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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을 맞아 철거되는 국세청 별관 건물(맨앞 가운데 하얀 건물). 왼쪽은 덕수궁, 오른쪽은 서울시의회, 뒤는 성공회서울대성당에 둘러싸여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철거되는 국세청 별관 건물(맨앞 가운데 하얀 건물). 왼쪽은 덕수궁, 오른쪽은 서울시의회, 뒤는 성공회서울대성당에 둘러싸여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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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잔재' 국세청 별관 78년 만에 철거된다
일제가 세운 국세청 별관 철거 후 시민 품으로.

서울시가 덕수궁 옆의 한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시민광장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지난 11일 뜬 기사의 제목들이다. '일제의 잔재인'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를 '시민들에게 돌려준다'는 내용이다.

궁금증이 생겼다. 국세청 별관이라... 생소한 이름이다. 과연 어디서 뭐하던 건물이기에, 갑자기 나타나 세간의 반짝 관심을 받고 바로 사라지게 됐을까.

주변 사람들에게 '국세청 별관'에 대해 들어본 적 있냐고 물어봤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건물이 있었냐"는 반응이다. 서울시의회와 덕수궁 사이에 있는 하얀 빌딩이라고 보충 설명을 해주자, 겨우 "아 그 건물!"이라면서도 "그게 국세청 별관이었냐?"고 되묻기 일쑤였다. 한 번에 안다고 대답한 사람은 수년 간 국세청을 출입해온 <오마이뉴스> 경제부 기자가 유일했다.

이 건물이 위치한 '세종대로'를 위키백과에 쳐보면 '주요 기관 및 시설' 항목에 정부서울청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주한미국대사관, 세종문화회관, 현대해상화재보험, 일민미술관, 동아미디어센터, 한국프레스센터, 서울특별시청, 덕수궁, 갤러리아백화점, 삼성그룹, 숭례문, SK플래닛, 서울상공회의소, YTN본사(지금은 상암동으로 이사) 등이 나온다.

그러나 이미 이사 간 회사까지 친절하게 남겨놓은 목록에 엄연하게 존재하는 78년 전통의 건물은 없는 것이다.

당초 일제 체신부 건물... 독일식으로 한껏 멋내

국세청 별관이 훼손되기 이전 모습. 전면 개관 당시부터 있었던 현관이 그대로 있고, 벽 색깔이 지금과 달리 갈색이었던 것이 확인된다.
 국세청 별관이 훼손되기 이전 모습. 전면 개관 당시부터 있었던 현관이 그대로 있고, 벽 색깔이 지금과 달리 갈색이었던 것이 확인된다.
ⓒ 한국디자인진흥원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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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치, 경제, 언론, 외교의 대표 기관들이 모여있는 장소에 있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거의 존재도 모르는 건물, '국세청 별관'은 과연 어떤 건물일까.

광화문 앞길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세종대로에서 볼 때 서울시의회 건물과 덕수궁 사이에 흰색 건물이 있다. 한 건물처럼 보이지만 실은 일제 때 지어진 구관(4층)과 1978년 증축된 신관(6층)이 합쳐진 것이다. 정식 이름은 '국세청남대문별관'.

김정동 목원대 교수가 <건축사> 협회지(1988.11)에 기고한 '한국근대건축의 재조명 - 체신부 청사'를 보면, 이 건물은 1935년 착공되어 일본제국주의가 한창 중일전쟁으로 치닫고 있던 1937년 6월 완공된다.

총독부 체신국이 설계자인 만큼 건물이 세워졌을 당시의 건물명은 '조선체신사업회관'이었다. 대지면적 549.1평에 연면적 771.7평 규모로, 지하 1층 지상 4층의 철근콘크리트조와 벽돌을 병용했다. 독일의 유명한 조형학교 바우하우스 교사의 모습과 비슷했다고 하니 당시만 해도 한껏 멋을 낸 건물이었던 셈이다.

김정동 교수는 위 글에서 "균형미가 돋보이며, 같은 볼륨의 직사각형을 수직, 수평으로 둠으로써 안정감을 더하고 있다"고 평했다. 지금은 외벽이 흰색 건물이지만 당시만 해도 갈색타일과 녹담(綠淡)갈색타일로 발라 전체적으로 짙은 갈색조를 띠었다고 한다.

건물에는 체신박물관과 보험건강상담소 등을 두고 체신 관계자들을 위한 복지·휴식시설을 구비했고, 특히 4층에는 양식 침대방과 일본식 다다미방을 갖춘 숙박실이 있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당시 체신부와 철도청 공무원들은 부자이면서도 고위급이었는데, 이들이 조선에 오면 이곳에 묵었다"며 "여기 투숙하면서 덕수궁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던 일본 관계자들의 오만스런 야욕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고 말했다.

국세청 별관 개관 당시 맨 위층에는 일본식과 양식의 숙박실이 구비돼 조선에 온 체신부와 철도청 고위 관리들이 묵었다고 한다.
 국세청 별관 개관 당시 맨 위층에는 일본식과 양식의 숙박실이 구비돼 조선에 온 체신부와 철도청 고위 관리들이 묵었다고 한다.
ⓒ <朝鮮と 建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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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친왕 생모 엄비의 사당 자리... 해방후 증축 과정서 원형 훼손

사실 이곳은 원래 덕수궁에 속해 있던 자리이다. 고종의 후궁이자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생모인 귀비 엄씨가 1911년 죽자 이 곳이 그의 사당인 덕안궁이 됐다. 1929년 종로구 궁정동에 있는 육상궁(후에 칠궁)에 합사되자 덕안궁은 폐해졌다.

