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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아무런 절차도 없이 붙잡혀 단속차에 태워졌다.
 사람들은 아무런 절차도 없이 붙잡혀 단속차에 태워졌다.
ⓒ 형제복지원운영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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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했던 악몽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시작됐다.

최승우씨는 그날, 새 교복을 입고 있었다. 누가 봐도 막 중학교에 입학한 풋풋한 중학생이었다. 표정에서는 설렘이 읽혔다.

그런 최씨를 누군가가 다짜고짜 '부랑아'라며 끌고 가 가뒀다. 집에 돌아오지 않자 할머니는 이를 파출소에 신고했다. 사라진 손주를 찾아줄 유일한 희망은 국가, 경찰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최씨를 지옥에 넘긴 건 바로 그 경찰이었다.

그가 끌려간 곳은 구타와 모욕이 지배하는 지옥이었다. 그 안에서 두 살 어린 동생을 다시 만났다. 형제는 먼발치에서 서로 말도 못하고 눈만 쳐다보며 소리 죽여 울었다. 후에 동생은 "서면의 오락실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끌려왔다"고 했다. 그 동생은 결국 고통 속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형제복지원구술프로젝트 지음 / 오월의봄 펴냄 / 2015.07 / 1만5000원)
▲ <숫자가 된 사람들> (형제복지원구술프로젝트 지음 / 오월의봄 펴냄 / 2015.07 / 1만5000원)
ⓒ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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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가 말한 지옥은 부산에 있던 '형제복지원'이다. 최씨 외에도 <숫자가 된 사람들>에서 사람들이 증언한 그곳은 철저한 군대 시스템으로 돌아갔다. 원장을 정점으로 총무, 중대장, 소대장, 조장에 이르는 권력체계는 모욕과 차별, 기합과 구타를 통해 유지됐다. 반항이나 탈출은 매질로 이어지고 끝내 죽음까지 몰고 갔다. 1975년부터 1987년 폐쇄까지 12년 동안 공식 사망자만 최소 513명에 이른다.

기상은 매일 5시, 점호가 이어졌다. 아침은 꽁보리밥에 된장만 푼 국, 언제 지목받아도 주기도문이나 원훈 따위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야 했다. 빗자루나 대걸레 자루로 맞는 건 그나마 운이 좋은 날이다. 삽자루나 곡괭이 자루도 맞을 만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물통에 밤새 담가놨던 자루로 맞는 건 못 견딜 정도였다고 토로했다. 살에 좍좍 달라붙어 세 대만 맞아도 살이 터져 피가 났다고 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하루는 '도대체 내가 왜 여기서 맞고 있는지'조차 생각하지 못하게 했다.

자신이 받았던 수많은 기합 종류를 설명하던 최씨는 그중에서도 '히로시마'가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히로시마'는 2층 침대 난간에 다리를 올리고 물구나무를 서는 자세다. 그런 자세에서 손으로 발을 제쳐버리면 한 바퀴를 돌아 쓰러지고 만다. 앞사람을 발로 차서 줄줄이 쓰러트리기도 했다. 그런 일을 겪으면 별이 핑핑 돈다.

"죽음을 항상 옆에 놓아두고 산다"

가혹한 폭력에 시달렸던 형제복지원 원생들은 극한의 강제 노력 또한 수행해야 했다.
 가혹한 폭력에 시달렸던 형제복지원 원생들은 극한의 강제 노력 또한 수행해야 했다.
ⓒ 형제복지원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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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옷을 비롯한 생활용품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같은 방 사람들끼리 수건 하나로 버티던 날도 있었다. 그래도 다른 환경을 몰랐던 순박한 그들은 당연히 그렇게 하는 거라, 그게 규칙이고 절차인가보다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오늘 하루 안 맞고 잘 넘어가나'란 생각만 했다고 한다.

"도망가다 잡히면 반 죽는 거야. 그러니 못 가는 거야. 도망가고 싶어도 겁이 나서. 내가 어떻게 되는가를 아니까. 목숨 내놓고 가면 가는 거지만, 잡히면. 그리고 도망 하나 가면 그 소대는 단체 기합이야. 그게 며칠 동안 계속되는 겁니다. 단체생활이라는 거야. 한 사람 잘못되면 전체가 다." - 김영덕씨, <숫자가 된 사람들> 본문 중에서

후에 서울로 함께 올라왔던 형제복지원 출신 친구들은 몇 년 안 돼 죽음을 맞았다. 그나마 살아남은 몇 명도 그때의 고통을 못 잊고 "죽음을 항상 옆에 놓아두고 산다"고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을 해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았던' 세월을 겪었다. 이런 경험은 그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상처를 후볐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최씨에 따르면, 당시 경찰이 강도나 도둑을 잡으면 성과 점수가 2, 3점에 불과하지만, 형제복지원에 사람을 넘기면 5점을 받았다. 거기다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1987년 당시 매년 20억 원 이상의 국고를 지원받았다. 국고 지원 근거는 수용 인원이었다. 박 원장은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까지 받는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2015년 3월 21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형제복지원 사건'의 아직 풀리지 않은 의혹들을 제기했다. 당시 검사 수사기록에 남아있는 'VIP가 부산에 온다'는 문구를 내보낸 방송 화면 갈무리.
 2015년 3월 21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형제복지원 사건'의 아직 풀리지 않은 의혹들을 제기했다. 당시 검사 수사기록에 남아있는 'VIP가 부산에 온다'는 문구를 내보낸 방송 화면 갈무리.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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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 규명을 왜 해야 되냐면, 내가 거기 있을 때는 거의 공권력에 의해서, 부산역전 파출소, 구청 공무원들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잡혀 있다가 형제원 단속차에 인계가 되는 식이었으니까. 경찰은 명령 체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니 어떤 명령이 내려왔으니까 그런 행동을 하는 거 아니겠어. 가정 있는 사람들, 하다못해 학교 다니는 학생이나 직장 다니는 아가씨도 잡혀 오고 그랬으니까. 그런 사람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끌려왔는지, 국가가 왜 그때 당시 각 파출소나 이런 데다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조사를 해야 하는 거지." - 김희곤씨, <숫자가 된 사람들>에서

