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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이었다. 우연한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베트남 여행을 제안받았다. 우리 시대 스승 중 한 분인 명진 스님과 함께 "베트남 평화기행을 다녀올 생각이 있냐?"는 제안이었다. 나는 앞뒤 생각할 틈도 없이 "네"라고 답했다. 일정이 되냐는 물음에 "무조건 맞추겠다"는 말까지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명진 스님을 처음 만난 때는 지난 2012년 10월이었다.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님의 천도제가 열린 장소에서였다. 그 해 8월, 외부 가격에 의한 상처가 뚜렷한 장준하 선생님의 두개골이 드러나면서 타살 의혹이 불거지던 때였다. 장 선생님이 숨진 채 발견된 경기도 포천 약사봉 인근 사찰에서 천도제가 있어서 갔다가 명진 스님을 처음 뵌 것이다. 

 2012년 10월 6일 포천 흥룡사에서 고 장준하 선생님 천도재에서 만난 명진스님.
 2012년 10월 6일 포천 흥룡사에서 고 장준하 선생님 천도재에서 만난 명진스님.
ⓒ 김성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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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도 인연이 이어지긴 했지만 고작해야 명절을 전후한 때에 전화로 새해 인사를 여쭙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명진 스님과 온전히 7박 8일간 함께 할 수 있다니, 나로서는 무조건 따르고 볼 일이었다. 그만큼 명진 스님과의 인연은 나에게 소중했다.

여행 이름은 '명진 스님과 함께 하는 베트남 평화기행'이었다. (사)평화박물관 건립 추진위원회(대표 이해동 목사)가 지난 2012년부터 진행해 오는 행사로 올해로 다섯 번째 평화기행이었다. 더구나 올해는 베트남 전쟁 종전 40년을 맞이하는 해라서 다른 해와 달리 지난 1월에 이어 두 번째로 추진되는 행사였다.

 한국을 방문해 당시 학살현장을 증언한 탄아주머니를 지난 베트남 평화기행에서 다시 만났다. 선생님, 변호사, 건설업, 가수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진 참석자들.
 한국을 방문해 당시 학살현장을 증언한 탄아주머니를 지난 베트남 평화기행에서 다시 만났다. 선생님, 변호사, 건설업, 가수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진 참석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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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중 일병이 베트남에 가게 된 이유

지난 7월 25일 오전 7시가 조금 넘은 우리는 인천공항에 모였다. 전체 일행은 모두 27명. 직업도 다양했다. 한 분은 목사였고, 또 두 분은 스님이었다. 가수 홍순관씨도 평화 콘서트를 위해 함께 했고 참가자 중 3분의 1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치과 의사, 변호사, 노무사 등 전문직 종사자 분도 있었고, 건설업을 하는 사장님도 여름 휴가 겸 의미있는 일정을 보내고 싶다며 참가했다. 이처럼 다양한 인생 경험과 직업을 가진 분들이 낯선 일행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데 나는 명진 스님이 가장 궁금했다. 그 바쁜 스님이 왜 갑자기 '베트남 평화 기행'을 떠나기로 마음 먹은 것일까.

1950년생이니 올해로 만 65세가 되는 스님에게 듣게 된 사연은 정말 뜻밖이었다. 좋은 행사에 단순히 이름을 빌려주신 것 아닐까 싶었는데 알고 보니 베트남 전쟁과 명진 스님의 인연은 남달랐다. 그 인연은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2년 당시 명진 스님은 승려가 아니었다. 맹호부대에서 입대 2년 차인, 속명 한기중 일병으로 근무하던 중이었다. 1971년 입대해 3년 후 제대했는데 제대 후인 1974년 법주사에서 사미계를 받아 승려가 됐다.

평소 후임병을 괴롭히던 소대 내 병장 한 명이 있었는데 그날도 또 스님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그 병장은 권투하듯 주먹으로 스님을 툭툭 치더니 "야. 너도 날 때려봐. 너도 사회에서 한 주먹 했다며..." 등의 말을 하며 시비를 걸었다.

결과는 끔찍했다. 시비를 건 고참 병장은 끝내 명진 스님이 내지른 한방에 처참하게 무너졌고 이는 계급사회인 군에서 있을 수 없는 하극상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그리고 부대 중대장이 소위 사고를 친 한기중 일병을 찾았다. 그래서 작심하고 찾아갔는데 중대장의 제안은 의외였다고 한다.

