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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26일) 충청남도 금산에 있는 청풍서원을 다녀왔다. 청풍서원은 1678년(숙종 4년) 창건되었다. 이번 기행은 구미도서관에서 운영한 <길 위의 인문학> 행사에 참여하면서 이뤄졌다. 구미 역사에 관한 전문가인 이택용 향토사학자가 이번 기행의 인솔자였다.

충청남도 금산에 위치한 청풍서원
 충청남도 금산에 위치한 청풍서원
ⓒ 여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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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용 향토사학자는 기행 전날에는 <야은 길재의 삶과 문학>에 관한 강연을 하였다. 야은 길재(1353-1419)는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기에 목은 이색, 포은 정도전과 더불어 고려의 충신으로 평가된다. 길재는 고려의 충신일뿐 아니라, 조선시대 학자들에게는 문학과 관련해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1419년 길재가 죽자 세종은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후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왕에게 건의하여 길재의 시호가 <문절>으로 변경되었다. 길재는 구미에서 은둔하면서, 조선시대의 통치철학이자 시대정신인 성리학을 영남 유림들에게 가르쳤다.

유학의 발전사에서 보면 성리학은 사회 윤리인 예(禮)를 강조한다. 성리학은 인간의 심성을 우주의 보편적인 원리에서 해석한다. 이를 통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밝히는 사상이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주자학·정주학·이학·도학·신유학이라고도 부른다. 성리학은 송나라 시대 주희가 집대성했다. 이처럼 이택용 향토사학자는 강연에서 길재의 학맥과 관련된 큰 흐름을 설명했다.

조선시대 영남에서 성리학의 학맥은 야은 길재에서 강호 김숙자(1389~1456)로, 김숙자에서 점필재 김종직(1431~1492)으로, 김종직에서 한훤당 김굉필(1454~1504), 김굉필에서 정암 조광조(1482~1520)로, 조광조에서 회재 이언적(1491~1553)으로, 이언적에서 퇴계 이황(1502~1571)으로 이어진다고, 이택용 향토사학자는 설명해주었다.

구미 출신인 길재에 대한 역사기행을 충남 금산으로 정한 이유가 무엇일까? 기행을 신청하기 전에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그 이유는 길재의 부친인 길원진이 고려시대인 1383년 금주지사로 부임했기 때문이다. 길재는 부친이 현재의 금산군수격인 아버지를 따라 금산으로 갔다. 금산에서 거주하던 길재는 금산 출신의 아내를 맞이했다. 길재는 금산에서 부친상을 당하고는 금산에 부친의 묘자리를 만들고,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길재는 대략 4년여 동안 금산에서 머물렀다.

청풍서원에 있는 <백세청풍> 비석
 청풍서원에 있는 <백세청풍>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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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서원에는 길재를 기리는 사당인 청풍사가 있다. 청풍서원 앞에는 <백세청풍> 비석이 있다. 이 백세청풍비는 1761년(영조 37년) 당시 금산군수가 군내의 유림과 후손들과 함께 힘을 모아서 세웠다. 백세청풍은 원래 중국의 백이와 숙제를 기리는 사당 앞에 세워진 비석에 쓰여진 글이다. 이 글은 <맹자>에 나오는 글이다. 맹자가 백이를 칭송하면서 쓴 표현으로 백대에 부는 맑은 바람이라는 뜻이다. 선비의 절개를 의미한다.

이 글씨를 쓴 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이다. 주희는 주자로 불린다. 주자가 쓴 이 비석 글씨를 탁본해서 조선시대에 우리나라로 가져왔다. 지금 있는 백세청풍비는 해주에 있는 비에서 탁본을 해서 다시 비석을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백세청풍의 글씨 중에 <풍>자가 달리 보인다. 그 이유는 <풍>자를 쓴 사람은 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탁본한 글씨를 가지고 배를 타고 우리나라에 오던 중 풍랑을 만났다고 한다. 당시 뱃사람들이 글씨에 <풍>이 있다고 해서 그 글씨를 잘라서 바다에 버리니, 풍랑이 멎었다고 한다. 이를 전해들은 안평대군이 <풍>자를 다시 써주었다고 한다.

청풍서원에 왼쪽 편에 있는 지주중류비
 청풍서원에 왼쪽 편에 있는 지주중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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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서원 왼편에 있는 <지주중류>비석은 구미시 오태동에 있는 <지주중류>를 탁본해서 다시 비석으로 세운 것이다. 구미에 있는 지중중류비는 조선시대에 겸암 류운룡(1539~1601)이 인동현감 재직 시절 중국에 있는 비석에서 탁본해서 가져왔다. 지주중류의 뜻은 중국 황하강의 격류 속에 지주라는 큰 바위가 솟아 있는데, 그 바위가 백이와 숙제처럼 절의가 굳다는 의미에서 나왔다.

백이와 숙제의 무덤 앞에 중국의 학자 양청천이 이 네 글자를 비석에 세웠다. 이 비는 백세청풍비처럼 여느 비석의 머리 부분인 갓석이 없다. 그 까닭은 천연의 바위인 지주를 그대로 상징하는 의미에서 갓석을 씌우지 않았다고 한다. 

야은 길재 선생의 영정사진
 야은 길재 선생의 영정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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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풍사에는 길재 영정이 있다. 이 영정은 운보 김기창 화백이 예전 영정을 모사해서 그렸다고 한다. 금산 현지에서는 길재의 16대 후손인 길태기 문화해설사를 만났다. 길태기 문화해설가는 금산과 관련된 역사와 문화를 우리들에게 설명해주었다. 특히 길재의 부인 나주 신씨의 묘지 위치와 해평 길씨 후손들이 금산에 자리 잡은 사연을 소개해 준 점이 흥미로웠다.

금산은 인삼 재배지로 유명하다. 서울의 강동시장, 대구의 약령시장과 더불어서 우리나라 3대 약초시장이 열리는 곳이다. 금산에서는 인삼을 파는 상점이나 홍삼, 인삼주, 인삼튀김, 인삼막걸리처럼 인삼을 상품화한 제품을 파는 곳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이번 기행에서 제공된 점심식사로도 인삼불고기가 나왔다. 쌉쌀한 인삼향이 배긴 불고기가 맛이 좋았다.

칠백의총
 칠백의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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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금산에는 고경명(1533~1592)과 같은 의병장이 많이 배출되었다. 왜군이 호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막고자 많은 의병들이 금산을 지켰다. 1592년 의병장 조헌, 영규 대사가 이끌던 700여명의 의병들이 왜군과 싸우다 전원이 전사했다. 금산에는 이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합장묘인 칠백의총(사적 제105호)이 정성스럽게 단장되어있다.

금산에서 자란 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청풍서원에 새겨진 백세청풍의 글귀를 자주 접했을 것이고, 칠백의총에서도 자주 뛰어 놀았을 테다. 이름 없는 의병에게서 오랜 세월 맑은 바람을 지닌 <백세청풍>의 기상을 느끼지 않았을까? 무더운 여름날, 금산에서 맑은 바람을 넉넉히 쐬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경수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hunlaw.tistory.com/)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청풍서원, #칠백의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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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힘이 되는 생활 헌법(좋은땅 출판사) 저자, 헌법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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