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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한규협·최정명 씨가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지난 6월 11일부터 70m 높이 국가인권위원회 광고탑에서 고공 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한규협씨 아내가 남편에게 쓴 편지글입니다. - 기자 주

9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옥상 광고탑 위에서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사내하청 노동자인 최정명, 한규협씨가 불법파견 근로자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29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료진이 농성장을 찾아 부상을 입은 한규협씨를 치료하고 있다.
▲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 29일째 고공농성 9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옥상 광고탑 위에서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사내하청 노동자인 최정명, 한규협씨가 불법파견 근로자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29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료진이 농성장을 찾아 부상을 입은 한규협씨를 치료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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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협씨, 당신!
막상 편지를 쓰려고 하다가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쓴 것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래되었고, 무엇보다 내 앞에 없는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막막해서였어요.

당신!
벌써 수차례 그 앞을 다녀왔고, 옥상에까지 올라가 '힘내라'고 손 흔들고 내려왔는데, 아직도 나는 '잘 있어! 건강하게 잘 지내!'란 말이 참 낯설어요. 생각만 해도 아찔한 70m 광고탑 위, 폭이 2m도 안 된다는데, 어떻게 그 위에서 잘 있을 수가 있을까요!

어제도 동네 언니가 안부를 묻길래 "그래도 우리 규협씨는 키가 작아서 천만다행이잖아. 누워도 발은 안 나올 테니"라는 말을 농담이랍시고 하며 서로 깔깔거렸는데, 돌아서는데 그냥 눈물이 흘러내리잖아. 당신도 잘 알지? 나 웬만해서 잘 안 우는 거. 그런데 그런 내가 그만 울보가 되어 버렸네. 그래도 걱정하지 마! 당신 앞에서는 절대로 안 울 테니까.

규협씨!
기억하죠? 당신 올라가기 전, 올 봄은 무척 가물었잖아요. 농사 망친다고 비가 좀 내려야 한다고 모두들 아우성이었는데. 그런데 며칠 전, 그렇게 모두가 애타게 기다리던 비가 왔잖아요. 방송에서도 주변에서도 드디어 비가 온다고 그렇게들 좋아했는데, 그런데 나만 딴 세상 사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어.

당신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난간도 없어서 혹여 바람에라도 휘청거릴까 몸에 안전띠를 매고 있어야 한다던데, 비가 오면 그 철판이 또 얼마나 미끄러울까. 이 비를 제대로 피할 곳은 있을까, 모두에게 반가운 그 빗줄기를 바라보며 아무에게도 말 못할 걱정이 한 가득이었답니다.

당신, 해윤 아빠!
벌써 애를 셋씩이나 낳고, 이 정도면 나도 대한민국이란 사회 알 만큼은 안다고 생각하는 '아줌마'인데, 왜 아직도 이렇게 이해 안 가는 일들이 많을까요?

당신 친구들에게, 당신이 '동지'라고 부르던 그 사람들에게, 시간만 나면 가족보다도 당신이 더 찾았던 노동조합 사람들에게 설명을 듣고 또 들었는데도 솔직하게 아직 이해가 안 돼요. 도대체 우리 착한 해윤 아빠가 왜 저 위에 올라가 있어야 하는지.

2011년 처음 당신과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불법파견 소송'을 제기한다고 했죠. 사실 그때는 나도 오랜만에 집에 와서는 눈 똥그랗게 뜨고 열변을 토하던 당신에게 찬물 끼얹는 것 같아 아무 소리 안 했지만, 설마 그게 마음처럼 잘 될까 싶었거든요. 우리가 살아온 세상은 절대로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작년 가을, 3년 만에 드디어 1심 선고공판에서 500명에 가까운 전원이 모두 승소판결을 받았다고 그렇게 기뻐했잖아요. 정말 껑충껑충 아이처럼 방방 뛰는 당신 모습을 본 게 얼마 만이었는지, 괜스레 우리 남편 고생 많았구나, 어깨를 어루만져 주면서 저도 눈물이 찔끔 났었죠.

