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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직후 살아남은 여학생이 자신이 살았던 집을 찾아왔지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기무라씨의 설명에 의하면 검게 타죽은 시체가 아버지였을 거란다.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직후 살아남은 여학생이 자신이 살았던 집을 찾아왔지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기무라씨의 설명에 의하면 검게 타죽은 시체가 아버지였을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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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모어 나가사키, 노 모어 워.(No More Nagasaki, No More War.)"

작년 8월 9일, 나가사키 시장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터진 지 69년이 된 그날, 평화를 염원하는 전 세계인들을 향해 '나가사키 평화선언'을 하면서 한 말이다.

나가사키 범선 축제에 참가한 일행과 함께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을 방문했다. 일행을 안내한 분은 백제인의 후손이라며 한국말을 잘하는 기무라(72)씨다.

올 8월 9일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하늘에서 떨어진 원자폭탄에 의해, 집들은 날아가고 화염에 휩싸여 까맣게 탄 시체들이 흩어져 있는 거리를 수많은 시민이 갈팡질팡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중심지
 원자폭탄이 떨어진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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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열선과 폭풍, 방사선은 7만4천 명의 소중한 목숨을 앗아가고 7만5천 명의 부상자를 냈다. 또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지금도 아물지 않는 깊은 상처를 냈다. 지금도 세계에는 1만6천 발 이상의 핵탄두가 존재한다. 핵무기의 공포를 직접 체험한 피폭자는 두 번 다시 핵무기를 사용해선 안 된다고 외친다.

작년 2월 멕시코에서 열린 '핵무기 비인도성에 관한 국제회의'에서는 146개국 대표가 인체와 경제, 환경, 기후변동 등 다양한 시점에서 핵무기가 얼마나 비인도적인 무기인가를 분명히 했다.

북한의 핵무장과 아베정권의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논의로 전쟁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원자폭탄을 경험한 나가사키 시민들은 '더 이상 전쟁을 하지 말자, 나가사키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반전운동을 하고 있다.

운명의 그날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모든 게 멈춰버렸다

원자폭탄은 핵분열성 물질(풀루토늄 등)이 핵분열을 일으킬 때 발생되는 에너지를 무기로 이용한 것으로 통상적 폭탄에 비해 훨씬 큰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핵분열을 일으킬 때 발생되는 감마선이나 중성자선과 같은 방사선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인체에 심각한 장애를 가져온다.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길이 3.25m, 직경 1.52m, 무게 4.5톤으로 그 생긴 모양 때문에 패트맨이라고 불렀다. 폭발했을 당시 고성능 폭약 21㎏에 해당하는 에너지가 방출됐다. 에너지의 내역은 폭풍이 약 50%, 열선이 약 35%, 방사선이 약 15%로 이러한 것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나가사키 거리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원폭 당시 고열로 녹아내린 유리에 손뼈가 붙어있다
 원폭 당시 고열로 녹아내린 유리에 손뼈가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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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폭기념관 입구 정면에는 피폭 전의 나가사키 거리와 시민들의 생활상이 전시되어 있고, 이어서 원폭이 투하되었을 때 발생한 버섯구름 영상과 우라카미 지구를 중심으로 나가사키 거리가 순식간에 파괴되었음을 말해주는, 11시 2분을 가리킨 채 멈춘 시계가 전시되어 있다.

D관까지 있는 추도평화기념관의 C관에는 '핵무기가 없는 세상을 위하여'라는 주제의 사진과 글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핵무기 개발의 역사와 전후의 국제정세, 세계의 반핵운동 등을 연대순으로 전시하고 있다.

평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이 종이학을 접어 '평화'라는 글귀를 적어 넣었다
 평화를 염원하는 시민들이 종이학을 접어 '평화'라는 글귀를 적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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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핵무기 개발에 관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현대의 핵무기는 소형화되고 정확도도 증가하고 있다. 눈에 띄는 건 핵무기 보유국에 북한이 추가되어 있다는 것이다.

원폭자료관을 나와 원폭낙하 중심지로 가던 길에 길가에 조그만 비석이 하나 있었다. 이른바 나가사키 원폭희생자 조선인 추모비였다. 눈에 잘 띄지 않아 지나칠 뻔했는데 기무라씨가 안내를 한다.

