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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구미 채미정에 다녀왔다. 금오산에 자리 잡은 채미정은 야은 길재를 기리기 위해 영조시대(1768년)에 만든 정자이다. 길재(1353-1419)가 살았던 시기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시대이다. 길재는 고려말 당시 목은 이색와 포은 정몽주의 학맥을 잇는 성리학자였다. 길재의 호는 야은 또는 금오산인이다. 호에서 뜻하는 바처럼 금오산에서 은거한 학자이다.

야은 길재가 고려의 수도 개경을 여정하면서 쓴 시
▲ 회고비 야은 길재가 고려의 수도 개경을 여정하면서 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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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고려가 망하자 선산(예전 구미의 이름)으로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길재는 어린시절 선산에 위치한 도리사에서 글을 배웠다고 한다. 길재는 1383년(공민왕 23년)에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1388년(우왕 14년) 성균관 박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1389년 문하주서가 되었지만, 고려가 망할 기운을 보이자 사직하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갔다.

채미정의 한자를 풀어 쓰면 채(採)는 캐다의 뜻이며, 미(薇)는 고사리와 같은 풀을 의미한다. 

조선시대 영조시대에 야은 길재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정자
▲ 채미정 조선시대 영조시대에 야은 길재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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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정 이름은 사기 열전에 나오는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에서 주나라로 왕조가 교체되자 주나라의 곡식을 먹기를 거부했다. 수양산에 몸을 숨기고 고사리를 캐먹고 지내다가 굶어죽었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충절을 지킨 의인들을 일컫는 표현으로 종종 사용된다. 

금오산에서 내려오는 계곡을 지나 흥기문을 지나면 우측에 채미정이 있고 좌측에는 구인재가 있다.

흥기문은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 나오는 문구이다. 맹자가 백이의 행동을 "백대 후에도 듣는 이에게 감동을 일으키노라(百世之下聞者 莫不興起也)"라고 한 문장에서 따온 이름이다.

맹자의 진심장에 나오는 문구
▲ 흥기문 맹자의 진심장에 나오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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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에 나오는 문구
▲ 구인재 논어에 나오는 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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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재는 논어에 나오는 문구이다. 이 글은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백이와 숙제가 어떤 사람들인가라고 물으니, 공자가 답하기를 백이와 숙제는  "인을 추구하여 인을 얻었으니 무엇을 후회하겠느냐(求仁而得仁又何怨)"라고 평했다고 한다. 이처럼 맹자와 공자가 백이와 숙제를 칭송한 글에서 길재를 기리기 위한 정자에 이름들을 붙였다.

숙종의 글씨와 길재의 영정이 있다.
▲ 경모각 숙종의 글씨와 길재의 영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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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정 뒤에는 경모각이 있다. 경모각에는 숙종의 직접 쓴 오언절구와 길재의 영정이 보존되어 있다.

길재의 묘와 그를 제향한 서원과 비문은 현재 구미시 오태동에 위치해있다. 1587년(선조 20년) 인동현감으로 부임한 류운룡은 길재 선생의 묘를 찾아서 동쪽 기슭에 사당을 세우고, 그 아래에 충효당과 두 칸짜리 방을 지어 오산서원을 건립했다.

오산서원에는 지주중류비 비석이 세워져있다. 지주중류비는 중국에 있는 백이와 숙제의 사당에 새겨진 비문이다. 비의 앞면에는 "지주중류(砥柱中流)" 문구는 중국에 있는 비문의 글씨를 탁본해 온 것이다. 여기서 '지주'는 중국의 황하강에 있는 기둥처럼 생긴 돌산이다. 지주중류는 황하강에 있는 지주산 처럼 혼탁한 물 가운데 있으면서도 지조를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의 뒷면에는 류성룡이 쓴 '야은 선생 지주비 음기'(冶隱先生砥柱碑陰記)가 음각되어 있다. 류성룡은 비문에 앞 부분에 길자 선생의 묘를 크게 고치면서라고 시작하고 있다. 공자, 맹자, 장자, 노자, 한비자처럼 성현에게만 붙이는 '자(子)'자를 길재에게 붙인 것이다.
류성룡은 비석에 길재의 공덕을 아래와 같이 새겼다.

금오산에 무엇이 있는가
(烏山兮何有)
쓸쓸한 언덕에 한 줌 흙은 선생의 유택이라네
(有紀兮有堂)
낙동강물 돌아 흐르니
(洛水兮沄沄)
그 흐름 크고도 길구나
(其流兮孔長)
한줌의 흙 거친 언덕이여
(一盃兮荒原)
오직 선생의 무덤이로다
(維先生之藏)
돌을 깎아 글을 새김이여
(斲石兮鐫辭)
만년을 두고 빛을 밝히리라
(垂萬載兮耿光)
충을 생각하고 효심을 일깨워
(課忠兮責孝)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 무궁하리 
(惠我人兮無疆)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조정에서는 길재에게 태상박사의 벼슬을 내렸다. 하지만 길재는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면서 이를 거절하고 후학의 양성에만 힘썼다. 특히 길재는 수신서인 소학을 강조했다. 그는 주자의 교육지침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학의 배움을 중요하게 여기며,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자세를 중요하게 여겼다. 고향에서 길재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수제자는 김숙자이다. 김숙자는 그의 아들 김종직에게 길재의 학문을 잇게 하였다. 김종직의 제자로는 정여창, 김굉필, 김일손과 같은 사림세력의 핵심인물들이다.

구미에는 길재를 기리는 오산서원과 길재와 김종직을 기리는 금오서원 그리고 김숙자를 기리는 낙봉서원이 있다. 야은 길재는 조선시대 성리학을 중요시 여긴 사림세력의 정신적 스승이자 근원이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http://hunlaw.tistory.com)에 같이 올린 기사입니다.



태그:#채미정, #금오산, #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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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힘이 되는 생활 헌법(좋은땅 출판사) 저자, 헌법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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