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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아버지
 생전에 아버지
ⓒ 김기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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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지 3년, 이젠 아버지의 넋두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1922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셨고 3년 전인 지난 2012년 여름, 서울에서 돌아가신 실향민입니다. 아버지는 1955년부터 서울신문에 <도토리군>과 <신판 봉이 김선달>을 연재한 시사만화가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유가 없는 자유당 정권 치하에서 시사만화를 통한 정치풍자에 한계를 느낀 아버지는 그 후 아동만화로 진로를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태어난 해인 지난 1960년 아버지의 직업은 아동만화가였습니다. 덕분에 저는 아버지가 그린 만화는 물론 아버지 지인 만화가들이 그린 다른 수많은 만화를 보며 꿈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 시절 우리 집엔 항상 만화책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은 물론 친척 집 아이들도 무료만화책을 보려고 하루가 멀다고 우리 집을 찾아왔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집은 아버지 만화 덕에 동네에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주로 집에서 만화를 그리셨습니다. 창작이 필수인 만화가라는 직업은 발랄한 생각과 신선한 아이디어가 생명입니다. 그래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아버지는 줄담배를 피우셨고 술도 많이 드셨습니다.

아버지는 동시대 세대들과 달리 아들인 저에게도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친구처럼 다정다감하게 대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를 무서워하거나 어려워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직업이 '아동만화가'였던 아버지는 아마도 아이들의 동심을 몹시도 좋아하셨던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제 딸도 어렸을 때 친할아버지를 '늙은 오빠'라고 격의 없이 부를 정도였습니다. 

또한 아버지는 동시대 월남한 다수 실향민과 달리 <조선일보>를 싫어하시고 <한겨레신문>을 구독하셨습니다. 더구나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전 대통령을 싫어하시고 권위의식이 없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너무도 좋아한 '친노파'였습니다. 제가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재야인사' 함석헌 선생을 알게 된 것도 다 아버지 덕분이었습니다. 

분단의 아픔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사신 아버지

그러나 항상 다정다감하고 명랑해 보이시던 아버지도 가끔은 어두운 면을 보이셨습니다. 연말연시에 술을 많이 드시면 아버지는 "다 필요 없어…" 하고 혼자 넋두리를 하시며 괴로워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그런 아버지의 넋두리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머리가 좀 크고 나서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북한에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민족분단의 아픔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사신 실향민이라는 것을.

아버지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입니다. 어려서부터 그림과 음악을 잘하셨고 일제강점기인 어린 시절 일본 만화잡지 <소년구락부(少年俱樂部)>를 보며 어린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북청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읍내 잡화가게에서 점원으로 첫 사회생활에 발을 내딛으셨습니다.

그 후 북청도립병원에서 서무직으로, 또 청진의 제철병원에서 관리직으로 근무하셨습니다. 1942년 20세였던 아버지는 북한에서 결혼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땐 7살 먹은 큰딸과 5살 아들, 그리고 어린 딸을 두셨습니다. 이분들은 저의 이복 누님들과 형인 셈입니다.

1945년 해방 후 북한에 입성한 소련군과 김일성의 만행을 목격한 아버지는 고향 북청에서 반공단체인 대한청년단원으로도 활동하셨습니다. 평소 그림을 잘 그리던 아버지는 대한청년단에서 반공 전단과 책을 만드는 일을 맡으셨습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압록강까지 후퇴했던 북한군의 대공세가 시작되기 전날인 1951년 1월 4일, 반공청년 아버지는 부모님과 처자를 남겨두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서 단신으로 유엔군의 LST(상륙전용함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20대 검은 머리 청년이 90대 백발노인이 될 때까지

당시 세계 제일의 '슈퍼 파워' 미군이 참전했기에, 아버지는 길어야 서너 달 안에 전쟁이 끝나고 북한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가족과 곧 재회할 것으로 생각하셨습니다. 집안 어른들도 아버지에게 "걱정하지 말고 가! 다시 곧 볼 텐데"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러나 20대 검은 머리 청년은 90대 백발노인이 될 때까지 사랑하는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없었습니다. 서너 달이면 재회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가족을 3~4년 아니 30~40년을 넘어 70년이 되도록 만날 수 없었습니다. 남북한 정권의 한심한 '이념놀이'는 이렇게 500만 명의 비극적 이산가족을 만들었습니다.   

아버지가 LST에서 내린 곳이 거제도였습니다. 그곳에서 참 고생이 많으셨답니다. 북한에 있는 가족이 너무 보고 싶어 객지에서 남몰래 이불을 적시며 잠든 밤이 수도 없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피난시절 부산의 국제시장에서 미군 초상화를 그려주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다가, 우연히 박기당(1922~1979) 화백을 만나 두 분은 평생지기 '절친'이 되셨습니다.

전쟁이 길어지자 북한에 가족이 너무 걱정되고 그립기도 해서 아버지는 어떻게든 북한에 가 볼 심정으로 '켈로부대'(미국 극동군사령부가 북한지역 출신으로 조직한 북파 공작 첩보부대)에 지원하셨답니다. 우연히 심사위원 중에 아버지 고향선배가 있어서 아버지는 '합격'을 의심하지 않았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면접에 떨어졌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몸 성히 살아 돌아오는 북파공작원이 거의 없어서 그 고향 선배가 아버지를 아껴서 면접에 탈락시켰답니다.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저는 오늘 여기에 없을 것입니다. 살다가 실패하는 것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부산에서 전투경찰에 지원하셨습니다. 이번에는 합격해 경북 상주에 있던 태백산지구 전투경찰사령부에 배속돼 기관지나 문서를 만들고 평소 그림 솜씨를 발휘해 군사용 지도책을 만드셨습니다.

