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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이진마을 전경. 마을주민들은 정유재란 당시 죽어가던 이순신을 살려낸 마을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해남 이진마을 전경. 마을주민들은 정유재란 당시 죽어가던 이순신을 살려낸 마을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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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회령포에서 군사들과 함께 죽기를 맹세한 이순신은 1597년 8월 20일(양력 9월 30일) 강진 마량 앞바다를 거쳐 해남 이진으로 간다. 함대의 해상훈련과 출입이 자유로운 포구를 찾아 나선 것이다.

백의종군에 이은 조선수군 재건을 하느라 너무 긴장한 탓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배에 오른 때문일까. 이순신은 속이 불편했다. 머리가 심하게 아팠다. 구역질이 나오더니 구토까지 했다. 좋아지는가 싶더니 금세 다시 아파왔다. 몸을 가누기가 버거웠다. 음식도 먹을 수가 없었다.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싶어 술을 마셨다. 좋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인사불성이 됐다. 하마터면 깨어나지 못할 뻔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 했다. 이틀 밤을 꼬박 앓았다. 이순신의 몸은 그 다음날 더 심하게 아팠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8월 23일 병세가 무척 심각해져 배에서 내렸다.

<난중일기>의 흔적 따라 움직이는 해남 여행

복원된 이진진성. 높은 구릉지를 이용해 쌓았다. 중앙이 낮은 분지형으로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복원된 이진진성. 높은 구릉지를 이용해 쌓았다. 중앙이 낮은 분지형으로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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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마을에 남아있는 당시의 우물. 세월의 더께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진마을에 남아있는 당시의 우물. 세월의 더께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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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8월 20일부터 나흘 동안 <난중일기>에 적은 내용이다. 이진에 내린 이순신은 마을주민들의 극진한 도움을 받으며 몸을 돌봤다.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몸에 좋다는 것들을 가져왔다. 그 덕분인지, 몸이 거짓말처럼 나아졌다.

이순신은 이진에서 하룻밤 묵은 다음 다시 배에 올랐다. 이순신은 이진을 떠나 도괘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낮에는 해상에서 함대 운용을 시험하며 땅끝 앞바다를 돌아 어란포구에 이르렀다.

이진마을 입구에서 본 이진진성의 모습. 벼가 심어진 논과 어우러져 아름답다.
 이진마을 입구에서 본 이진진성의 모습. 벼가 심어진 논과 어우러져 아름답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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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주민들이 이순신을 극진히 돌본 이진은 전라남도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에 속한다. 이진마을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완도와 마주하고 있다. 두륜산과 달마산, 천태산으로 둘러쳐진 마을이다. 지형이 배 모양을 닮았다. 지난 3일 이진마을을 찾았다.

이진은 당시 군사와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순신도 조선수군을 재건해 명량으로 갈 때 이 마을 앞을 지났다. 여기에 진(鎭)은 1598년(선조 21년)에 설치됐다. 1627년(인조 5년)에 만호진으로 승격됐다. 진은 1895년(고종 32년)에 폐지됐다.

옛 이진진성의 흔적. 해남 이진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옛 이진진성의 흔적. 해남 이진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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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이진진성의 성곽. 성벽의 바깥은 돌로, 안쪽은 자갈과 흙으로 채운 걸 보여주고 있다.
 복원된 이진진성의 성곽. 성벽의 바깥은 돌로, 안쪽은 자갈과 흙으로 채운 걸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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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진성은 1648년(인조 26년)에 쌓았다. 남쪽과 북쪽의 높은 구릉지를 이용해 쌓고 중앙이 낮은 분지형으로 마을을 에워싸고 있다. 성벽은 바깥을 돌로 쌓고 안쪽은 자갈과 흙으로 채웠다.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당시 성안에는 두 곳의 샘과 객사, 동헌, 군기고가 있었다. 외곽으로 1차 방어시설인 해자와 목책을 뒀다. 지역의 방어와 제주도와의 물자를 교류한 통제소 역할을 했다.

당시 성곽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서문 터에는 성문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폭 3m, 높이 5m, 길이 34m의 옹성이 있다. 서문 밖으로 해자의 흔적도 남아있다. 서문에 사용됐던 초석 2개도 그대로다.

