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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직 투쟁위원장이 혈서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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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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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직 위원장이 쓴 혈서는 피켓이 됐다.
 성희직 위원장이 쓴 혈서는 피켓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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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특보가 발효됐다. 사람과 짐승이 퍽퍽 쓰러진다. 노인뿐 아니라 청년도 폭염에 사망했다. 찜통더위에 쫓기는 시민들은 에어컨 속으로 대피하고 건물과 아파트 밖에 매달린 실외기는 열기를 토하며 헉헉 댄다. 폭염과의 싸움에서 도저히 승산이 없자 가게 문과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근 차량들이 산과 바다로 향한다. 이건 휴가가 아니라 대피 혹은 피난이다.

맨몸으로 걷기도 힘든 이 염천((炎天)에 60∼70㎏ 무게의 갱목을 지고 아스팔트를 긴다? 안전모와 안전화 등 광부 작업복으로 무장한 채 아스팔트를 빡빡 기는 갱목시위를 선택한 것은 목숨보다 더 절박한 생존 때문이다. '갱목'은 막장 갱도가 무너지지 않도록 버팀목으로 받치는 나무다.

외지인들이 강원도 태백을 찾는 주 이유는 카지노 때문이다. 정부와 국민들은 광부와 탄광지역에 관심이 없고, 태백은 더 이상 탄광지역도 아니다. 폐광지역, 해발 800m의 막장, 태백은 세상의 끝이 되어 버렸다.

성희직 선상카지노백지화투쟁위원장은 폐광지역과 진폐증 환자들의 요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갱목시위를 조직하고, 화형식을 하고, 자신의 손가락에 피를 내서 혈서를 썼다. 그는 극단적인 상황이 극단적인 시위의 배경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쓴 혈서는 피켓이 되었고, 그 붉은 피켓에는 이런 주장이 적혀 있었다.

- 우리는 산업전사다. 진폐재해자 홀대 말라.
- 해수부는 선상카지노 즉각 백지화하라.
- 진폐 제도 개선 갱목시위로 촉구한다.
- 근로복지공단은 억울한 사람 즉각 구제하라.

'염천'에 60~70kg 갱목 진 늙은 광부들

진폐재해자들은 이번 집회를 통해 폐렴을 합병증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진폐재해자들은 이번 집회를 통해 폐렴을 합병증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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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진폐재해자협회'(회장 주응환)와 '광산진폐권익연대'(회장 최순길)로 구성된 '선상카지노백지화투쟁위원회'(위원장 성희직)는 지난 4일부터 6일까지 12km 갱목시위 거리 행진을 전개했다.

이들의 요구는 ▲ 해수부 유기준 장관은 '선상내국인카지노계획 백지화'를 공식 발표하라 ▲ 진폐환자들의 치명적 질환인 '폐렴을 진폐합병증'으로 인정하라 ▲ 여야는 정기국회 때 '진폐제도개선'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이다.

태백시와 정선군은 대표적 폐광지역으로 석탄산업 전성기에는 인구가 12~13만 명이었는데 지금은 4만 명 유지도 어렵다. 폐광 지역민의 생존을 위해 강원랜드를 태백에 유치했고 이로 인해 고용창출과 지역경제가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유기준 장관이 2025년까지 강원랜드에만 내국인 출입을 허용한 특별법을 무시하고, 선상카지노 유치 수순을 밟고 있다.

강원랜드는 폐광지역 사회공헌사업으로 연간 200억 원을 지원하고 있다. 그 중에 진폐복지사업에 30억을 지원하고 있다. 태백시와 정선군 등 폐광지역 재정자립도는 20%로 매우 낮기 때문에 소외계층을 지원할 수 없는 형편인데 강원랜드가 그 부분을 해소하고 있다.

선상카지노 내국인 출입이 허용되면 강원랜드는 어려워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면 진폐환자를 비롯해 지역민들은 직격탄을 맞게 될 것이다. 그래서 퇴역 광부들과 진폐환자들이 선상카지노 백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선상카지노백지화투쟁위원회'(아래 투쟁위)는 4일 강원도 태백시 장성동 대한석탄공사 노동조합 사무실 앞에서 출정식을 마친 뒤 갱목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갱목시위 마지막 날인 6일 오후 1시부터 태백 황지연못에서 700여 명의 늙은 광부들과 진폐증 환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집회를 열었다. 집회 제목을 '우리는 저승사자와 싸운 불굴의 산업전사였다'라고 명명했다.

이날 집회에선 막장 상황이 재현됐다. 1993년 8월 태백시 연화동 통보광업소 2080m 지하 막장에서 발생한 붕락사고로 매몰된 6명의 광부 가운데 사고 발생 91시간 만에 생환한 여종업(당시, 32세)씨의 사고가 재현됐다.

김상수 투쟁위 조직위원장은 "1960~1980년대 중반까진 매년 230~270명의 광부가 갱내 사고로 숨졌다"면서 "지하 막장은 삶과 죽음의 전쟁터였고, 열악한 작업환경에 의한 지옥이었다"고 증언했다.

