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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 평전> 표지
 <비트겐슈타인 평전> 표지
ⓒ 필로소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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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과 김대리

한 평전의 훌륭함은 그 대상이 되는 인간의 품성의 완전성이나 지능의 탁월함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적어도 평전의 세계에서 씌어지는 인생 자체의 본체는 모두 같은 값이다. 이건희의 평전보다 평생 삼성전자 말단 사원 이상의 자리에 올라가지 못한 김대리의 평전이 더 훌륭할 수 있다. 전적으로 선택과 주조의 문제다. 인생의 어느 부분을 선택하여 어떻게 홀로 설 수 있는 하나의 작품으로 변환시킬까 하는 문제. 그리하여 평전은 그 무엇보다 예술의 영역에서 속해 있고 문학 이상으로 문학적인 장르다.

쓸데없는 수사는 걷어치우고 곧장 말해서, 레이 몽크의 <비트겐슈타인 평전>은 전기문학으로서 최상급이다. 더구나 '비트겐슈타인'의 평전임을 기억하자.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삶을 극단까지 몰아붙이는 무자비한 잔혹함으로 철학 바깥 영역에서(철학 안은 물론) 니체 이상의 아우라를 내뿜고 있는 철학자다.

평범한 독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의 매혹적인 인생에 이끌려 그의 철학을 알고자 하지만 대부분 한 글자도 이해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진다. 반대로 철학계 내부의 사람들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의 비트겐슈타인의 삶에 대해선 별다른 관심이 없다. 그 전모를 드러내는 건 철학자의 역할이 아니니깐.

삶을 서술하고 철학을 서술하기

바로 이러한 간극을 메우는 것이 레이 몽크가 그의 서문에서 밝힌 대로 이 평전의 최대 목표일 터. 레이 몽크가 이 평전 서술에서 항상 주지하는 건 항상 비트겐슈타인의 삶과 철학의 밀접한 상관관계다. 대부분의 평전 작가가 빠지기 쉬운 함정. 한 인간의 생애와 사상을 따로 떨어뜨려 서술하는 실수가 이 책엔 없다.

물론 다른 평전 작가들도 삶과 사상이 하나의 본체에서 나온, 원래는 하나라는 점을 의식한다. 그래서 먼저 삶을 서술하고 그 다음에 사상을 설명한 다음, 이런 삶 때문에 이런 사상이 나왔다고 설명한다. 마치 시간차를 두고 삶과 사상이 번갈아 가면서 한 인간의 전면에 나타나 사이 좋게 영향을 주고받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아니, 삶과 사상은 이런 식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 평전에선 비트겐슈타인의 삶과 사상은 항상 동시에 쓰여진다. 비트겐슈타인의 삶에 관한 몽크의 서술은 곧장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서술로 섞여 들어간다. 이걸 의식하는 순간, 다시 비트겐슈타인의 삶이 쓰여진다. 바로 이 둘 사이의 구분을 계속무화시키는 서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했다는 것. 이게 레이 몽크가 해낸 훌륭하디 훌륭한 작업이다.

문학으로서의 삶, 평전

레이 몽크만 한 재능은 극히 드물다. 현재 사우스햄프턴 철학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데, 그런 따분한 직업은 그만두고 몽크 자신의 재능을 오로지 전기문학에만 쏟길 간절히 부탁하고 싶을 정도다. 내게 이 평전은 리차드 앨먼의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탁월한 예술로서의 평전을 인식하게 한 책이다. 아름답고 완벽하고 드문 책이며 무엇보다, 문학이다.

덧붙이는 글 | <비트겐슈타인 평전>, (레이 몽크 지음 / 남기창 옮김 / 필로소픽 펴냄 / 2012년 12월 / 3만6천원)



비트겐슈타인 평전 - 천재의 의무

레이 몽크 지음, 남기창 옮김, 필로소픽(2012)


태그:#비트겐슈타인, #철학, #논리, #평전, #필로소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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