전쟁 후, 아버지는 대전경찰국 작전상황실에서 경사로 근무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1954년 여름 아버지는 <서울신문>에 독자만화를 2~3개 투고하셨습니다. 그 후 얼마 안 지나 서울신문사 문화부장이 아버지에게 전화했답니다. 용건은 "당장 서울 올라와서 우리 신문에 만화를 연재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던 것입니다. 

<도토리>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둘째 아들
 
아버지 만화 주인공 '도토리'
 아버지 만화 주인공 "도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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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평생직업 '만화'는 그렇게 우연히 시작되었습니다. 상경하기 직전 아버지는 서울 옥인동이 고향인 10년 연하 어머니를 만나 재혼하셨습니다. 그리고 상경한 33살 '신혼부부'인 아버지는 <서울신문> 편집실에서 매일 시사만화를 그리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코주부> 김용환 화백의 후임으로 서울신문에 <도토리군>, 나중에는 <신판 봉이 김선달> 시사만화를 연재하셨습니다. 지금 장·노년층들은 1950년대 중반 아버지 만화 주인공들인 개구쟁이 소년 '도토리군'과 익살맞은 노인네 '봉이 김선달'을 기억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만화 주인공 '도토리'는 곧 아버지가 북한에 두고 온 둘째 아들, 제 이복형이었습니다. 1.4 후퇴 때 남겨두고 온 어린 아들의 귀엽고 그리운 모습을 아버지는 매일 만화로 그리신 겁니다.

 
아버지 만화 '도토리'
 아버지 만화 "도토리"
ⓒ 김기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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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에 연재했던 아버지의 <도토리>는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10여 년간 아버지는 인기 절정 아동만화가로 제 친구들은 물론 우리나라 어린이 독자들의 큰사랑을 받았습니다. 동네마다 만홧가게가 들어섰던 시절이었지만 만화가 아버지를 둔 덕에 저는 만홧가게 한 번 가지 않고 서울 장안의 유명하다는 만화들을 전부 다 섭렵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남한에 있는 가족에게 맘 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항상 마음에 걸려 하셨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사랑하는 가족과의 생이별이라는 말 못 할 고통은 아버지 가슴 속에 지울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온갖 방법으로, 아버지는 북한에 있는 가족들 생사를 알아봤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인 지난 1993년 어느 날, 아버지는 영국에서 유학 중인 제게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편지를 보니 1951년 1.4 후퇴 당시 아버지가 북한의 가족들과 살던 북청의 집 주소가 적혀 있었습니다. 북한에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가족들에게 전해 달라는 아버지의 애절함이 묻어있는 편지였습니다.  

저는 북한에 있는 '어머니'와 이복형님 그리고 누님들에게 제 소개와 인사말을 추가하여 등기우편으로 편지를 부쳤습니다. 그러나 1951년 당시 아버지가 사시던 북한 집의 주소가 바뀌어서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가족들이 한국전쟁 중 사망했는지,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북한의 가족을 평생 그리워하시던 아버지
 
1956년 탄생한 현대만화가 협회, 뒷줄 왼쪽에서 2번째가 아버지
 1956년 탄생한 현대만화가 협회, 뒷줄 왼쪽에서 2번째가 아버지
ⓒ 김기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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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 대중만화시대의 1세대 만화작가였습니다. 아버지와 동시대를 풍미했던 박기당, 김정파, 신동우, 임창, 이재화 화백 등을 비롯한 대부분 화백들이 지금은 작고하셨습니다. 어린 시절 이분들을 '아저씨'라고 부르며 아장아장 따라 다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한때 인기 만화가였으나 아버지는 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셨습니다. 제가 어려서 기억하는 아버지는 돈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시는 철저한 바보였고 항상 '정직'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도 지금 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습니다.

만화창작 이외에도 아버지는 만화잡지와 서적 편집자 일을 하셨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치시던 클래식 기타 연주에서도 남다른 소질이 있으셨습니다. 아버지의 피를 받은 탓인지 저도 10대 때는 클래식 기타를 꽤 쳤고 초상화를 무척 잘 그렸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제 그림을 보신 박기당 아저씨가 아버지에게 "성수 미술가 시키지요?"라고 제안도 하셨습니다. 또 제 조카도 아버지의 피 탓인지 서울예고와 한예종을 나와 현재 클래식기타 연주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요즘 저는 3년 전 여름 이맘 때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을 많이 합니다.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저는 분단의 희생자였던 실향민 아버지의 가슴에 남아있던 피멍을 생각하면 너무도 가슴이 저립니다. 가족은 세상에 무엇보다도, 어떤 이념보다도 소중한 것이 아닌가요?

분단 70년, 북한의 가족을 평생 그리워하던 실향민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만화가 김기율은
▲ 1922년 함경남도 북청 출생
▲ 소년 시절 <소년구락부>라는 잡지 속의 그림을 따라 그림 

▲ 대한청년단에서 반공 전단과 책을 만드는 일을 맡아 그림을 그림 
▲ '고바우' 김성환의 도움으로 신문만화 연재와 잡지만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 서울신문 연재
- <도토리군> (1955년 8월 17일~1956년 3월 7일, 160회 연재)
- <신판 봉이 김선달> (1956년 4월13일 ~ 8월 24일)
▲ 아동만화 <도토리> 시리즈와 <무쇠돌> 시리즈를 광문당에서 발행 
▲ 1961 한국만화자율회 심의부장 
▲ 1972 한국만화가협회 제4대 회장 

▲ 1978년 한국일보에서 '두더쥐 두루뭉'이란 작품을 마지막으로 만화창작에서 손을 뗌 
저서에 <두고 온 이야기>, <잃어버린 동산>, <중국괴이담>이 있다.
 




 

태그:#김기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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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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