같이 느껴져 불편하고 불안했다. 그러나 연수단을 마중 나온 두 명의 한국인과 한 명의 독일인 때문에 곧 안심이 되었다. 연수단의 지도교수 황석중 박사와 통역가이드 박동수씨. 그리고 틈만 나면 책을 펴들던 독일인 버스기사.

그 세 사람 때문에 앞으로의 여정에 불안감과 불확실성은 사라지고 기대감만 남았다. 특히 독일농정 전문가 황석중 박사는 인상적이었다. 말과 생각이 모두 신선하고 존경스러웠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우리 농업과 농촌의 살 길을 그렇게 제대로, 올바르게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농정 전문가는 만나기 어려웠다.

그는 연수 기간 내내 일관되고 단호하게 정리해 놓은 듯한 그의 농정 철학을 주장하고 강의했다.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경청하다 보니 마치 평소 내가 하던 생각과 이야기를 듣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의 농정 철학의 기조는 한마디로 '돈 버는 농업'이 아니라 '사람 사는 농촌'이라야 한다는 것. 농사를 지어 못 먹고사는 농민도 농촌을 떠나지 않도록 나라가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

농정에 친환경농업정책을 처음 도입한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의 서울 농대 대학 동기라고 하는데 과연 그럴 만했다. 겉으로도 독일에서 박사공부를 마치고 농진청 초지과장까지 지낸 보기 드문 엘리트 농정 공무원 출신이다. 그러나 초지가 자꾸 골프장으로 개발되는 걸 참을 수 없어 사표를 집어던졌다고 한다.

황 박사는 농촌이 아름다운 나라가 곧 선진국이라고 주장한다. 독일이 선진국 소리를 듣는 이유가 공업이나 서비스업에 있지 않고, 국가기산업인 농업에 있다는 게 그의 확고한 지론이다.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으나 논리적인 설명을 듣자 깊이 이해가 되었다.

"독일은 농가 농업소득이 국민평균소득의 75%에 불과하고 농민의 비율은 2% 남짓합니다. 국민총생산 대비 농민총생산도 고작 1%에 불과하고요. 한국은 아마 3% 남짓하지요. 하지만 독일은 국민적 합의로 농업, 농촌, 농민을 위해 농민수익사업을 지원하고 있어요. 국가가, 국민이 농민의 기본생활을 보장해 주는 거지요. 그래서 농부는 영광스러운 자리로 대접받아요. 아무나 농부가 될 수 없고, 아무나 농사를 지을 수 없어요."

그는 아무나 정부의 농업보조금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는다. 기업농, 대농이 아니라 제대로 농업전문 직업교육을 받은 소농, 가족농이 농정지원 정책의 최우선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농촌다운 농촌은 고유의 문화경관을 간직한 농촌, 전통 미풍양속이 계승되는 농촌, 번잡하지 않고 쾌적한 농촌, 천박한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농촌입니다. 농업은 인간의 삶을 보전하는 생명산업이며 농촌은 식량 생산기지예요. 농촌은 우리 모두가 돌아가야 할 고향이 아니든가요."

10여일 동안 독일과 오스트리아 농촌공동체를 둘러보는 동안 신념과 확신에 찬 '사람 사는 농촌' 농정론을 펴는 황석중 박사. 그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자꾸 들었다.

"황석중 박사 같은 이가 한국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해야 하는데…"

독일농정 전문가 황석중 지도교수(모자 쓴 이)와 파독광부 아들 박동수 통역가이드
 독일농정 전문가 황석중 지도교수(모자 쓴 이)와 파독광부 아들 박동수 통역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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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광부의 아들, 박동수 통역가이드의 아프고 슬픈 현대사  

지금 독일에는 한인들이 약 3만5000명 정도 살고 있다. 우리 연수단의 통역가이드를 맡은 박동수씨도 그 중 한 명이다. 경제, 상업의 중심지라 한인 사업자가 많이 모여든 프랑크푸르트 인근에만 약 7000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한인 독일 이주가 촉발된 계기와 역사는 1960년대 독일의 내부 사정에서부터 비롯된다. 

1960년대 전후 동서독으로 분단된 독일은 통일독일이라는 숙명적 목표를 위해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인다. 그 결과 '라인강의 기적'으로 상징되는 경제대국으로, 유럽의 강국으로 거듭 태어난다. 당시 실업률이 0%였을 정도로.

경제가 발전할수록 인력이 문제였다. 모든 인력이 공장으로, 공장으로 몰렸다. 이른바 힘들고 더럽고 어려운 3D업종에서는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 광부, 간호원, 청소부, 그리고 농부가 바로 그런 직종이다. 방법은 단 하나. 외국에서 인력을 수입해오는 것.

"한국인들은 가난했지만 자존심만큼은 강했어요. 광부나 간호원 일은 해도 청소부 일은 아무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박동수씨의 아버지도 당시 광부 일을 하러 독일로 건너간 파독 광부 출신이다. 지하 1000m까지 수직으로 내려가 거기서 다시 갱을 수평으로 파고 막장에 들어가 탄을 캐내는, 험하고 모진 노동이었다. 처자식과 독일을 위해 독일 사람은 할 수 없는 힘든 일을 감내했다. 

