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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오후, SNS 상에선 어지간히 기이한 기사 예고가 떠돌아 다녔다. 하물며 '세계가 주목할 특종'이라니. SNS에선 '디스패치가 또 한 건 했나'에서부터 '세계적인 연예인 열애면 또 누군가'로 살짝 들썩였다. 내용인즉슨 이랬다.

"독자 여러분이 궁금해 하는 그 사실을 <더팩트>가 확인했다!
2일 오전 열시에 공개될 특종은...무엇일까요?
[단독 예고] 세계가 주목할 만한 특종, 더팩트가 확인했습니다."

뒤이어 2일 오전 공개된 그 특종, "이건희 회장 병상 투혼 포착"이란 이름을 달고 나왔더랬다. SNS 상에선 '더팩트세계특종'이란 말머리도 달렸다. 초특급 스타의 열애나 결혼 그게 아니더라도 범죄행위 보도라도 될 줄 알았던 다수 누리꾼들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분위기다. 기사를 직접 보면, 그런 실망의 정당성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더팩트>의 삼성 이건희 회장 병상 보도 중.
 <더팩트>의 삼성 이건희 회장 병상 보도 중.
ⓒ 더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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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 호흡' 최초 확인, 사망설은 '헛소문'"
"이 회장 '와병 1년', 최근에는 '옹알이'도 한다"
"'사실'을 가린 '헛소문', 루머와 진실은?"
"주식시장을 요동치게 한 건강 악화 루머의 실체"

<더팩트>가 강조한 이건희 회장 관련 '세계 특종' 기사들의 제목과 부제들이다. 호들갑도 이런 호들갑이 없다. 무려 4편으로 쪼개진 기사들을 두 눈으로 확인하면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기사로서의 가치는 둘째 치고, "<더팩트>의 특종"을 강조한 대목들이 도드라져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대략 요약하면 이 정도쯤 될까.

'이건희 회장이 와병 중인 삼성의료원 20층 VIP 병실 사진을 멀리서 찍었더니, 그가 산소 호흡기를 사용하지 않고 옹알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삼성 관계자들도 들락날락 하더라. 따라서, '이건희 회장 사망설'은 오보고 '찌라시'들은 헛소문이다. 우리가 사진도 찍었다. 그럼으로, 삼성 주식이 떨어질 일은 없어야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진'이다. 화질이 지극히 떨어져 보이는 몇 장의 사진들이 바로 <더팩트>가 강조하는 '진실'과 '실체'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단순명료한 사실보도를 두고 <더팩트>는 구구절절 사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단순하고 빈약한 팩트를 채우기 위해 이름 모를 배우(?)들이 등장한다.

삼성그룹 최지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의 경우 자기도 모르게 사진이 찍히고 소환당한 인물이다. 반면, 이건희 회장은 옹알이 중이니 변명도 못하는 상황. 더욱이 내용의 보강을 위한 "'이승엽 홈런에 반응? 치료 차원 프로야구 'ON'" 시리즈 기사에는 지난달 21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KBO 리그 삼성과 두산의 경기를 관람한 삼성 이재용 부회장과 홍라희 관장이 사진과 함께 출연(?)했다.

이들은 '삼성가' 사람이라고 치자. "이건희가 살아있다"는 '세계특종'을 위해 다수의 전문가(?) 등장한다. 익명을 요구한 모 대학병원 흉부외과 전문의는 "이건희 회장은 현재 자발 호흡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해주며, 한 종합병원 전문의는 "'옹알이'와 같은 일정한 소리를 내는 것(중략)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판단 해준다.

증권가 관계자도 등장해 "이 회장의 부재가 장기화하면서 증권가를 중심으로 삼성의 후계 구도는 물론 신병과 관련한 근거 없는 소문들이 나돌고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멘트를 날린다. 뒤이어 삼성 측 한 관계자, 재계 관계자, 익명을 요구한 한 10대 그룹 관계자, 한 대학 병원 관계자가 줄줄이 불려 나왔다. 심지어 한 대기업 한 홍보 담당자는 "더팩트가 그 모습을 렌즈에 담았다면 당분간 위독설은 설 땅을 잃을 것"이라고 전망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여러 인물의 목소리를 다채롭게 담는 문학 속 '다성성' 기법이 쓰인 것도 같다.  또 기사만 놓고 보면, 난데없이 사진이 찍혀 '무사 건강'을 인증 받은 이건희 회장과 그의 건강 여부를 걱정하는 논조는 마치 북한의 조선중앙TV가 국방위원장의 그것을 걱정하는 태도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이러한 빈껍데기 같은 기사에 큰 반향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이럴 때야말로 독자들의 반응이 중요해지는 법이다.

"20층 병실 창문 밖에서 찍은 사진, 드론 촬영이에요?"

