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빠는 우리를 거실에 앉혀놓고 클래식 음악을 듣게 하곤 했다. 베토벤이니, 모차르트니, 차이콥스키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던 작곡가들의 연주가 아빠에 의해 언니와 내 앞에 끌려 나왔다. 우리는 억지로 연주를 듣는 시늉을 했다. 지루했다! '아이 참, 클래식이라니.' 얼른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랐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아빠는 웬일인지 더는 클래식을 들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잘 된 일이었다. 지루하기만 한 클래식과의 이별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클래식과 멀어졌다. 그 뒤로도 한참 그랬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내게 이상한 일이 생기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스마트 폰에 클래식 음악을 다운 받고 있는 게 아닌가! 바흐, 베토벤, 모차르트, 차이코프스키. 어린 시절 아빠에 의해 알게 됐던 작곡가들의 음악이 스마트폰을 꽉 채우기 시작했다.

클래식이 주는 편안함에 빠져들다

언젠가부터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아무 생각 없이 선율에 집중하다 보면 복잡하게 얽혀 있던 생각이나 감정들은 사라지고, 음악만 남았다. 그렇게 남은 음악은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래라 저래라,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음악을 느끼면 그뿐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듣기를 좋아할 뿐이지 나는 클래식 음악엔 문외한이다. 위 작곡가들의 음악도 랜덤으로 마구 섞어 듣는다. 듣다가 '어, 이거 좋은데?'하면 바흐여서, '아, 난 바흐 스타일을 좋아하는구나' 하다가 또 마음에 드는 음악이 나와서 보면 이번엔 모차르트다. 곡의 차이도, 작곡가도 구분하지 못한다. 너무 좋아 오래도록 반복해서 들은 몇 개의 곡만 분간할 수 있다.

이런 내가 클래식에 더 가까워질 수 있었던 계기를 맞았던 건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나서였다. 책의 제목으로 쓰인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이 벨라스케스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초상화를 보고 그녀를 기리기 위해 만든 곡이라고 했다. 유투브에서 이 곡을 검색해 들어봤다. 하루 종일 무한 반복해 들었다. 나중엔 자연스럽게 흥얼거리게도 됐다.

▲ 모리스 라벨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앙상블 디토의 연주
ⓒ credia

관련영상보기


나중에 친구에 의해 내가 무한 반복해 들은 그 곡을 연주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라는 걸 알게 됐다. 알고 보니 리처드 용재 오닐은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유명한 연주가였다. 그에 관해 검색 시작.

그가 출연한 몇 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다운받아 보고, 그의 앨범도 구해 스마트 폰에 넣었다. 그의 앨범 중에는 3번째 앨범인 Winter Journey(겨울로의 여행)가 제일 좋았다. 그렇게 리처드 용재 오닐의 음악에 푹 빠져 지내다가 그가 음악 감독이자 연주가로 활동하고 있는 '앙상블 디토'라는 클래식 팀도 알게 됐다. 자연스레 그들의 공연을 예매했다.

시즌 9 슈베르티올리지
▲ 앙상블 디토 시즌 9 슈베르티올리지
ⓒ credia

관련사진보기


지난 6월 30일, 앙상블 디토의 시즌 9 그 마지막 공연이 있었다. 내가 예매한 바로 그 공연. 이 날은 오후부터 날이 흐려지더니 저녁이 되니 비가 왔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리는 고마운 비였다. 비속을 걸으며 디토의 음악을 들으러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예술의 전당에 도착해자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이 가는 쪽으로 가면 됐다. 콘서트 홀에 도착하니 로비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앙상블 디토 포스터 앞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있다
▲ 앙상블 디토 시즌 9 콘서트 앙상블 디토 포스터 앞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있다
ⓒ 황보름

관련사진보기


5천원을 내고 프로그램을 구입해 펼쳐 보니 이런 설명이 있다. 2007년 시즌 1을 시작으로 올해 시즌 9까지 이어진 앙상블 디토의 공연은 유례없는 관객들의 호응 속에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고. 디토의 공연은 2013년까지 8년 동안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공연을 모두 매진시키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었다. 나는 '그럼, 2014년은 매진이 안 됐나?'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프로그램 속 설명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다. 공연은 오늘도 매진인 것 같았다.

오늘 나는 슈베르트를 만났다

이제, 시간이 다 됐다. 공연장을 가득 매운 사람들이 숨을 죽이며 앙상블 디토를 기다리고 있다.

이번 공연의 제목은 <슈베르티올로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날의 공연은 슈베르트 곡으로만 채워졌다. <크바르테트자츠 c단조, D.703>으로 시작해 <피아노 삼중주 2번 E플랫장조, D.929>를 지나 <현악 오중주 c장조, D.956>까지. 리처드 용재 오닐은 슈베르트를 이렇게 소개했다.