그 옆에는 삐뚤빼뚤한 한글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조선인 추모비이니 당연히 재일교포들이 세운 비석인 줄 알았는데 이름 모를 일본인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비석을 세웠다고 적혀 있다. 일본에도 기무라씨와 같은 양심 있는 일본지식인들이 있었다. 1979년 8월 9일 '나가사키 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회' 사람들이 비석에 기록한 내용이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옆에 있는 나가사키 원폭희생자 조선인 추모비. 일행을 안내한 기무라씨가 이효웅씨에게 비문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옆에 있는 나가사키 원폭희생자 조선인 추모비. 일행을 안내한 기무라씨가 이효웅씨에게 비문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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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 당시 일본에는 236만5263명의 조선인이 거주하고 있었다(내무성 경보국 자료). 나가사키현에도 7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나가사키시 주변에는 약 3만수천 명의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은 미쓰비시 계열의 조선소, 제강소, 전기, 병기공장, 도로, 방공호, 군수공장 등 토목공사장에서 강제노동을 당했다.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약 2만 명의 조선 사람들이 피폭당해 약 1만여 명이 폭사했다. 우리들 이름 없는 일본사람들이 얼마간의 돈을 모아 이곳 나가사키에서 비참한 생애를 보낸 1만여 명의 조선 사람을 위하여 이 추도비를 건설했다.

지난 시기 일본이 조선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그 민족을 강제로 끌고와 학대혹사하며 강제노동 끝에 비참하게도 원폭에 맞아 죽어간 전쟁책임을 그들에게 사과함과 동시에 이 세상에서 핵무기의 완전철폐와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염원하여 마지않는다."

원폭낙하 중심지를 지나 두 번 다시 전쟁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맹세와 세계평화에 대한 염원을 담은 평화공원으로 갔다. 원폭당시 형무소였던 이곳은 흔적이 사라지고 시멘트 기초만 남았다.

입구에 들어서자 '평화의 샘'이 보이고 일본어 몇 자가 적혀 있었다. 일본어를 모르는 나에게 기무라씨가 해석을 해줬다. 전쟁이 끝난 후 작문시간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당시 상황에 대해 쓰라는 담임선생님의 말을 듣고 썼다"는 9살 소녀의 글이다.

평화공원모습. 입구에는 평화의 샘이 보이고 "원폭당시를 회상해 글을 쓰라"는 담임선생님의 말을 듣고 9살난 소녀가 썼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목이 말라 견딜 수가 없어 기름이 떠있는 물을 마셨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평화공원모습. 입구에는 평화의 샘이 보이고 "원폭당시를 회상해 글을 쓰라"는 담임선생님의 말을 듣고 9살난 소녀가 썼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목이 말라 견딜 수가 없어 기름이 떠있는 물을 마셨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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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말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물이 마시고 싶어서 겨우 기름이 떠 있는대로 마셨다."

기무라씨가 1933년에 발간됐다는 <나가사키 일일신문> 기사 내용을 보여주며 설명을 해준다.

기무라씨의 설명에 의하면 평화공원이 있던 자리는 나가사키 형무소로 1933년에 독립운동을 하던 백정기 선생이 갇혀있다가 나가사키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고 한다. 기무라씨가 당시 발간된 신문을 보여줬다. 두건을 쓴 가운데가 독립운동가 백정기 선생의 모습이다
 기무라씨의 설명에 의하면 평화공원이 있던 자리는 나가사키 형무소로 1933년에 독립운동을 하던 백정기 선생이 갇혀있다가 나가사키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고 한다. 기무라씨가 당시 발간된 신문을 보여줬다. 두건을 쓴 가운데가 독립운동가 백정기 선생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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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을 안내한 기무라씨가 효창공원에 있는 독립의사묘에서 촬영했다는 묘지들로 왼쪽부터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선생의 묘가 보인다. 시신을 찾지 못한 묘에는 가묘를 썼다.
 일행을 안내한 기무라씨가 효창공원에 있는 독립의사묘에서 촬영했다는 묘지들로 왼쪽부터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선생의 묘가 보인다. 시신을 찾지 못한 묘에는 가묘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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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가 원폭 당시 형무소였는데 원자폭탄이 떨어지기 전인 1933년에 독립운동을 하던 백정기씨가 이곳에 끌려와 나가사키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당했다는 신문 내용입니다."

"효창공원 독립운동가 묘역에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묘가 나란히 있다"며 기무라씨가 사진을 보여줬다. 나보다 한국역사를 더 많이 공부하는 기무라씨를 보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공원 가운데에는 조각가 기타무라 세이보가 5년의 작업 기간을 거쳐 1955년 8월에 완성한 높이 9.7m의 평화기념상이 있다. 하늘을 향해 뻗은 오른손은 핵무기 위협이 없기를, 수평으로 뻗은 왼손은 평등과 평화를 지그시 감은 눈은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것이라고 한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나가사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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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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