기사에 대한 반응은 싸늘했다. "병실이 20층이라는데 창문 밖에서 찍은 걸로 보아 드론 촬영인 듯"(@in***)에서부터 "‏더 팩트가 이름에 팩트 끼워 넣었다고 팩트만 보도한다고 믿는 거예요 지금?"(@oh******) 등 "특종에 강한 신개념 종합지"란 제호가 무색할 만큼 무시를 당해야 했다. 하물며, <더팩트> 공식 페이스북에서 사진 정보로 조롱하는 사용자까지 있을 정도였다.

삼성 측의 반응 역시 건조했다. 이준 삼성 미래전략실 커뮤니케이션팀장(부사장)은 3일 수요사장단회의 이후 브리핑을 통해 초상권 침해에 대한 법적 문제를 검토를 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회장의 상태는 이미 삼성 측에서 밝힌 것과 같이 "안정적인 상태를 회복"했고, "지속적으로 재활훈련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한 마디로, '다를 것 없음'이다.

병원 근처 아파트 옥상에서 촬영한 듯한 사진 몇 장. <더팩트>가 그리도 강조한 '팩트'다. 사진을 확보한 뒤 덧붙여진 소설과도 같은 작문들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이러한 기사가 위험한 것은 자사의 이익과 결부할 때다. <더팩트>는 자사 기사를 통해 "지난해 7월 1일 전신인 스포츠서울닷컴에서 서비스 브랜드를 변경했으며 스포츠 연예에 국한된 취재 영역을 정치 경제 사회 등 전 분야로 확장"했다고 밝히고 있다.

신생 매체가 자사 브랜드를 띄우는 제일의 방법이 바로 자극적이고 독한 '특종'이다. <더팩트>가 그리도 삼성과 국내 주식시장을 걱정하는 이유도 짐작이 가지 않는 바는 아니다. 매체 생존을 위해 경제 분야까지 영향을 미쳐야 하는 숙명 앞에서 '삼성 이건희'란 '야마'는 지극히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이미 연예보도를 통해 '파파라치' 기법은 익숙했던 터. 그러거나 말거나, <더팩트>는 기사를 통해 이렇게 밝히고 나섰다.

"언론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는 뉴스 메이커와 세상의 일에 대해 검증하는 것이다. 기자는 의문이나 의혹이 제기되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책임 방기다. 그러므로 기자는 "사실이다, 아니다"는 명확한 증거가 나올 때까지 파헤칠 수밖에 없다. <더팩트>는 반복적으로 돌고 있는 이건희 회장의 건강 관련 루머를 집중적으로 파헤쳐 현재 건강 상태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진을 카메라에 담았다."

피로해진 파파라치 저널리즘, 확산 경계해야

인터넷 매체 <더팩트>의 보도 중 일부.
 인터넷 매체 <더팩트>의 보도 중 일부.
ⓒ 더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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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수는 파파라초이다. 그 이름은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가 만든 <달콤한 생활>에 등장한 신문사의 카메라맨에서 유래하는데, 이탈리아어로 파리처럼 웽웽거리며 달려드는 벌레를 말한다."

'파파라치'의 어원이다. 이미 <디스패치>를 통해 자의든 타의든 친숙해진 이 파파라치 저널리즘 혹은 스토킹 저널리즘이 이제 영역을 확장하는 중으로 봐야할까. 심지어 당당하게 '세계특종'을 운운하고 나섰으니 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삼성의 세계적인 위상에도 불구하고 <더팩트>의 이 특종을 인용한 저명한 외신은 단 한 곳도 없었다.

포털 집중화로 귀결되는 언론 생태계의 변화에서 가장 피로한 대목 중 하나가 바로 이 파파라치 저널리즘일 것이다. (공인이 아닌)유명인이라는 이유로 촬영에 동의하지 않은 사진들로 인해 '강제 특종' 기사에 등장해야 하는 이들은 얼마나 억울한가. 무엇보다 원칙적으로 보호해야 할 '사생활 보호'의 의무는 왜 지키지 않는가.

이건희 회장의 병실 사진이 '알권리'에 해당하지 않는 다는 사실은 이미 독자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그 사진이 '자사의 이익'에 부합할 뿐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부디, 이러한 행태들이 또다른 매체로까지 번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의미로, 한국사진기자협회의 윤리규정 중 <더팩트>가 참고할 만한 대목을 골라 드리는 바이다. 이중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대목은 '소속된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사실을 조작하거나 취재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다'가 아닐까.
 
"우리는 모든 국민이 알아야 할 진실을 밝히고 불의와 부정에 대한 감시자로서 일하며 권력 등에 의한 인권침해를 파헤친다.
우리는 편향적으로 취재하거나 보도하지 않으며 소속된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사실을 조작하거나 취재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다.
우리는 공적인 이익을 위한 사안을 제외하고 개인의 명예와 사생활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사진취재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잘못 보도한 것이 확인 됐을 때 이를 솔직히 인정하고 바로 잡는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태그:#이건희, #더팩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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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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