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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아시아의 개고기와 당근김치- 타슈켄트
▲ [당신에게, 실크로드 24] 중앙아시아의 개고기와 당근김치- 타슈켄트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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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따 접시꽃!" 

그녀는 대문을 넘어서며 내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에따'는 러시아어로 '그것'을 뜻한다. 그녀는 러시아어와 한국어를 섞어 사용했다. '그거 접시꽃이야' 라는 뜻이다. 다시 살펴보니 접시꽃이다. 창피하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외곽의 백테미르 마을. 한인동포가 모여 사는 이곳은 '김병화  꼴호즈'로 불린다. 꼴호즈(Колхоз)는 집단농장이라는 뜻이다. 1937년 스탈린의 지시로 강제 이주당한 극동지역의 한인들이 모여 사는 이곳에는 한인이주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김병화 박물관이 있다. 일단 박물관에 가기 위해서는 박물관장을 맡고 있는 태 에밀리아 여사님을 먼저 만나야했다. 집 앞에 모시러 가서 기다리는데 우즈베키스탄 친구가 내게 묻는다.

"저 꽃이 한국의 국화(National flower)야?"

쳐다보니 담장 아래 분홍 꽃이 피어있다. 이 이역만리 떨어진 곳에서 무궁화를 키우시는구나. 어쩐지 감동해서 대답했다.

"응, 그래 바로 저 꽃이 대한민국 무궁화야."

마침 그걸 들은 태 여사님, 기가 막힌지 소리를 빽 지른 거다. 민망해하며 인사를 드렸다. 태 여사님은 어디서 무궁화랑 접시꽃이랑 구분도 못하는 한국인이 왔나 아래위로 살펴보시는 눈치다.

멀리서 보고 무궁화인줄 알았다.
▲ 문제의 접시꽃 멀리서 보고 무궁화인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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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슈켄트에서 김병화 박물관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단서는 오직 '벡테미르'라는 지명과 '카레이스키 콜호즈(한인 집단농장)'라는 단어뿐. 한인 마켓이나 한인 레스토랑 등을 돌면서 물어보았으나 다들 가는 법을 몰랐다.

우즈베키스탄 단체 여행을 주선하는 한국여행사에도 물어보았으나, 개별여행자는 갈 수 없다는 성의 없는 답변만 들었다. 타슈켄트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뜻밖에 이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벨라루스와 우즈베키스탄 친구들과 함께 이곳까지 왔다.

평소엔 문이 잠겨있으니 먼저 태 여사님을 만나야한다.
▲ 김병화 박물관 외부 평소엔 문이 잠겨있으니 먼저 태 여사님을 만나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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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은 아담한 단층 건물이다. 바깥에 한국어로 김병화 박물관이라 적혀있다. 태 여사님은 다시 날 보며 한마디 하신다. "저게 무궁화고." 김병화 선생의 흉상 앞에 더위에 시들시들해진 무궁화가 두 송이 남아 있었다. 아, 난 어째서 무궁화랑 접시꽃을 구분하지 못했나... 기가 죽는다. 박물관 주변엔 온통 푸른 목화밭이다. 이제 쌀농사는 거의 안 짓고 목화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황무지였던 이 곳을 푸른 녹지로 바꾼 사람들이 고려인들이었다.

러시아어가 모국어인 고려인

"여태 한국의 대단한 사람들은 죄 여기 왔다 갔어."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곳을 방문한 사진이 걸려있다. 당시 우즈베키스탄을 순방중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이 다녀갔냐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여행 시기는 2014년 7월이다).

"안 왔어. 온다고 전화는 왔는데 당일에 또 안 온다 하더라고."

박물관 안에는 김병화 선생의 초상화와 당시에 쓰던 책상, 농기구,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벽에는 1926년 극동 러시아 지역의 한인 수가 16만7400명이었다고 적혀 있었다.

"우리 고려인들이 연해주에 땅을 잘 해놨거든, 그거 뺏으려고 우릴 여기다 던져놓은 거지."

태 에밀리아 여사님은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척박한 연해주에서 정착과 개간에 성공한 고려인들의 땅을 뺏으려는 속셈이었다는 거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중국 북동부에서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수립됐다. 결국 긴장감을 느낀 소련정부는 '극동지방에 일본 첩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고려인을 강제 이주시키기로 결의한다. 외모만 봐서는 일본인인지 고려인인지 구분이 안 간다는 거다. 한편으로는 당시 중앙아시아의 대기근으로 인구수가 줄어 고려인의 우수한 영농기술과 노동력을 중앙아시아에 전파시키려는 속셈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37년 9월부터 11월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소련은 군대를 동원하여 17만 고려인들을 화물열차에 태우기 시작했다. 사유재산과 가축을 가져갈 수 있게 한다는 애초의 약속과 달리 옷가지 몇 벌만 겨우 챙긴 채였다. 기차가 한 달 동안 시베리아의 혹한을 달리는 동안 많은 이들이, 특히 아이와 노인들이 기근과 질병, 그리고 추위에 못 이겨 죽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 바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버려진 땅들이었다. 

