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바보숲농원'의 주인 홍일선 시인과 나귀 다정이의 행복한 모습으로 인간과 동물이 혼연일체가 되었다.
 '바보숲농원'의 주인 홍일선 시인과 나귀 다정이의 행복한 모습으로 인간과 동물이 혼연일체가 되었다.
ⓒ 박도

관련사진보기


'바보숲농원'의 식구들

여주시 점동면 도리 마을의 여강(남한강) 강변에 사는 홍일선 농부시인은 닭만 기르는 게 아니었다. 그의 '바보숲농원'에는 수백 수의 닭님 외에도 개님도, 오리님도, 그리고 뜻밖에도 당나귀님도 한 필 있었다. 나는 이즈음 보기 힘든 그의 당나귀님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홍시인은 곧장 마구간으로 안내했다.

그는 마구간에 이르자 당나귀에게 "잘 있었니?"라고 인사를 하며, 당나귀를 귀찮게 하는 날 벌레들을 쫓아주고 온몸을 매만졌다. 그러자 '다정(당나귀 이름)'이가 코를 벌름거리며 반갑게 주인의 가슴에 안겼다.

"아빠! 사랑해요."

당나귀는 그런 눈길이었다.

그 장면에 나는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에는 나와 동갑인 암소 한 마리가 있었다. 나는 학교를 다녀오면 그 놈을 데리고 방천이나 때로는 멀리 낙동강 샛강까지 데리고 가서 꼴을 뜯겼다. 나는 틈틈이 그 놈의 등을 몽당비로 긁어주거나 젖통 곁 사타구니에서 피를 빨아먹는 쇠 빈대를 손으로 잡아주면 그 놈은 입을 쩍쩍 벌리고 눈물을 질금질금 흘리며 꼬리로 내 등을 쳤다.

그것은 암소가 나에게 고맙다는 감사의 인사였다. 그 암소의 눈빛이 지금도 삼삼하다. 이즈음 나는 이 세상을 떠나 지옥에라도 떨어지게 된다면 아마 그 암소의 영혼이 나를 구원해 줄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든다. 나는 그때 그 놈을 무지하게 사랑했다. 나는 그의 쇠죽을 끓여주었고, 그때마다 어른들 몰래 쌀겨나 콩깍지를 한 줌 씩 뿌려주었다.

숫처녀 나귀 다정이의 요염한 모습
 숫처녀 나귀 다정이의 요염한 모습
ⓒ 박도

관련사진보기


메밀꽃 필 무렵

나는 홍 시인이 다정이를 사랑스런 눈빛으로 돌봐주는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는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한 장면이 연상되었다. 이 작품은 인간 본래의 혈육에 대한 원초적인 애정과 그리고 달밤의 서정, 인간(허 생원)과 동물(나귀)의 융합을 그린,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백미로 자연과 인간, 동물이 혼연일치된 순수 서정문학의 압권이다. 이효석이 그린 허 생원은 바로 홍 시인과 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반평생을 같이 지내온 짐승이었다. 같은 주막에서 잠자고, 같은 달빛에 젖으면서 장에서 장으로 걸어다니는 동안에 이십년의 세월이 사람과 짐승을 함께 늙게 하였다. 까스러진 목 뒤 털은 주인의 머리털과도 같이 바스러지고, 개진개진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곱을 흘렸다.

몽당비처럼 짧게 슬리운 꼬리는 파리를 쫓으려고 기껏 휘저어 보아야 벌써 다리까지는 닿지 않았다. 닳아 없어진 굽을 몇 번이나 도려내고 새 철을 신겼는지 모른다. 굽은 벌써 더 자라나기는 틀렸고 닳아버린 철 사이로는 피가 빼짓이 흘렀다. 냄새만 맡고도 주인을 분간하였다. 호소하는 목소리로 야단스럽게 울며 반겨한다.
- 이 효석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

나는 지난달 홍 시인의 '바보숲농원'에서 다정이를 첫 상면하고 주인에게 많은 얘기를 들었지만, 그 이야기가 아름다워 또 다시 듣고자 청을 드렸다.

