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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4일 고양시 향동동에 있었다는 내시(內侍) 출신으로 선조(宣祖) 임금을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된 울릉군(蔚陵君) 임우(林祐)의 부조묘(不祧廟)인 사당을 찾아 나섰다. 작년 3월 1일 지인의 제보로 양주시 삼상리에 있는 선생의 묘를 탐방하였으나 사당이 남아있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는지라 설레는 마음으로 이정남 기자와 함께 취재에 나섰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재개발 지역으로 수용되어 집들은 모두 철거되고 보호수 느티나무 고목 한 그루만이 마을 입구에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 마을의 흔적은 간 곳 없고, 황량한 벌판으로 변해 있었다. 

수용되지 않은 팬스 밖에만 겨우 2집이 남아 있는 형편이었다. 마침 밭에서 혼자 일하시던 원욱규(77세)씨를 통해 울릉군의 사당을 관리했다는 임석부(78세)씨의 소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

향동 택지개발 지구에서 본 마을 입구 보호수로 나무 오른 편쪽으로 울릉군 임우의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 향동 택지개발지구에서 본 마을 입구 보호수 향동 택지개발 지구에서 본 마을 입구 보호수로 나무 오른 편쪽으로 울릉군 임우의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 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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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동지구 재개발로 철거된 호성공신 울릉군 임우의 사당 전경이다.
우리 나라 유일의 원형을 보존한 내시 공신 사당이었으나 지켜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 울릉군 임우 사당 전경 향동지구 재개발로 철거된 호성공신 울릉군 임우의 사당 전경이다. 우리 나라 유일의 원형을 보존한 내시 공신 사당이었으나 지켜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 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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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고양시 행신동에 살고 있는 그의 집에서 취재를 시작했다. 그는 울진임씨(蔚珍林氏) 울릉군 임우의 15대 손으로 몇 년 전 향동동이 재개발지역으로 수용되자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입석부씨가 제공한 울진임씨 울릉군파 가승보(家乘譜)에 의하면 울릉군 임우는 명종 17년(1562) 순충보조공신(純忠補助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추증된 울성군(蔚城君) 임철(林鐵)의 아들로 태어났다.

1985년에 간행된 울진임씨 울릉군파 가승보로 울릉군 임우와 가족관계, 그의 활약상이 자세히 실려 있다.
▲ 울진임씨 울릉군파 가승보 1985년에 간행된 울진임씨 울릉군파 가승보로 울릉군 임우와 가족관계, 그의 활약상이 자세히 실려 있다.
ⓒ 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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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 관직에 있던 그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생 임호(林祜)에게서 양자로 들인 두 아들인 예손(禮孫)과 예만(禮萬), 예손의 아들인 응순(應順)과 응성(應城) 등 일가족 조자손(祖子孫) 5명이 의주로 파천(播遷 : 피난)하는 선조 임금의 어가(御駕)를 호종하게 된다. 이 공으로 임우는 호성공신 3등에, 두 아들인 응순과 응성은 각각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에 책록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후 경상도 진주 병영(兵營)에 머물면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과 일하다가 진주대첩 전투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함께 싸운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촉석루(矗石樓)에서 곽장군과 함께 읊은 시가 4수라 하는데 지금은 전해오지 않고 있어 아쉬움을 준다.       

호성공신 울릉군 임우의 부부묘인데, 부인 묘는 가묘(假墓)라고 한다. 양주시 삼상리 바람산에 있다. 묘표에 그가 자원해 출정한 기사가 보인다.
▲ 호성공신 울릉군 임우의 부부묘 호성공신 울릉군 임우의 부부묘인데, 부인 묘는 가묘(假墓)라고 한다. 양주시 삼상리 바람산에 있다. 묘표에 그가 자원해 출정한 기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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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군 임우 묘에 있는 2기의 문인석 중 한 기의 모습이다.
▲ 울릉군 임우 묘역 문인석 전경 울릉군 임우 묘에 있는 2기의 문인석 중 한 기의 모습이다.
ⓒ 박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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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군의 생애를 알기 위해 이곳에 비문을 번역하여 소개한다.