이어서 광부 출신의 시인 성희직(58) 투쟁위원장은 혈서를 쓴 뒤에 '다시, 광부가 되고 싶다'는 자작시를 낭송했다. 진폐재해자이자 투쟁위 대외협력위원장 구세진씨는 박근혜 대통령께 전하는 호소문을 통해 "광부들이 목숨 바쳐 석탄을 캐낸 덕분에 대한민국은 경제대국이 되었다"면서 "(그런데 광부들은) 불치병인 진폐환자가 돼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며 '폐렴 합병증 인정' 등의 진폐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폐광지역 생존권과 진폐환자 위해 목숨 걸고 갱목시위"

성희직 투쟁위원장(맨 우측) 등이 갱목시위를 하고 있다. 60~70kg 무게의 갱목을 지고 염천에 아스팔트를 기는 극한 투쟁을 선택한 것은 극한 상황에 몰렸기 때문이라고 성희직 위원장은 강조했다.
 성희직 투쟁위원장(맨 우측) 등이 갱목시위를 하고 있다. 60~70kg 무게의 갱목을 지고 염천에 아스팔트를 기는 극한 투쟁을 선택한 것은 극한 상황에 몰렸기 때문이라고 성희직 위원장은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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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직 위원장이 갱목을 지고, 모형 갱내를 통과하고 있다.
 성희직 위원장이 갱목을 지고, 모형 갱내를 통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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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회 3선 도의원을 지낸 성희직 투쟁위원장은 갱목시위와 집회를 주도했다. 성 위원장은 "60~70kg의 갱목을 지고 체감온도 50도가 넘는 아스팔트를 긴다는 것은 사생결단을 각오하지 않으면 시도할 수 없는 목숨을 건 시위"라면서 "폐광지역 주민의 생존권과 진폐증 광부들의 막장에 몰린 삶을 국민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거리에 나선 것"이라고 갱목시위의 절박함을 강조했다.

1986년부터 6년간 삼척탄좌 광부로 일한 성 위원장은 1993년 강원도의원 당시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으로 무더기 폐광이 이어지자 명동성당에서 동대문까지 갱목시위를 했다. 2007년엔 진폐환자의 생존권을 호소하기 위해 광화문과 태백에서 6차례에 걸쳐 갱목시위를 펼친 바 있다. 이 염천에 갱목시위를 하게 된 사정을 성희직 위원장에 들어보았다.

- 지하막장 갱도붕락사고를 재현한 황지연못집회는 절박함을 넘어 처절하다.
"무너진 갱도에 한쪽 다리가 짓눌려 빠져나올 수 없게 되자 동료에게 작업용 도끼를 주며 '내 다리를 잘라 달라!'고 한 것은 퍼포먼스가 아닌 실제 상황이었다. 막장은 생존과 죽음을 넘나드는 사선의 현장이었다. 지열이 50도인 막장 지옥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한 달 넘게 준비했지만 백분의 일도 못 보여줬다."

- 환갑을 앞두고 있다. 갱목시위에 대한 위험부담은 없었나.
"갱목시위를 처음 시작한 게 해고 광부였던 30대 초반 시절이었다. 강원도의원 시절인 1993년엔 탄광촌의 어려움을 알리기 위해 서울 명동에서 갱목시위를 했었다. 언론에선 갱목시위를 '퍼포먼스'라고 보도하지만 광부 출신이자 시인인 저는 '온몸으로 쓰는 시'라고 말하고 싶다.

탄광에서도 가장 힘든 일이 막장으로 갱목을 지는 일이다. 도급제이다 보니 무거운 갱목을 지고 비좁고 낮은 막장으로 기어오르면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 뒤따랐다(갱목시위에 앞장선 성 위원장은 온몸에 피멍이 들었다고 했다). 그 시절 지하 막장은 너무나 열악하고 위험해서 '지금 내가 지옥도를 보고 있나' 그런 생각에 빠져들곤 했다. 이처럼 열악하고 위험한 탄광막장에서 피땀으로 석탄을 캐다가 진폐증에 걸린 것이다.

그런데 정부당국과 국회는 너무도 무관심하다. 그래서 국민들에게 호소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게 바로 갱목시위고, 화형식이고, 혈서였다."

성희직 위원장은 폐광지역의 생존권과 진폐재해자의 권익을 위해선 자신이 제물이 되어도 좋다고 강조했다.
 성희직 위원장은 폐광지역의 생존권과 진폐재해자의 권익을 위해선 자신이 제물이 되어도 좋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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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들은 폐광지역과 진폐증 환자들보다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는 시에 더 관심이 많다.
"1960, 1970년대 석탄산업 전성기엔 전국 340여 개 탄광에서 6만 명이 넘는 광부들이 일했는데, 갱도 안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이 매년 230~270명이나 됐다. 광부 10명 중에 한 명은 죽거나 다칠 정도로 중경상 사고가 빈번했다. 다행히 사고 없이 퇴직한 사람들 중에는 불치병인 진폐증에 걸려 노년을 힘겹게 사는 사람들이 상당하다. 이는 광부들의 잘못이 절대 아니다. '안전'은 도외시한 채 '생산'을 강조한 탄광 업주와 정부가 만든 직업병이 진폐증이다.