"원주형님, 기왕이면 여주 장도 구경하실 겸 장날 오세요."

마침 여주장은 5, 10일이라고 하여 지난 10일 숨 막히는 더위임에도 다정이 이야기를 듣고자 여주로 갔다.

장꾼보다 장사꾼이 더 많은 여름날 여주장 풍경(2015. 8. 10.)
 장꾼보다 장사꾼이 더 많은 여름날 여주장 풍경(2015. 8. 10.)
ⓒ 박도

관련사진보기


'다정(茤汀)'이 이야기
  
"여름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써 쓸쓸하고 더운 햇발이 벌여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메밀꽃 필 무렵> 의 첫 문장처럼 내가 찾아간 한여름 여주 장도 더위로 한산했다. 우리는 장터 국밥집에서 푸근한 인상의 주모가 썰어주는 순대와 소머리국밥, 그리고 막걸리를 앞에 두고 다정이 얘기를 나눴다.

홍일선 시인은 2004년 여주 점동면 도리마을로 귀농했다. 그가 힘들게 농사짓는 것을 보고 김영현(소설가) 아우가  2014년 4월 그의 친구 겸 짐꾼 노릇을 할 수 있는 어린 당나귀 한 필을 사주고 가면서 이름까지 '다정(茤汀)'이라고 지어 주었다.

다정이는 2013년 1월 태생으로 이제 만 2년 6개월 지난 아직도 나이 어린 아씨 나귀다. 그의 고향은 이웃 강천 마을인데, 바보숲농원으로 오기 이전에는 송아지 밥을 먹고 자랐다. 홍 시인은 그에게 계속 송아지 밥을 사 먹일 수 없어 자기 농원 닭님들의 밥으로 주는 옥수수가루, 미강발효, 깻묵, 비지, 소금 등으로 특별히 다정이 밥을 만들어주었으나 한동안 먹지 않아 애를 태웠다.

전 주인은 나귀가 말을 듣지 않으면 채찍으로 때려주라고 말했다. 하지만 홍 시인은 차마 채찍을 들 수 없어 다정이에게 애소했다. 나귀는 IQ가 70~75 정도로 웬만한 사람의 말은 알아듣는다고 했다.

"다정아, 나는 너에게 송아지 밥을 사줄 형편이 안 된다. 네가 이걸 먹지 않으면 우리는 같이 살 수 없게 된단다."

그런 뒤 한 이틀 굶기며 내 버려두자 다정이는 그제야 홍 시인이 마련해 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아마도 자기도 지금 주인과 헤어진다는 것은 끔찍한 불행이 기다리고 있음을 감지한 모양이라고 했다. 곧 산과 들, 강둑에 풀이 무성하게 자라자 홍 시인은 다정이를 데리고 강둑으로 갔다. 그가 스스로 풀을 뜯어 먹게 함이었다.

"다정아, 원래 너희 조상들은 싱그러운 풀을 먹고 살았단다."

하지만 다정이는 강둑의 풀에 한참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 맡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나귀 '다정'이가 발에 익은 강둑 산책길로저 혼자  가고 있다.
 나귀 '다정'이가 발에 익은 강둑 산책길로저 혼자 가고 있다.
ⓒ 박도

관련사진보기


"다정아, 이 풀을 양식으로 먹어야만 네가 이 강마을에서 배부르게 살 수 있단다."

다정이는 그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마침내 자기의 본성을 찾은 듯 풀을 먹기 시작했다. 봄철에는 강가나 강둑의 어린 억새나 삐삐 등을, 여름과 가을에는 쇠뜨기나 고들빼기나물을 즐겨 먹었다.

'바보숲명상농원' 현판
 '바보숲명상농원' 현판
ⓒ 박도

관련사진보기




태그:#당나귀, #홍일선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