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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체중>을 소재로 한 주혜린씨의 작품.
 <과체중>을 소재로 한 주혜린씨의 작품.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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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체중'. 고작 세 글자 단어인데, 보기만 해도 무게감이 느껴진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무겁다. 밥을 굶어야 할 거 같고, 러닝머신 위를 달려야 할 거 같다. 과체중은 '벗어나야만 하는' 상태다. 그도 그럴 것이, 과체중이라는 단어 뒤엔 늘 부정적인 표현이 따라온다. '돼지 같다', '게으르다', '뚱뚱하다' 등과 같은 표현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과체중'을 전면에 내세워, '본연의 아름다움과 섹시함'을 표현하겠다는 사람이 있다. 일러스트레이터 주혜린(24)씨다. <과체중>은 혜린씨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 이름이다. <과체중>은 '미용 체중'을 벗어난 여성의 몸을 그려, 일러스트레이션 북으로 엮어내는 프로젝트다.

현재 일러스트레이션 북 제작비를 모으기 위한 크라우드 펀딩이 진행 중이며, 9월쯤 독립출판물 형태로 일러스트레이션 북을 출판할 예정이다. 5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의 한 카페에서 주혜린씨를 만났다. 혜린씨에게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묻자, 대뜸 작년 여름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혜린씨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속옷 위에 슬립을 걸친 채 허리를 한 손으로 짚고 있는 여성을 그린 그림을 골랐다. 제목은 '벼르고 벼른 오늘 밤'이다.
 혜린씨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속옷 위에 슬립을 걸친 채 허리를 한 손으로 짚고 있는 여성을 그린 그림을 골랐다. 제목은 '벼르고 벼른 오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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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르고 벼른 오늘밤'
 '벼르고 벼른 오늘밤'
ⓒ 주혜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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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로 시작된 <과체중> 프로젝트

"친척들이랑 같이 식사를 한 날이었어요. 저는 육류를 좋아해서 밥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한 친척분이 '너는 여자애가 너무 와구와구 먹는다, 식욕억제제 좀 먹어라'고 하시더라고. 농담으로 하신 말씀이지만,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혜린씨는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일기장을 펼쳤다. 통통한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속상한 마음을 표현한 낙서를 끼적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주변 사람으로부터 몸에 대한 평가를 받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살 좀 빼면 더 나을 텐데', '넌 조금만 더 빼면 예뻐'. 혜린씨는 칭찬 같지만 칭찬이 아닌 말을 종종 들었다.

혜린씨는 '왜 지금 그대로의 모습은 아무도 칭찬해주지 않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들었다. 친구나 주변사람을 봐도, 본인의 몸에 만족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타인의 시선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대학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는 혜린씨는 '통통한 몸매의 여성'을 좀 더 적극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미용 체중'을 벗어난 몸에도 아름다움이 있고, 숨길 수 없는 섹시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조금씩 그림을 그려 친구들한테 보여줬어요. '내가 얘보단 나은데?'라고 말하거나, '여기 살 접힌 거 봐, 나랑 똑같아'라고 말하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제 그림을 보고 위안을 받고, 공감하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제 그림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면,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혜린씨는 '독립출판'에 관심이 있었다. 독립출판은 작가가 직접 책의 집필이나 판매 등의 과정을 전담하는 출판 형태다. 출판 과정에서 작가의 의도가 많이 반영되기 때문에, 기존의 출판물이 전하지 못하는 색다른 주제를 다룰 수 있다.

혜린씨는 통통한 몸매의 여성만을 그린 그림을 묶어 독립출판물로 내놓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비슷한 맥락에서 플러스 사이즈 모델의 패션 화보를 담은 독립출판 잡지 <66100>가 존재하긴 했지만, 그림을 담은 출판물은 없었다. 일러스트레이션 북을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있는 그대로의 여성의 몸매'를 담은 그림을 보여주고 싶었다. 혜린씨는 지난해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과체중>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최근에 그린 그림들은 몸매는 좀 더 과감하게 표현됐고, 여성들의 포즈도 다양해졌다.
 최근에 그린 그림들은 몸매는 좀 더 과감하게 표현됐고, 여성들의 포즈도 다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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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ly Girl 2'
 'Lovely Girl 2'
ⓒ 주혜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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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성'의 몸, 그리다보니 재밌네

"흔히 '완성'이라고 부르는 것, 즉 '아름다움'의 축에 끼는 것은 완벽한 몸, 완벽한 성격 같은 것들이잖아요. 제가 그림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에서 '미완성'이라고 표현되는 여성들이에요."