올해 3월 방송된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는 그 의문을 파헤쳤다. 1987년, 사건을 맡은 수사 검사에게 부산시장의 전화가 걸려온다. "박 원장을 빨리 석방하라"는 내용이었다. 검찰 내부도 발칵 뒤집혔다. '수사기록을 상세히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방송에서 공개된 수사기록에는 '청와대'까지 보고가 올라간 것으로 확인된다.

'인간 청소'를 가능하게 했던 건, 고작 '내무부 훈령'

'내무부 훈령 제410호'에 따라 소위 '부랑인'으로 취급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두는 것이 용인됐다.
 '내무부 훈령 제410호'에 따라 소위 '부랑인'으로 취급되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두는 것이 용인됐다.
ⓒ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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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에서 생활하며 산을 깎아 건물을 짓는 형제복지원 원생들. 3년 6개월 동안 건물 약 18채가 세워졌지만, 단 한 푼의 임금도 받지 못했다.
 천막에서 생활하며 산을 깎아 건물을 짓는 형제복지원 원생들. 3년 6개월 동안 건물 약 18채가 세워졌지만, 단 한 푼의 임금도 받지 못했다.
ⓒ 형제복지원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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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부산지검 검사장은 후에 국회의장까지 지낸 새누리당 박희태 전 의원이다. 그는 "형제복지원을 기억하느냐"는 PD의 질문에 당시 수사 검사의 이름은 기억하면서도 "글쎄, 기억이 날 둥 말 둥 하네"라고 답했다.

결국, 검사는 박 원장에게 징역 15년에 벌금 6억여 원을 구형한다. 법정 공방은 이례적으로 7차례나 벌어진다. 관건은 '특수감금'과 '폭행치사'였다. 이 두 건에 대해 고등법원에서 유죄로 올려보내면 대법원에서 파기해 환송시켰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3차례나 벌였다. 비정상적인 법적 공방이다.

그렇다면 대법원의 주된 논리는 무엇이었을까. 요약하자면 "공적 업무이니 위법한 감금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당시 형제복지원이 운영된 근거는 내무부 훈령이었다. 당시 내무부(현 안전행정부) 훈령 410호는 '사회정화사업'의 일환으로 국가가 '인간 청소'를 자행할 수 있게 했다. 국가주의적인 발상이다. 국가의 일은 모두 옳다는 논리로 인간의 존엄을 훼손할 수 있다는 판결이다. 훈령이 헌법을 뛰어넘는 일이 발생한 거다.

결국, 고등법원은 '감금의 점은 위 판결 환송의 취지대로 그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보기로 하고'란 애매한 문구를 남기고 박 원장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판결한다. '대법원 판결에 동의할 수 없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죄로 볼 수밖에 없다'는 안타까움을 우회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인권유린이란 핵심은 사라지고 주변적인 운영상 비리만 처벌받았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500명 넘는 사람들의 죽음

식사 시간에 중대장은 음식을 남기지 않는지 늘 감시했다. 냄새 때문에 자장면을 먹지 못한 원생을, 중대장이 식판으로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식사 시간에 중대장은 음식을 남기지 않는지 늘 감시했다. 냄새 때문에 자장면을 먹지 못한 원생을, 중대장이 식판으로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 형제복지원진상규명을위한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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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이후 형제복지원에 있던 사람들은 다시 거리로 내몰렸다. 나올 때 '토큰' 하나 받았단 사람도 있다. 결국, 지옥에서 풀려났지만 그들에게는 '제2의 지옥'이 시작됐을 뿐이다.

"현장 일 하면서 형제원에 잡혀갔다 왔단 얘기를 가끔 친한 사람들한테 했습니다. 한편으로 고생했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말로 인해서 나를 악용해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놈이 오죽하면 그런 데 끌려들어 갔겠느냐' 그러는 바람에 내가 현장에서 돈 뜯긴 것도 많고 빌려주고 떼인 돈도 많습니다." - 황송환씨, <숫자가 된 사람들> 본문 중서

당시 '지옥'을 운영했던 박 원장 일가는 아직도 법인을 소유한 1천억 대 자산가로 살고 있다.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왜 이곳에 끌려와 맞고 강제 노동을 당했는지, 500명이 넘는 원생들이 어떻게 사망에 이르렀는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밀란 쿤테라는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라고 했다. 깊은 생채기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저절로 아물지 않는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언제든 당신에게도, 우리에게도 닥칠 수 있는 현실이다.

사그라지는 사람들의 관심 속에, 현재 국회에는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상정'만' 돼 있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덧붙이는 글 | <숫자가 된 사람들>(형제복지원구술프로젝트 지음 / 오월의봄 펴냄 / 2015.07 / 1만5000원)



숫자가 된 사람들 -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구술기록집

형제복지원구술프로젝트 지음, 오월의봄(2015)


태그:#형제복지원, #숫자가 된 사람들, #오월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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