崇祿大夫蔚陵君林公之墓

公諱祐。字德應。嘉靖四十一年壬戌九月望日生。崇禎四年辛未十月二十六日卒。春秋七十。公自少性心恭直。勇力出衆。水陸弓馬之士。雖古之名將無以薦遇。比二萬生于宣祖。朝世三頂玉。壬辰倭亂扈從。自慮至凜備嘗險懇痛朝廷。國人痛島夷之變信。自願出戰。杖劍下南。斬獲不知其幾千。邊爲皇威。重復宗社名署。勳府形摸凌雲。爵陞一階。追封父母。其妻子姨娚以加官階。世襲其職。宥及永世。仍賜田藏。夫公事三朝。服勞忠孝。益若寵遇無比焉。
公本江原道蔚珍
楊州西山梨谷亥坐巳向艮峽山
崇禎五年 二月 日 立  

교의(交椅) 위의 울릉군(蔚陵君) 임우(林祐)와 부인인 정경부인(貞敬夫人) 회덕송씨(懷德宋氏)의 위패 모습이다. 교의 우측 모서리의 통은 영정을 보관하던 함이다.
▲ 울릉군 임우와 부인 송씨의 위패를 모신 교의 교의(交椅) 위의 울릉군(蔚陵君) 임우(林祐)와 부인인 정경부인(貞敬夫人) 회덕송씨(懷德宋氏)의 위패 모습이다. 교의 우측 모서리의 통은 영정을 보관하던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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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숭록대부 울릉군 임공지묘(崇祿大夫蔚陵君林公之墓)

공(公)의 휘(諱)는 우(祐)요, 자(字)는 덕응(德應)이니, 가정(嘉靖) 41년 임술년(1562년, 명종 17년) 9월 15일에 태어나 숭정(崇禎) 4년 신미년(1631년, 인조 9년) 10월 26일에 돌아가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공평하고 정직하였다. 용력(勇力)이 남보다 뛰어나서 육전(陸戰)과 해전(海戰)에 모두 능한 장사(將士)였다. 비록 옛날 이름난 장수(將帥)라 할지라도 천거(薦擧)를 받기는 어려웠는데, 이는 선조조(宣祖朝)에 2만 명을 살리고도 천거 받지 못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세 조정(朝廷)에서 연이어 당상관(堂上官)을 지냈고, 임진왜란(壬辰倭亂)에는 임금을 호종(扈從)하였는데, 스스로 강한 군대를 갖춰서 험난한 일에 대비해야한다고 생각하며 조정 일을 근심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왜인(倭人 : 일본인)들이 신의(信義)를 저버리고 남의 나라를 침략(侵略)한 일을 마음 아파하니, 공(公)은 스스로 전장(戰場)에 나아가 검(劍)을 잡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적의 목을 벤 것이 몇 천 명인지 알 수 없다. 번방(藩邦 : 제후국 조선을 지칭)에  황제(皇帝)의 위엄(威嚴)이 떨쳤고, 다시 종묘사직(宗廟社稷)과 이름난 관서(官署)를 회복하게 되었다.
충훈부(忠勳府)에서 공의 화상(畵像)을 그려 공신각(功臣閣)에 안치하고, 관작(官爵)을 1단계 올렸으며, 그 부모(父母)에게는 추가(追加)로 봉작(封爵)토록 하였다. 이질(姨姪)과 생질(甥姪)에게는 관직(官職)과 위계(位階)를 더하고 그 관직을 대대로 계승하게 하였으며, 영세(永世)토록 그 죄(罪)를 용서토록 하고, 전장(田藏)을 하사(下賜)하였다. 
대저 공(公)은 세 조정에 벼슬하는 동안 충성(忠誠)과 효도(孝道)로써 수고한 공로가 있었는데, 더욱이 이 같은 전하(殿下)의 은총(恩寵)을 입게 되었으니 그 누구와 공로(功勞)를 비교(比較)하겠는가?
공(公)의 본관(本貫)은 강원도(江原道) 울진(蔚珍)이다.
묘소는 양주(楊州) 서산(西山) 이곡(梨谷) 해좌사향(亥坐巳向) 간협산(艮峽山)이다.
숭정(崇禎) 5년(1631년, 인조 9년) 2월에 세운다.