슈베르트는 "초자연적인 선율에의 재능, 그리고 가슴이 뭉클해지는 조화로운 언어로 우리를 천국과 그 너머로 이끄는 영원한 음악의 천재"였으며, 진정한 보헤미안이었다고. 용재 오닐은 또한 공연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현악 오중주 c장조, D. 956>에 대해 "슈베르트만이 아니라 모든 작곡가의 실내악 중에서, 아니 실내악을 넘어 모든 음악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나는 공연 중 때때로 정말로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하고, 또 다른 차원으로 잠깐 다녀오기도 하는 등, 슈베르트의 음악에 흠뻑 빠져 들 수 있었다. 음악을 어떻게 감상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저마다의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음 하나하나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눈앞이 아득해지고 음악만 남는 순간이 다가왔다. 이걸, 슈베르트가 다가왔다도 생각해도 될까. 나는 내 마음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 오늘 슈베르트가 내게 다가온 거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연주회는 아니었다. 슈베르트와 슈베르트를 연주하는 디토, 그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내게 문제가 있었을 뿐.

마지막으로 클래식 연주회를 찾은 게 언제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7,8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너무나 오랜만에 찾은 연주회장. 우선, 집중력이 문제였다. 요즘엔 책을 읽을 때도 10분 이상 집중하려면 큰 의지를 발휘해야 하는데, 음악을 들을 때라고 다를까. 2시간이 넘게 진행된 연주회 중간 중간 딴 데로 새는 생각을 바로 잡느라 애를 먹었다.

자리도 문제였다. 오른쪽에 치우쳐 있던 자리에서 중앙에 마련된 무대를 보려 계속 목을 돌리고 있었더니 급기야는 목이 결렸다. 잠시만이라도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의 시선이 느껴져 그러지도 못했다.

너무 앞에 앉은 것도 문제였다. 나는 앞에서 두 번째 줄에 앉았는데 큰마음 먹고 비싼 표를 구매한 거였다. 연주자들의 표정 하나하나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점은 좋았지만, 대신 너무 가까운 곳에 있는 연주자들을 오랫동안 쳐다보다 보니 서서히 초점이 흐려졌다. 그래서 자꾸 눈을 깜빡이거나 가끔은 눈을 감고 있어야 했다. 이런 현상을 나는 소개팅 자리에서 자주 마주치곤 하는데, 한 시간 넘게 한 사람의 얼굴만을 쳐다보다 보면 나중에는 상대가 흐릿하게 보이게 되곤 했다. 이건, 정말이지 나만의 문제일 수 있겠다.

마지막으론, 문제라기 보단 조금 헷갈렸던 점을 든다면, 과연 언제 박수를 쳐야하는가, 였다. 물론 나는 남이 박수를 치기 시작하면 치기로 이미 마음을 먹고 자리에 앉아 있긴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몇 번 손이 근질근질 했다. 나는 박수를 쳐주고 싶은데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을 때면 괜히 민망하기도 했고. 또 가끔은 박수를 그만치고 싶은데 사람들은 몇 분이 넘게 계속 박수를 쳐댔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연주자들이 다시 나와 인사를 하거나, 앵콜곡을 연주하는 게 아닌가. 분명, 어떤 룰이 있는 것 같았고, 전부는 아닐지라도 소수의 사람들은 음악을 깊이, 진지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곡에서 고(故) 피천득 선생의 외손자인 스테판 피 재키브의 바이올린 줄이 끊어져 연주가 중단되기는 했지만, 그밖에 연주는 아주 깔끔하게 진행됐다. 화기애애하기도 했다. 특히, 리처드 용재 오닐이 무대로 나와 감사의 인사를 전할 때는 모두가 열렬히 박수를 쳤고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관객들은 섬세하게 반응해 주었다. 나 역시 열심히 눈을 깜빡여 초점을 잡은 뒤 마음을 담아 그에게 반응했다.

공연이 끝났다. 30분을 기다려 일부러 챙겨간 책 뒷 표지에 용재 오닐의 사인을 받고 콘서트 홀을 나왔다. 밖으로 나와서야 나는 그와 함께 사진 한 장 못 찍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아쉽다! 아무래도 연주회를 또 찾아야 할 것 같다. 용재 오닐의 마지막 인사말이 떠올랐다. 그는 어설픈 한국어 솜씨로 이렇게 말했다. "10월에 또 만나요." 나는 적어도 10월까지는 계속 클래식 음악을 들을 것 같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뒷 표지에 받은 사인
▲ 리처드 용재 오닐 사인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뒷 표지에 받은 사인
ⓒ 황보름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2015년 6월 30일, 앙상블 디토의 시즌 9 마지막 콘서트 '슈페트리올로지'에 갔었습니다. 좋았습니다.



태그:#리처드 용재 오닐 , #앙상블 디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