이진마을에 서 있는 수군만호비. 이진진성의 서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진마을에 서 있는 수군만호비. 이진진성의 서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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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마을의 골목. 벽화를 그려놓아 멋스럽다.
 이진마을의 골목. 벽화를 그려놓아 멋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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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도 일부 복원했다. 당시 우물이 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다. 성터에는 수령 300년 넘은 해송 58그루가 방풍림을 형성하고 있다. 여름엔 시원한 숲그늘을 만들어 준다. 분지 주변은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진성의 서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만호비 4기가 세워져 있다. 당초 이진진성 안에 있던 농협창고 옆에 있었다. 1980년대 들어 지금의 위치로 옮겨왔다. 만호비 앞으로 조선수군 재건로를 알리는 안내판도 세워져 있다.

'이순신을 살린 마을' 주민들의 이유있는 자존심

마을에 돌담이 많다. 여느 마을처럼 석축의 일부가 마을 앞 도로를 포장하는 데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빈번한 일이었다. 주민들은 당시 이순신을 살렸던 마을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복원된 달량진성. 수군만호가 이진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진성이었다. 이진마을에서 멀지 않는 남창마을에 있다.
 복원된 달량진성. 수군만호가 이진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진성이었다. 이진마을에서 멀지 않는 남창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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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량진성으로 가는 해안데크. 해월루에서 달량진성으로 가는 길이다.
 달량진성으로 가는 해안데크. 해월루에서 달량진성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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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진성에서 가까운 곳에 달량진성도 있었다. 수군만호가 이진으로 옮겨오기 전까지 진성이었다. 달량진은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해안을 일컫는다. 여기에 진이 설치된 것은 1406년(태종 6년) 이전이다.

달량진성은 수군만호가 배치돼 배와 군사를 거느렸다. 1483년과 1552년, 1555년 세 차례 침탈을 겪었다. 이른바 '달량진 왜변(을묘왜란)'이다. 1555년 일본군의 침탈로 폐허됐다. 이후 임진왜란 때 이진으로 만호를 옮겼다.

지금도 동벽과 북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성벽은 마을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성벽 주변에 오래 된 팽나무가 빼곡하다. 당시 수군만호가 머물던 해월루도 복원돼 있다. 해월루는 제주로 오가던 사신들의 객사로도 쓰였다.

땅끝조각공원. 땅끝 앞바다를 배경으로 조각작품이 설치돼 있다.
 땅끝조각공원. 땅끝 앞바다를 배경으로 조각작품이 설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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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 오솔길. 땅끝의 넓은 바다를 끼고 송호해변으로 이어진다.
 땅끝 오솔길. 땅끝의 넓은 바다를 끼고 송호해변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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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데에 다른 가볼만한 곳도 많다. 땅끝조각공원이 가깝다. 원로작가 김영중 등의 조각작품 20점이 설치돼 있다. 땅끝해양자연사박물관은 해양 동·식물과 해양자원 5만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사자봉 정상에 땅끝전망대도 있다. 땅끝의 드넓은 바다를 끼고 송호해변으로 이어지는 땅끝오솔길도 좋다. 노송이 무성한 송호해변도 아름답다. 피서지로 인기를 얻고 있다. 대죽리에 조개체험장도 있다.

대왕고래의 뼈. 땅끝자연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대왕고래의 뼈. 땅끝자연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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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끝마을 전경. 땅끝전망대 아래로 갈두포구가 자리하고 있다.
 땅끝마을 전경. 땅끝전망대 아래로 갈두포구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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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찾아가는 길
영암-순천간 남해고속국도 강진무위사 나들목에서 2번 국도를 타고 강진읍으로 간다. 강진읍에서 완도 방면으로 18번 국도를 타면 도암, 신전을 지나 해남 북평에 이른다. 강진무위사 나들목에서 완도 방면으로 13번 국도를 타도 된다. 내비게이션에 ‘전남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1227’을 입력해도 된다. 여행문의-땅끝 관광안내소 ☎061-532-3883



태그:#이진마을, #이진진성, #이진진, #조선수군재건, #달량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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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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