울릉군 임우의 15대 손인 임석부씨와 울릉군 공신 영정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우측이 임석부씨이다.
▲ 울릉군 임우의 후손인 임석부씨와 함께 울릉군 임우의 15대 손인 임석부씨와 울릉군 공신 영정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우측이 임석부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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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발견된 내시 공신 초상화

임석부씨와 족보를 앞에 놓고 울릉군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울릉군의 영정이 남아 있다는 말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기자가 2007년 본지를 통해 소개한 호성공신 내시 김새신(金璽信)의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그 초상화를 보았는데 임우 초상화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현재 초상화는 종중회관에 보관하고 있는데, 마침 열쇠를 보관하고 있던 문중 총무가 출타중이라 30분을 기다린 끝에 영정을 볼 수 있었다. 현재 영정은 벽에 걸려 있는데, 비단에 채색한 그림으로 사모관대(紗帽冠帶)에 쌍학흉배(雙鶴胸背)를 두른 복두공복형(幞頭公服形)으로 의자에 앉은 모습인데, 김새신 초상화와 같이 얼굴에 수염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제원은 화폭이 김새신 초상화(화폭 81.3×153cm)와 비슷한 87.5×150cm이며, 외포는 106×166cm이다.

내시 초상화로 2 번째 발견된 호성공신 울릉군 임우의 영정 모습이다.
화폭 87.5×150cm, 외포 106×166cm.
▲ 내시 출신의 공신인 울릉군 임우의 영정 내시 초상화로 2 번째 발견된 호성공신 울릉군 임우의 영정 모습이다. 화폭 87.5×150cm, 외포 106×16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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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성공신 울릉군 임우 영정의 흉배 모습으로 당상관의 상징인 쌍학(雙鶴)이 그려져 있다.
▲ 호성공신 울릉군 임우 영정의 흉배 호성공신 울릉군 임우 영정의 흉배 모습으로 당상관의 상징인 쌍학(雙鶴)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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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군 임우의 영정과 젯상의 모습이다.
▲ 울릉군 임우 영정과 젯상의 모습 울릉군 임우의 영정과 젯상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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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성공신 낙성군 김새신의 초상화로 얼굴에 수염이 없는 것이 임우의 영정 모습과 닮았다. 화폭  81.3×153cm
▲ 호성공신 낙성군(樂城君) 김새신(金璽信) 영정 호성공신 낙성군 김새신의 초상화로 얼굴에 수염이 없는 것이 임우의 영정 모습과 닮았다. 화폭 81.3×15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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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2001년 KBS1 TV의 <진품명품> 프로에서 유일한 내시공신 초상화로 권위 있는 감정가들로부터 감정가 1억 8000만원을 받았고, 현재는 파주 헤이리 93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데, 현재 판매가는 7억이다. 

이번에 내시 임우의 영정이 발견됨으로써 그동안 유일한 내시 공신 초상화였던 김새신의 초상화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번 초상화 발견으로 앞으로 내시 복식 연구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울릉군의 묘가 있는 양주시와 영정이 남아 있는 고양시에서는 하루 빨리 실태 조사를 벌여 이들 유적과 유물에 대한 문화재 지정을 검토했으면 한다. 


태그:#울릉군 임우, #내시 초상화, #호성공신, #향동동, #울진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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