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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집시법 위반 등으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한 4.16국민연대 김혜진 운영위원과 박래군 상임운영위원이 지난 16일 오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위해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 영장실질심사 받는 박래군, 김혜진 경찰이 집시법 위반 등으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한 4.16국민연대 김혜진 운영위원과 박래군 상임운영위원이 지난 16일 오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위해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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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인권 운동가인 박래군이 또 구속됐다. 이번이 그의 몇 번째 구속인지 기억조차 분명치 않다. 떠오르는 대로 쓴다면 첫 기억은 1986년 '영등포 한미은행 점거 농성' 사건이었다. 당시 연세대 학생이었던 청년 박래군은 독재자 전두환의 광주 학살을 묵인한 미국에 항의하고자 시위에 나섰다. 이 때문에 그는 2년여간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영화 <소수의견>의 모티브가 된 용산 참사 당시 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으로 일하면서였고, 세 번째는 평택 대추리에서였다. 미군 기지를 이전하기 위해 강제로 내쫓길 운명에 처한 농민과 연대한 죄였다. 그리고 네 번째. 이번엔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은 유족과 연대했다는 죄였다(관련 기사 : "내가 구속돼도 세월호 진상규명은 계속될 것").

결국 첫 번째는 쿠데타 독재 세력인 전두환에게 학살 당한 광주 시민과 연대하기 위해, 두 번째는 철거민들과 세 번째는 농민과 그리고 네 번째는 자식 잃은 부모와 연대한 죄였다. 이것이 죄라며 법원은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모두 11번. 지금까지 이 같은 죄로 그가 대한민국 법정에서 받은 징역과 벌금형 횟수다. 

1992년 처음 만난 '박래군'

내가 박래군 선배를 처음 알게 된 때는 지난 1992년이었다. 어느덧 23년 지기 인연이 되었다. 만나게 된 계기는 이렇다. 1990년, 나와 함께 학생 운동을 하던 운동권 동료가 의문사로 숨졌다. 그후 나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고통 속에서' 매일 허우적 거렸다. 그러다가 먼저 간 동료를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래서 찾아간 곳이 당시 '전국 민족민주 유가족 협의회'(아래 유가협)였다.

추모 사업회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고 어디서부터 뭘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중 떠오른 곳이 유가협이었던 것이다. 민주화와 통일 운동 과정에서 숨져간 분들을 추모하고 계승하는 곳이니 그곳에 가면 뭔가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줄 것 같아 찾아간 것이다. 그래서 기대감과 설렘으로 찾아간 그곳에서 자신을 사무국장이라며 나타난 사람이 얼굴 새까만 당시 30대 남성이었다.

그냥 보면 방금 논을 매다가 온 농부처럼 보였다. 외모는 털털했고 답변 역시 순박했다. 결론적으로 그날, 나는 그에게 기대했던 도움은 받지 못했다. 유가협 사무국장이니 우리와 다른 뭔가를 주리라 기대했으나 스스로 밝히기를 '추모사업회를 어떻게 만들어야 좋은지 나도 잘 모르겠다'는 답만 들었다. 오히려 맥 빠지는 말도 들었다. 추모 사업이라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는 말만 거듭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포기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런 말만 들으니 잔뜩 기대하고 온 마음에 실망감만 가득했다. 괜히 왔다는 후회가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래서 돌아서려던 순간, 그가  "대신 이거 하나만 마음에 간직하고 돌아가라"는 말을 했다. "잊지 말라고". "영원히 누군가를 잊지 말고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바보처럼 살면 그것이 무엇이든 가장 좋은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내 인생에서 그 말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오늘날의 명언이 되었다.

그날 내가 만난 사람이 바로 인권 운동가 박래군 선배였다. 그리고 자신의 말처럼 그는 늘 사회적 약자와 함께 늘 함께 했다. 그런 박래군 선배가 다시 또 네 번째 구속이 되어 '사회적 격리'가 됐다는 사실 앞에 나는 비통하고 억울한 심정이다. 도대체 그가 우리 사회에서 격리해야 할 만큼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그것도 대한민국 법원이 인정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끔찍하다. 이게 대한민국의 정의인가.

그날 새벽, 박래군의 슬픈 미소가 아팠다

경찰이 집시법 위반 등으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한 4.16국민연대 김혜진 운영위원과 박래군 상임운영위원이 지난 16일 오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위해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영잘실질심사 받는 박래군, 김혜진 경찰이 집시법 위반 등으로 사전구속영장을 청구한 4.16국민연대 김혜진 운영위원과 박래군 상임운영위원이 지난 16일 오전 영장실질심사를 받기위해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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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전 처음 박래군 선배를 만난 후 나는 몇 차례 그와 함께 일을 했다. 제일 먼저는 1993년이었다. 처음 만났던 유가협에서 나는 간사로, 선배는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두 번째는 2002년이었다. 김대중 정부 하에서 출범한 '대통령소속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선배는 과장으로, 나는 조사관으로 일했다. 삼고초려가 아니라 '수십'고초려 끝에 의문사 피해 유족들이 과장으로 그를 모신 것이다.

그곳에서 박래군 선배는 '퇴근 하지 않는 남자'였다. 거의 매일을 위원회 사무실에서, 사건이 발생한 군 부대에서, 또 출장 가는 거리에서 보냈다. 그렇게 치열하게 일하던 선배가 위원회를 나간 것은 스스로 낸 사표 때문이었다. 위원회 업무 종료 후 잔여 업무 처리를 이유로 3개월간 급여를 줬는데 그는 굳이 사표까지 쓰며 제 발로 나갔다.