"너 영창 갈래, 아니면 베트남 갈래?"

이때 명진 스님의 선택이, '베트남'이었다고 한다. 명진 스님이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 계기였다. 

 베트남전 당시 가장 많은 군인을 파병한 맹호부대 장병들의 베트남 상륙 장면이다. 사진은 밀라이 박물관에서 촬영.
 베트남전 당시 가장 많은 군인을 파병한 맹호부대 장병들의 베트남 상륙 장면이다. 사진은 밀라이 박물관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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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명진 스님의 만남

'영창을 가느니 차라리 전쟁터를 가겠다'는 명진 스님이 베트남으로 향한 때는 1972년 3월. 부산항에서 출발하는 미국 군함을 타고 6박 7일간 항해 끝에 도착한 곳은 당시 맹호부대가 주둔하던 베트남 퀴논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스님은 정확히 1년간 참전했다.

그래서 스님께 여쭈었다. "그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뭐였냐"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여러 가지 상상을 가지고 던진 질문에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뭐, 본 게 없어요. 저는 당시 통신병으로 갔기 때문에 직접 총을 쏘는 등의 교전을 할 일도 없었고 또 그보다는 1972년 당시 베트남 전쟁은 소강 상태였어요. 저도 쏜 적이 없지만 누가 쏘는 것도 본 적이 없어요. 그냥 그렇게 1년간 별 일 없이 시간을 보내다 왔던 게 전부였어요. 그래서 사실 베트남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당시엔 전혀 몰랐죠. 부끄럽습니다."

베트남 참전 군인이었으나, 정작 총 한 번 쏘거나 또는 누가 쏘는 것조차 본 적 없다는 스님의 답변은 우리가 흔히 알던 베트남 전쟁과는 많이 달랐다. 그런 스님이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지난 4월 9일의 일이었다. 이날 베트남 전쟁 중 우리 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 생존자의 증언을 듣고서였다.

한국군 참전 50년, 베트남 종전 40년을(종전일 1975년 4월 30일) 맞이하는 올해, '(사)평화박물관 건립 추진위원회'는 당시 한국군에 의해 피해를 입은 민간인 학살 생존자 두 명을 초청했다. 전국을 돌며 강연회를 열었는데, 경북대학교 강당에서 열린 행사에 명진 스님도 참석했다. 당시 오대산 모처에서 동안거 중이던 스님은 이들의 증언 소식을 듣고 대구까지 먼 길을 달려갔다.

올해로 64세가 된 응우옌 떤 런 아저씨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일어나던 그때, 15살이었다. 그는 한국군이 마을 주민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후 이내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했다고 증언했다. 모여 있던 이들은 노인과 갓난 아기를 들쳐 업은 아주머니, 그리고 자신과 같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단 한명의 베트콩도 없었다. 또 그렇게 죽어간 이들 중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쏘는 한국군에 맞서 무기를 가진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한국군은 그저 평범한 마을 주민을 상대로 마구잡이 학살을 했고 당시 15살이었던 런 아저씨도 큰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 더 큰 고통은 따로 있었다. 학살 행위가 있던 그날 밤, 자신처럼 큰 부상을 입어 바로 옆에서 고통 속에 신음하던 엄마와 누이동생이 죽어가는 것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 가족이 거적에 싸여 실려 나가는 장면을 기억한다고 했다.

피해자 분들은 그날의 참상을 전하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눈물은 참석자 전부에게 옮겨갔다. 여기 저기서 흐느낌이 퍼졌다. 아무 죄도 없는 그들의 고통 앞에서 누군들 그러지 아니할까. 그때였다. 행사 진행자가 먼 길을 온 명진 스님을 급하게 찾았다. 침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스님의 위로 한 말씀을 청한 것이다.

그러자 그때까지 좌석 맨 뒤에서 조용히 계시던 명진 스님이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모두가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했다. 흰 승복을 입은 스님께서 갑자기 베트남 민간인 학살 생존자 분들 앞에 무릎 꿇고 합장하며 큰 절을 하는 것이었다. 순간, 모든 이들이 당황했고 두 분 피해자 분들이 앞으로 달려 나와 스님을 일으켜 세웠다. 스님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어요, 무릎 꿇는 것 밖에는"

베트남에 가는 동안 나는 스님에게 그날 큰 절을 한 이유를 물었다. 스님의 답변은 이러했다.