간호원 일도 마찬가지였다. 주사, 투약 등 일반적으로 한국 간호원들이 하는 일은 독일에선 의사만 할 수 있는 일이다. 간호원은 나머지 허드렛일을 맡아야 했다. 무거운 환자를 실어나르고 온갖 오물을 처리하고 시체를 닦아주는 험하고 더러운 일. 역시 독일 사람은 하지 않는 기피직업이었다. 이런 일을 서로 해보겠다고 약 1만 명의 한국 간호원들이 독일에 들어왔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모두 7진으로 나뉘어 약 2500명의 광산근로자가 독일에 들어왔다. 2차로 1970년에서 1977년 10월까지 약 5300명이 추가로 독일광산의 막장 채탄광부가 되었다.

파독광부와 파독간호원들은 계약 기간이 끝나고 독일에 머무르거나 더 넓은 세상으로 떠났다. 광부와 간호원이 서로 사랑을 하고 가정을 이루기도 했다. 특히 당시 파독광부들은 거의 대학 졸업을 한 고학력자들이었다. 독일의 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해 교수나 학자가 된 이들도 적지 않다. 이때 사업을 하려는 이들은 자연스레 상업과 금융의 중심인 프랑크푸르트로 모여들었다.

"같은 시대에 일본인들은 발달한 자국 산업을 통해 상품을 팔러 가방을 싸들고 독일과 유럽을 누비고 있을 때, 우리는 조국이 가난하니 노동력을 팔아 외화벌이를 하려고 독일에서 땀과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파독광부의 아들 박동수씨도 군복무를 마치고 독일로 넘어와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하고 무역사업을 했다. 지난날 한국의 아프고 슬픈 현대사를 온몸으로 기록하고 있는 유력한 증인이다.

뢰머광장(Roemerplatz)의 중세건축물 오스트차일레(Ostzeile)와 성바돌레메 대성당
 뢰머광장(Roemerplatz)의 중세건축물 오스트차일레(Ostzeile)와 성바돌레메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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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뢰머광장에서 정의의 여신에게 기도를

프랑크푸르트, 정확하게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은 독일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로 꼽힌다. '유럽의 가운데 국가가 독일, 독일의 가운데 도시가 프랑크푸르트'라며 시민들의 자긍심이 강하다. 1585년 중세에 증권거래소가 개장된 도시로 '뱅크푸르트'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독일과 유럽 금융과 경제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인구 70만 명의 시내 중심가를 걷다보면 현대적 모습의 바탕에 중세의 전통이 저력으로 깔려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프랑르푸르트의 중심, 뢰머광장은 신성로마제국 시대의 유산으로 '로마인 광장'이라는 뜻이다. 광장의 중심에는 정의의 여신상이 솟대처럼 버티고 있다. 여신상은 왼손에는 정의의 기준을 형상화한 저울, 오른손에는 엄정한 심판을 상징하는 칼을 들고 있다. 죄를 지은 자는 광장을 편히 거닐 수 없을 듯하다.

광장은 14세기 중기에 300명 이상의 회원을 가진 모직상인조합의 숙소였던 '오스트차일레(Ostzeile)', 전시관이었던 구 시청사 등 중세의 목조건축물로 둘러싸여 있다. 1405년부터 구 시청사로 사용된 건축물에선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 축하연이 벌어졌다. 한국인의 영웅 차범근선수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처럼 시민들의 축하와 환영을 받던 발코니를 한참 쳐다보았다.  

오스트차일레 뒤편에는 역대 신성로마제국 황제들의 대관식이 치러진 성바돌레메 대성당, '카이저 돔(Kaiser Dom)'이 프랑크푸르트의 또 하나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고 있다. 13~15세기의 건축된 고딕양식 건축물로 높이 95m의 첨탑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광장 남쪽의 작고 아담한 니콜라이 교회의 모습과 대비된다. 

뢰머광장을 빠져나오는데 힘겹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조각상이 붙잡는다. 아우슈비츠 만행을 괴로워하는 독일인의 자화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프랑크푸르트는 15세기 중반에도 이미 이 지방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을 모두 시외에 따로 만든 게토(Ghetto) 지역으로 이주를 시켰다. 독일에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학살은 히틀러나 나치 이전에 이미 중세 때부터 자행된 뿌리깊은 죄악이었다.

이렇게 독일인들은 도시 광장 한복판에조차 아픈 역사를 잊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죄를 지은 선조들의 후손들은 유태인 희생자 후손들에게 끊임없이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며 스스로의 과오를 영원히 단죄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과 한국의 친일파들은 반성과 사죄를 모른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특히 친일파의 후손들은 무엇이 죄이고 악인지 아직도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나는 뢰머광장에서 정의의 여신에게 정의가 무엇인지 물어봤다. 그리고 조국이나 민족이란 무엇인지, 조국이나 민족을 배신하고 해치고도 용서를 구하지 않는 자들은 대체 어떻게 단죄를 해야하는지 절박하게 답을 구했다. 비록 정의의 여신은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답은 이미 내 안에 있다.  

"나는 그들을 용서할 수 없다. 그럴 자신도, 자격도 없다. 그러기엔 그들의 죄가 너무 크고 깊고 무겁다." 

아우슈비츠 만행을 괴로워하는 독일인의 자화상
 아우슈비츠 만행을 괴로워하는 독일인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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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박순옥 기자



태그:#프랑크푸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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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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