완벽하지 않은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고 싶었던 혜린씨는 '현실적인' 여성들의 모습에 집중했다. 그림의 모델이나 소재를 일상에서 찾았다. 목욕탕에 갈 땐 아주머니들의 몸을 관찰했고, 필요할 땐 자신의 몸을 이곳저곳 거울로 살폈다.

"예전엔 거울 보는 것을 무척 싫어했는데, 요즘엔 거울 두 개를 맞대서 제 뒷모습을 보기도 해요. 몸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겼어요."

혜린씨는 작업을 하면서 그동안 잘 몰랐던 본인의 몸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재밌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몸을 관찰하다가, 있는지도 몰랐던 점이나 흉터 같은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자신의 몸매와 닮은 여성의 모습을 그릴 때면 희열을 느낀다. 그림을 그리면서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주 발견한다. 그만큼 즐겁게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변화가 생겼다.

"저는 '너는 몸통에만 살찐 것 같다'는 말을 꾸준히 들어요. 요즘엔 이 말을 들으면 그냥 웃어넘겨요. '가슴도 더 커지고 좋지 뭐, 너보다 가슴 커'라고 답하면서요. 그런 말들을 농담으로 받아칠 수 있게 된 거죠."

물론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이 정도 몸이면 괜찮지' 싶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아, 정말 살 좀 빼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지금은 <과체중>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이전과 분명 다르다.  

"사실 요즘 살이 찌고 다리가 더 두꺼워졌거든요. 그런데 예전보다 더 짧은 바지를 입고 다녀요. 지난해는 와이셔츠 단추를 목까지 다 잠그고 다녔는데, 지금은 와이셔츠 단추를 두 개씩 풀고 다닙니다. 더 나은 발전이죠."

변화는 그림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과체중>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린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포즈는 소극적이다. 몸에 대한 묘사도 과감하지 않다. 혜린씨는 "처음엔 주눅이 들어있는 그림이 많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에 그린 그림들은 다르다. 몸매는 좀 더 과감하게 표현됐고, 여성들의 포즈도 다양해졌다. 혜린씨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속옷 위에 슬립을 걸친 채 허리를 한 손으로 짚고 있는 여성을 그린 그림을 골랐다. 제목은 '벼르고 벼른 오늘 밤'이다.

"저는 상체 쪽에 살이 많은 편이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이 그림은 배를 그리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다른 그림들은 배가 귀엽게 나온 수준인데, 이건 정말 배가 많이 나왔고 포즈도 당당하거든요."

'Love yourself first'
 'Love yourself first'
ⓒ 주혜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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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뚱해도 핏은 살아2'
 '뚱뚱해도 핏은 살아2'
ⓒ 주혜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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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을 인정하면, 한결 가벼워져요"

혜린씨는 <과체중> 프로젝트로 외모지상주의가 타파되는 것까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당시에는 다른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겠다는 욕심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했다.

"지금은 그 생각이 바뀌었어요. 남을 바꾸기보다, 내가 나를 인정하는 방향으로요. 그렇게 생각을 바꾸면, 굳이 남한테 나의 생각을 강요할 필요가 없거든요."

혜린씨는 일러스트레이션 북 제일 마지막 장에 '나는 뚱뚱하다. 그렇지만 이 정도면 괜찮아'라는 문구를 점선으로 따라 쓸 수 있는 페이지를 넣을 생각이라고 했다.

"자신의 몸을 인정하면서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인정하기까지가 굉장히 어려운데, 막상 인정하고 나면 생각보다 별거 아니란 걸 알게 되거든요."

○ 편집ㅣ박혜경 기자

덧붙이는 글 | 김예지 기자는 <오마이뉴스> 22기 대학생 인턴기자입니다.



태그:#과체중, #주혜린, #과체중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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