누구나 그렇듯 활동가 중 넉넉한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어디 좋은 자리가 생겨 직장을 옮기는 것도 아닌데 굳이 사표까지 내며 나가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때 들은 선배의 답은 담백했다. 한 달 급여가 인권 운동가가 받는 1년 연봉에 가까운 월급이 무서워서 그만 둔다고 했다. "그렇게 좋은 자리에 오래 있으면 그 달콤함에 젖을까 봐 그만둔다"는 뜻이었다. 나는 박래군 선배의 이 말이 잊히지 않는다.

다시 본업인 인권 운동가로 돌아온 선배는 이후 숨 가쁜 세월을 보냈다. 구속과 벌금형으로 점철된 고난의 세월이었다. 나는 그러한 형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늘 미안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9년 10월 어느 날이었다. 당시 박래군 선배는 용산 참사 사건으로 희생된 분들의 명예 회복과 진상 규명을 위해 대책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고 결국 수배자가 됐다.

그래서 찾아든 곳이 명동성당이었다. 명동성당 지하 영안실에서 선배는 성당 측의 배려로 수배 도피를 이어갔다. 그때 나는 틈나는 대로 그곳을 찾아갔다. 수배 중인 선배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 없어 나는 늘 미안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비가 오는데 선배가 몹시 그리웠다. 그래서 밤 12시가 다 된 시각에 나는 몇 가지 안줏거리를 사서 명동성당 은신처를 찾아갔다. 비 오는 그날, 위로주라도 대접하고 싶었던 것이다.

수배 중에 '되네', '안 되네' 하는 실랑이 끝에 오늘 하루만이라는 나의 간청 끝에 형은 몇 잔의 술을 들었다. 그리고 새벽녘, 비 내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답답한 지하 영안실에서 벗어나 우리는 비가 내리는 명동성당 들머리에 섰다. 그때 선배는 말했다.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나는 "그게 뭐냐"고 물었다. 답은 의외였다. "잘 팔리는 연애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선배는 '씩' 웃었다.

나는 선배의 말 끝에 피어난 웃음이 슬펐다. 왈칵 눈물이 나려 했다. 선배가 웃은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선배는 연세대 국문과 출신이었다. 유명한 소설가 공지영씨가 그의 대학 동기다. 선배 역시 문학 청년이었던 대학 1학년때 <연세 춘추>가 공모한 문학전에서 소설 <땅 강아지>로 수상한 기대주였다. 하지만 시대는 그를 소설가가 아닌 전혀 다른 길로 안내했다. '사회적 약자의 눈물을 외면하지 못한 죄'로 그는 지금, 열두 번째 고난을 겪고 있다.

박래군은 죄가 없다

박래군 선배가 인권 운동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바로 밑에 동생 박래전 열사 때문이었다. 숭실대학교 인문대 학생회장이었던 동생 박래전은 1988년 6월 분단 올림픽 반대를 외치며 분신 자결했다. 그 사건은 박래군 선배에게 평생의 아픈 상처가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이후 박래군 선배는 자신처럼 민주화와 통일 운동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유족이 모인 유가협을 도우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것이 전부다. 사회적 약자를 위해, 그들과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의 소소한 행복을 포기한 것이 박래군의 죄가 되었다. 그것이 갇히고, 갇히며, 또 갇히는 가장 큰 이유인 것이다.

정말 웃기는 일은 박래군 선배에게 영장을 발부한 서울중앙지법 이승규 영장전담 부장판사의 영장 발부 사유다. 비슷한 사유로 영장이 청구된 김혜진 4·16연대 운영위원에게는 "확보된 증거 자료와 심문 결과, 주거 및 가족 관계 등에 비춰 보면 피의자가 도망하거나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기각한 반면, 박래군 선배에 대해서는 "범죄 사실의 주요 부분에 대한 소명이 있고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이 인정된다"며 영장을 발부했다.

참으로 옹색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박래군 선배에게도 일정한 주거가 있고 또 아내와 사랑하는 두 딸도 있다. 가족 관계에 비춰보면 도망갈 이유도 없으며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고 여러 차례 밝혔다. 또한  압수 수색을 통해 이미 증거 자료도 다 확보했으니 이를 인멸할 우려 역시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영장을 발부한 이유는 하나다. 이 터무니없는 사건으로 두 사람이나 잡아 가두려니 법원도 민망했던 것이다. 그렇게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대한민국 법원이 '스스로 만든 부끄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단히 잘못된 영장 발부다. 또한 이처럼 박래군 선배를 잡아 가둔 진짜 이유는 누가 봐도 세월호의 진실을 탄압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다. 진실을 묻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유족을 도왔던 인권 운동가를 '사회적 격리'하는 비열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래서 박래군 선배는 구속 전, 단호하게 말했다. "구속이 두려웠다면 지금까지 싸워오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몇 명을 구속한다고 해서 끝날 싸움이 아니다. 참사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원하는 이들은 아직도 많다"며 남아 있는 모든 이에게 끝까지 함께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렇다. 모두가 다 애국자로 일선에서 살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의 정의로운 행동에 화답조차 하지 않은 채 그냥 살아간다면 '그것은 살아도 산 사람이' 아니다. 달콤한 연애 소설을 쓰며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문학 청년 박래군이 소설보다 더 기막힌 시대의 아픔을 붓 대신 자신의 몸으로 쓰고 있는 지금, 나 역시 그 뒤를 따르고 싶다.

약속하라. 갇힌 박래군을 대신해 우리 모두가 또 다른 제2, 제3의 박래군이 될 것을. 그리하여 세월호 참사가 진상 규명되고 그 참사 책임자가 처벌되는 그날까지 우리 모두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을.

그리하여 다 같이 외치자.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하라. 책임자를 처벌하라. 박래군을 석방하라.박래군을 석방하라.


○ 편집ㅣ조혜지 기자



태그:#박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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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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