그런데 이게 뭐에요. 법원에서도 판결을 내렸다는데, 왜 당신은 이 폭염에 저 꼭대기에 올라가 있어야 하는 거예요?

마음 같아서는 정말이지 청와대에 쫓아가서 대통령에게라도 직접 따져 묻고 싶은 생각입니다. 텔레비전만 켜면 대통령이 하는 소리라고는 '법과 원칙'이란 거, '대한민국은 법치국가다' 뭐 이런 소리뿐이던데, 왜 판결을 이행하고 있지 않은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잘 모르는 사람들은 당신 이야기를 듣고는 "데모하러 올라갔냐"고 해요. 그러면 저는 속상한 것 꾹 누르고 또박또박 힘주어서 "우리 남편은 법 지키라고 올라간 거예요"라고 꼭 이야기합니다. 내가 잘 몰라서 다른 이야기는 못해도, 어느 때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 아무 얘기 못할 것 같아도 이 한마디는 꼭 해주어야 덜 속상해.

당신, 규협씨!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 높은 전광판 꼭대기에서 당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거꾸로 가장 힘을 내게 하는 것도 우리 이쁜 막내 해윤이가 아닐까 싶어요. 나도 그렇거든.

첫째, 둘째 다 키워놨더니 다 늦게 마흔 줄에 갑자기 들어선 셋째 소식에 당신이나 나나 얼마나 고민하고 걱정했어!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나온 아이가 부모 맘을 아는지 태어나면서부터 이쁜 짓만 하고 주변 사람들 사랑까지 독차지했잖아요! 자주라고 해봤자 주말에 한 번밖에 못 오는 당신도 집에만 오면 해윤이만 끼고 살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그 아이가 벌써 5살이네. 아침마다 당신 생각에 마음 한 구석 허전해도, 한켠에 자고 있는, 정말 천사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해윤이의 맑은 얼굴 쳐다보며 매일같이 다시 마음을 다잡아요. 남들은 이제 '미운 다섯 살' 시작이라는데, 이 녀석은 요새 부쩍 큰 아이처럼 굴려고 하네.

아마 아빠가 가까이 올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어렴풋이 아는가 봐요. 아빠 만나러 가는 주말만 되면 지가 더 씩씩하게 이것저것 챙기고, 엄마 손도 꼭 붙잡아주고. 그래야 당신 앞에 가더라도 해윤이 눈에 저 높은 곳에 있는 아빠 얼굴이 보일 리도 만무한데 말이죠.

9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옥상 광고탑 위에서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사내하청 노동자인 최정명, 한규협씨가 불법파견 근로자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29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료진이 농성장을 찾아 부상을 입은 한규협씨를 치료하고 있다.
 9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옥상 광고탑 위에서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사내하청 노동자인 최정명, 한규협씨가 불법파견 근로자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29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료진이 농성장을 찾아 부상을 입은 한규협씨를 치료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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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해윤 아빠!
그러니까 건강하게 있다가 꼭 이겨서 내려오세요! "우리 해윤이가 컸을 때는 이 지긋지긋한 비정규직 차별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당신 말을 믿어요. 다치지도 말아요. 엊그제 발가락이 찢어져 의사들이 급히 올라갔다는데, 내가 살펴봐 줄 수도 없잖아.

그러니까 당신, 규협씨!
아프지 말고 다치지도 말고 건강하게 있다가 꼭 두 발로, 올라갈 때처럼 씩씩하게 뚜벅뚜벅 내려오세요. 당신이 그토록 소망하던 '차별 없는 세상, 비정규직이 없어지는 세상'의 첫 문을 활짝 열고, 정규직이 되어 당당하게 내려오세요.

나는 씩씩하게 아래서 기다릴 거야.
우리 세 아이들과 함께. 그리고 당신이 의지했던 사람들과 함께.

이 말 한 지도 정말 오래 된 것 같아요.
"사랑해요! 규협씨!"
그리고 힘내요! "내 남편! 한! 규! 협!"


태그:#한규협, #고공농성, #기아자동차, #화성지회,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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