"제가 사실은 말을 아주 잘 합니다. 그런데 그날은 정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도 떨어지지 않더라고요.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냥 무릎 꿇고 사과한 겁니다. 그거 외엔 제가 그 분들에게 할 말이 없겠다 싶더라고요."

 지난 7월 26일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 만난 고엽제 피해자들. 명진스님이 피해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어 속죄의 마음을 전했다.
 지난 7월 26일 베트남 전쟁박물관에서 만난 고엽제 피해자들. 명진스님이 피해자들 앞에서 무릎을 꿇어 속죄의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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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명진 스님의 '속죄 사과'는 7박 8일간 이어진 베트남 평화기행 중에도 계속됐다. 제일 먼저 스님이 무릎 꿇고 속죄한 장소는 여행 둘째날 있었던 '고엽제 피해자들과 함께하는 춤추는 평화'에서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우거진 정글 때문에 어려움을 겪던 미군은 약 7600만 리터의 고엽제를 비행기로 살포했다.

이 고엽제는 이후 베트남 국민과 참전한 군인 모두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피해를 줬다. 특히 이른바 '느린 탄환'이라고도 불리는 고엽제 때문에 현재까지도 베트남에서 약 400만 명의 피해자가 고통을 받고 있다. 고엽제 피해는 직접 피폭된 사람의 고통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피폭 당사자의 아들과 손주 세대에 까지 대물림되고 있다. 명진 스님은 이 끔찍한 피해자 앞에서 또 무릎을 꿇었다.

여행 이틀째 되던 날 저녁, 지난 2005년부터 '춤추는 평화'라는 주제로 공연을 펼쳐온 가수 홍순관씨의 노래가 끝난 후 '기적'이 일어났다. 만나면 무조건 죽여야 할 대상이었던 이른바 '베트콩' 참전 군인 응우엔 즈엉 께(67)와 우리나라 맹호사단 소속 참전 군인이었던 명진 스님이 처음 손을 잡은 것이다.

이 자리에서 명진 스님은 먼저 베트콩 출신 참전 군인에게 나이를 물었다. 그는 자신을 48년생이라고 밝혔고 이에 명진스님은 "제가 50년생이니 앞으론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한바탕 웃음이 일었다. 그러더니 스님은 돌아서서 고엽제 피해로 장애를 가진 베트남 청년들과 마주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스님이 무릎을 꿇었다. "어"하며 모두가 당황하던 순간이었다. 스님은 이내 고엽제로 고통받는 베트남 청년들에게 큰 절을 했다. 그러면서 "정말 사죄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휠체어를 타고 앉아있던 고엽제 피해 청년들도 놀랐다. 한국인에게 처음 받아 보는 속죄의 절 앞에 모두가 그렇게 놀랐다.

베트남의 마음을 녹인 사죄, 이제 시작이다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것은 '진심'이었다. 그때까지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행사라고 여기며 옆에 서 있던 베트콩 출신 참전 군인 응우엔 즈엉 께의 눈빛이 달라졌다. 내내 웃던 미소를 걷어내고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무릎 꿇고 참회하는 명진 스님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먼저 마이크를 달라고 진행자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것은 역시 '진심'이었을까? 베트콩 참전 군인 응우엔 즈엉 께와 명진스님이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것은 역시 '진심'이었을까? 베트콩 참전 군인 응우엔 즈엉 께와 명진스님이 두 손을 마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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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총구를 겨눴던 한국 참전 군인이 베트남을 방문했다. 오늘 저는 (베트콩) 참전 군인으로서, 또 베트남의 한 시민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다. 악연으로 시작했지만 오늘 스님의 진심알고 감격으로 (스님을) 안았다. 진심으로 고맙다. 이제 새로운 미래로 한국과 베트남이 다시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베트콩 참전 군인 응우엔 즈엉 께의 말씀에 명진 스님의 답변이 이어졌다.

"한국에서 심한 욕이 '짐승만도 못한 놈'이다. 나는 비록 국가의 명령에 의해 베트남을 왔지만 베트남에서 벌어진 우리 군의 민간인 학살 행위가 참으로 부끄럽다. 베트남 분들은 우리를 용서하시겠다고 하고, 또 할 수 있을지 모르나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다. 그런데도 용서를 해 주신다니 더 부끄러울 뿐이다."