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진폐재해자의 고통을 생각하며 최근에 쓴 '다시, 광부가 되고 싶다'는 제목의 시, 한 부분을 들려주고 싶다. '그 시절, 작업복을 입고 막장에 들어가면/ 건강한 몸뚱이에선 불끈 불끈 힘이 솟구쳐/ 거침없이 곡괭일 휘둘렀다 모두가 정말 열심히 일했다/ (중략) 천형(天刑)을 받은 건가/ 저승사자도 두렵지 않던 뜨거운 가슴 강철 체력은/ 계단 몇 개 오르는데도 숨 가쁘고 걷는 것도 노동이다/ 진폐증은 불치(不治)병이라 어차피 죽을 목숨이지만/ 병마와 가난에 시달리는 노년의 삶이 서럽고 힘겹구나.(하략)'"

- 진폐재해자의 요구가 청와대와 정부에 잘 전달되지 않는 것은 정치적 영향력이 작기 때문이 아닐까.
"진폐재해자가 100만 명쯤 됐다면 정치권은 표 때문이라도 '진폐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늉이라도 했을 것이다. 3만 표는 별것 아니란 생각에서인지 우리를 연탄재 취급하고 있다. 선거 때면 정당과 정치인들이 이런저런 '진폐공약'을 내놓긴 했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나서는 모습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정부도 정치권도 믿을 수가 없어서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려고 불볕더위에 사생결단 갱목시위에 나선 것이다."

- 유기준 장관의 '선상내국인카지노'는 무엇이 문제인가.
"유기준 장관은 폐광지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상카지노에 내국인 출입을 허용해야 한다'는 뜻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여러 차례 밝혔다. 폐광지역 주민들은 1995년에 석탄산업합리화정책으로 인한 지역공동화에 위기감을 느끼고 생존권 투쟁을 치열하게 벌인 바 있다. 그 결과 '폐광지역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폐광지역 유일 대체산업으로 내국인카지노를 할 수 있는 '강원랜드'가 세워졌다.

카지노는 가산 탕진과 자살 등의 사회적 부작용이 따르는 만큼 이를 허용하면 심각한 부작용은 더 크게 발생할 것이다. 유 장관이 '폐광지역 한 곳에만 내국인출입카지노를 허용 한다'고 명시한 법률(특별법)을 무시하고 선상카지노를 밀어 붙인다면 그건 실세 장관의 힘을 과신한 오판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유 장관에게 대한민국을 도박공화국으로 만들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유기준 해수부 장관의 '선상내국인카지노계획' 백지화를 촉구하며 해수부 플래카드를 화형식하고 있다.
 유기준 해수부 장관의 '선상내국인카지노계획' 백지화를 촉구하며 해수부 플래카드를 화형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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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렴을 진폐 합병증'으로 왜 인정해야 하는가.
"3만여 진폐재해자 중에 합병증이 있는 3천여 명은 진폐전문병원에서 요양치료를 받고 있고, 장해등급을 받은 9300여 명은 월 81만 원의 '진폐기초연금'을 받고 있다. 하지만 50% 가량의 1만5천여 명은 '진폐장해등급'을 받지 못해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며 힘든 노년을 보내고 있는 실정이다.

환자에게 합병증이 발생한다는 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큰일이고,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 폐광 지역에선 합병증에 걸리면 '축하한다!'고 말한다. 그건 폐결핵과 폐기종 등 아홉 가지 중 하나를 합병증으로 앓아야 입원요양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석탄분진이 폐 속에 쌓여 폐가 점점 딱딱하게 굳어가는 진폐환자들에게 폐렴은 목숨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질병이다. 폐렴을 '진폐합병증'으로 인정해야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요구하는 것이다."

- 향후 계획은.
"8년째 진폐상담소장을 하고 있는데 이런저런 하소연을 듣다보면 너무 속상하고 안타깝다. 고민의 상당 부분은 정부와 국회가 '제도개선'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근로복지공단이 의지를 가진다면 해결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번 갱목시위가 사회적 이슈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오는 정기국회에서 '진폐제도개선'이 다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진폐제도개선'은 정부와 정치권이 책임지고 해결해야할 '밀린 숙제'라고 할 수 있다. 해결책을 찾는 데 필요하다면 내 몸을 제물로 바쳐도 좋다. 산업화 시절 광부들의 피땀 흘린 노동의 역사는 반드시 재조명, 재평가 되어야 한다. 갱목시위는 끝났지만 고령의 진폐환자들이 외친 '우리는 산업폐기물이 아니다!', '우리는 연탄재가 아니다, 발로 차지 마라'는 외침은 기억해 달라."

목칼을 쓴 고령의 광부 출신 진폐재해자.
 목칼을 쓴 고령의 광부 출신 진폐재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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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성희직 위원장, #진폐재해자, #선상카지노백지화, #진폐증, #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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