그 주변엔 엄비의 과수원과 도살장, 제용구(祭用具)의 소장장(所藏場) 등이 있었으며, 현재의 서울시의회(예전 부민관)과 <조선일보> 자리도 모두 덕안궁이었다고 한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내부는 모두 뜯겨져나갔고, 대한민국 체신부가 이어 사용해오다 1980년 태평로 확장으로 도로에 접한 전면부가 잘려나가면서 건물의 원형이 크게 훼손돼 버렸다. 또 1978년 서울시의회 쪽으로 증축된 신관은 구관으로 건너가기도 힘들게 지어지는 등 구관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평이다. 해방 이후 전쟁과 도시정비 등으로 원형을 알아볼 없게 된 서울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하다.

이후 국세청 세무서, 체신부 환금관리소 등이 들어섰다가 최근에는 국세청 남대문별관으로 사용되었고 지난 2월 국세청 직원들이 모두 수송동 본관으로 이사를 마친 상태다.

서울시는 과거 조선체신사업회관으로 사용됐던 건물의 기둥 또는 벽면 일부를 기념물로 남기고 이 자리에 역사문화광장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지하실도 서울시청 시민청 공간과 연계하여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철거 찬반론 "보존가치 잃었다" vs. "우리의 문화 유산"

서울시가 국세청 별관을 허물고 그 자리에 조성하려고 하는 시민문화공간 조감도.
 서울시가 국세청 별관을 허물고 그 자리에 조성하려고 하는 시민문화공간 조감도.
ⓒ 서울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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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이달부터 건물 철거에 들어가 올해 70주년 광복절에 기념행사를 갖는다.

이제원 서울시 도시재생본부장은 "이번 사업을 통해 일제에 훼손된 덕수궁의 정기와 대한제국의 숨결을 회복하고 세종대로 일대 역사성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사업이 완료되면 비교적 근대 서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서울시의회-서울도서관-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의 모습을 세종대로에서 한눈에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덕수궁과 정동 일대 근대 건축물을 많이 연구해온 김정동 교수는 "오래된 건축물을 되도록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주로 펴왔지만, 국세청 별관 건물은 원형이 너무 많이 훼손돼 보존가치를 잃었다"며 "그 건물의 유지보다는 덕수궁을 확대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오래된 문화유산'의 철거를 아쉬워하고 반대하는 목소리도 높다.

황평우 은평역사한옥박물관 관장은 "일제의 잔재라고 하지만 그것을 보며 우리의 잘못을 반성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느냐"며 "공론화를 통해 건물의 가치를 좀 더 신중히 따져봐야 하는데, 서울시가 총독부청사 허물 때처럼 너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트위터 '‏@yocla14'는 "해당 건물이 철거되서는 안 될 유일무이의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면서도 "하지만 '일제 잔재'와 같은 하나마나한 가치 판단이 담긴 용어들이 난무하면서 이 건물이 허물어지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시 트위터 '@RohanJung'도 "조선체신사업회관의 저 멋진 모습을 우악스레 페인트로 발라버리고 맘대로 외관을 뜯어고치더니 이젠 철거까지 하려한다"며 "일본이라면 철저한 고증을 통해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키고 조선의 체신사업이 태동했던 소중한 역사를 간직한 박물관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이미 시작된 철거... 잘 가라, 국세청 별관

국세청 별관 앞에 쌓인 철거용 도구들. 국세청 별관은 이달부터 이미 철거에 들어가 광복절 이전에 마무리된다.
 국세청 별관 앞에 쌓인 철거용 도구들. 국세청 별관은 이달부터 이미 철거에 들어가 광복절 이전에 마무리된다.
ⓒ 김경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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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철거되기 전 마지막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국세청 별관 건물을 찾아가봤다. 그러나 웬걸, 벌써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입구에는 공사 안내판과 함께 셔터가 내려져 있고, 밖에는 각종 철거용 공구와 도구들이 쌓여있었다. 건물 안에서는 인부들이 내부 집기와 시설물들을 정리하는 소음이 들렸고, 뒤쪽에는 공사 가림막이 설치돼 건물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도 없었다. 들어가 내부를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때마침 영국대사관이 점하고 있어서 단절됐던 덕수궁 돌담길 일부를 131년 만에 다시 잇는다는 보도가 나왔다. 국세청 별관 건물을 허물어 덕수궁의 '정기'를 되찾아주겠다는 의지의 일환이리라.

'일제잔재'이며 보존가치까지 상실한 건물을 부수고 우리의 역사를 되찾겠다는 뜻에 무슨 반대가 있으랴. 그러나 대한민국 한가운데서 한국전쟁, 4·19, 5·16, 6월항쟁, 한일월드컵 등 파란만장한 역사를 고스란히 지켜봤을 존재에게 잘 가란 인사 한 마디 없이 그냥 보내기는 너무 아쉽고 미안하다.

"잘 가라, 국세청 별관!"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국세청 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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