명진 스님의 말씀에 베트콩 참전 군인은 다시 스님을 안아줬다. 이내 모두가 박수치며 스님의 용기있는 사과를 응원했다. 베트남 측 참석자와 우리 측 평화기행 참석자 모두가 박수를 쳤다. 일부는 눈물을 보였고 베트남 측 참석 관계자 역시 간간이 눈물을 훔쳤다. 스님의 말씀은 이어졌다.

"사실 나는 한국을 대표하여 여기 온 것은 아니고 일개 승려의 자격으로 온 것이다. 그런 사람이 지금 베트남 참전 군인과 나란히 서 있는 것도 부끄럽다. 그런데도 내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겠다고 하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참으로 고맙다."

명진 스님의 말씀이 끝난 후 평화기행 참가자와 베트남 측 참석자 모두 손을 잡고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이어진 7박 8일간의 베트남 평화기행은 아프면서 또 한편으로는 과거의 아픔을 서로 치유하는 시간이었다.

 명진스님의 마음이 전해졌을까? 한국의 양심이 전해졌을까? 고엽제 피해 청년들과 명진스님이 환하게 웃으며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다.
 명진스님의 마음이 전해졌을까? 한국의 양심이 전해졌을까? 고엽제 피해 청년들과 명진스님이 환하게 웃으며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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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부르는 '평화'의 노래. 베트남 평화기행 참석자들과 고엽제 피해자들, 베트남 대학생들이 손에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함께' 부르는 '평화'의 노래. 베트남 평화기행 참석자들과 고엽제 피해자들, 베트남 대학생들이 손에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 김성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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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 50년, 종전 40년을 맞이하는 올해에도 마찬가지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그날의 비극은 여전히 우리나라 일부에선 '말하기 힘든 진실'이다. 하지만 베트남을 직접 방문해 그 진실의 현장을 마주하면서 떠오른 단어는 두 개였다. '진실'과 '사과'.

우리는 우리를 가해한 나라에게 진실을 요구하고, 그에 걸맞은 사과를 하라고 요구한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과거 우리가 행한 잘못에 대해 용기있게 인정하고 또 진심으로 사과해야 옳다. 민간인 학살 현장에서 생존한 피해자가 지난 4월 찾아와 증언하면서 남긴 울부짖음에 내 가슴은 내내 아팠다.

"나는 한국에 오면 한국 참전 군인들이 내 손을 잡고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어요."

런 아저씨와 함께 방한했던 탄(57세) 아주머니가 증언하며 남긴 절규였다. 아주머니가 가는 곳마다 찾아와 군복을 입은 채 시위하는 한국 참전 군인들의 모습에서 그때의 참상이 떠올랐다고 한다. 

 지난 7월 30일 퐁니, 퐁녓 학살 생존자 탄 아주머니와의 재회. 당시 8살이었던 그는 학살로 어머니, 언니, 남동생을 포함한 다섯 명의 가족을 잃었다. 당시의 기억을 전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지난 7월 30일 퐁니, 퐁녓 학살 생존자 탄 아주머니와의 재회. 당시 8살이었던 그는 학살로 어머니, 언니, 남동생을 포함한 다섯 명의 가족을 잃었다. 당시의 기억을 전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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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명진 스님의 사죄는 참으로 깊은 의미가 있었다. 그는 '평화 사절단'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덕은 명진 스님이 얻은 것이 아니라, 이 나라 대한민국이 얻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베트남 국민에게 '그래도 일부지만' 대한민국의 양심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진심을 다한 명진 스님의 사과가 그들의 가슴에 닿아 베트남과 대한민국이 진정한 평화로 춤출 다음 세상을 그린다. 미안해요. 베트남.

 고엽제 피해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미군의 무차별적인 고엽제 살포로 많은 기형아가 태어나고 태아들이 엄마의 뱃속에서 그대로 사산했다. 사진은 전쟁박물관에서 촬영.
 고엽제 피해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미군의 무차별적인 고엽제 살포로 많은 기형아가 태어나고 태아들이 엄마의 뱃속에서 그대로 사산했다. 사진은 전쟁박물관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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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전 당시 미군이 뿌린 고엽제로 베트남 자연 생태계가 초토화 되었다. 사진은 전쟁박물관에서 촬영.
 베트남 전 당시 미군이 뿌린 고엽제로 베트남 자연 생태계가 초토화 되었다. 사진은 전쟁박물관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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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장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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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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