초기 정착민의 집
▲ 사진 자료 초기 정착민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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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볍씨는 챙겨서 왔다는 사람들. 지역당국이 대책을 세웠음에도 숙소는 턱없이 부족했다. 허허벌판에서 토굴을 짓고 살면서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갈대를 베어 움막을 짓고, 맨손으로 수로를 팠다. 태 여사님은 이 수로를 '까날(canal)'이라고 했다. 물이 귀한 중앙아시아에서는 이 '까날'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단다. 이렇게 척박한 땅에서 3년은 풀만 먹으며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특유의 근면성실함과 영농기술은 빛을 발해 곧 뛰어난 실적을 올리게 된다. 그 중 이곳  '북극성' 집단농장의 농장장이었던 김병화 선생은 일생 한 번도 받기 힘들다는 '노력영웅' 칭호를 두 번이나 받았다. 1944년 우즈베키스탄 토지인민부 총괄보고서에는, 타쉬켄트 주의 한인 콜호즈는 관개수로망이 잘 형성되어 있어, 쌀은 일반생산량의 1.5~2배, 마는 2~3배까지 생산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쌀, 마, 그리고 목화가 주요 생산물이었고, 지금은 거의 목화밭이다.
▲ 북극성 농장에서 목화를 따는 고려인 노동자들 쌀, 마, 그리고 목화가 주요 생산물이었고, 지금은 거의 목화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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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소련 정부의 인정을 받고 안정기를 찾았지만 다시 시련이 왔다. 1991년 12월 소련 연방이 해체된 후, 우즈베키스탄 정부가 들어서며 민족주의가 대두되었던 것이다. 모든 공식적 언어는 우즈베키스탄어로 바뀌었다. 러시아어만 할 줄 아는 고려인들은 또다시 차별대우를 받게 된다.

그 후, 김병화 선생 이름을 딴 농장도, 학교도, 거리도 모두 사라졌다.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탈(脫) 소련' 정책 때문이다. 전성기에는 이곳에 1500여 명의 고려인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500여 명이 남아있다고 한다.

초상화 양 옆으로는 "이 땅에서 나는/새로운 조국을 찾았다"라고 적혀있다. 우즈베키스탄 친구가 읽어보더니 무슨 뜻이냐고 물어본다. 한국에 관심이 많은 이 친구는 간단한 한국어도 읽을 수 있었다. 한국어 발음도 꽤 좋았다. 그의 설명으로는 한국어와 우즈베키스탄어는 같은 우랄 알타이어계 어족이어서 그런지 한국어가 쉽게 느껴진다고 했다.

이 땅에서 나는 새로운 / 조국을 찾았다
▲ 김병화 초상화 이 땅에서 나는 새로운 / 조국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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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구소련 체제 붕괴 이후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 벨라루스 여행객과 담소 중인 태 여사님 1990년대 초반 구소련 체제 붕괴 이후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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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태 여사님은 한국어보다 러시아어가 편하다고 한다. 한국어는 자주 안 쓰다 보니 말하려면 땀이 난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그녀는 한국에서 온 나보다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 벨라루스 친구들과 대화하는 것이 더 편한 듯했다. 그들은 1991년 소련 체제 붕괴 후 각자의 나라에서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이 러시아어로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소외감을 느낀 채 혼자 박물관을 돌아봤다.

그렇게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나가려는데 여사님이 나만 따로 부른다.

"여기 봐. 여기 우리가 행사할 때 입는 한복이 있어."

그녀가 살짝 열어 보인 창고에는 한복 네 벌이 걸려있었다.

창고 안에  한복 네 벌이 걸려있었다.
▲ 김병화 박물관 창고 안 창고 안에 한복 네 벌이 걸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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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의 개고기와 당근김치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구소련 스타일의 화려한 지하철이 구도심과 신도심을 잇는다. 구도심에는 초르스 바자르와 하즈라티 이맘 광장이 있다. 하즈라티 이맘 모스크 앞에는 무이 무보락 메드레세가 있는데, 가장 오래된 이슬람 경전인 '우스만본'이 소장되어 있다. 신도심에는 아무르 티무르 공원을 중심으로 브로드웨이 거리, TV 타워, 호텔, 백화점 등 현대적 모습을 볼 수 있다.

푸른 돔의 나라 우즈베키스탄, 재래시장도 돔형이었다
▲ 초르수 바자르의 푸른 돔 푸른 돔의 나라 우즈베키스탄, 재래시장도 돔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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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을 가는 김태희는 만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아가씨는 많았다.
▲ 장인장모의 나라로 불리는 우즈베키스탄 밭을 가는 김태희는 만나지 못했지만 아름다운 아가씨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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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레스토랑과 잡화점도 많다. 단, 한국 사람이 하는 가게와 고려인이 하는 가게로 나뉜다. 레스토랑의 경우, 팔고 있는 메뉴가 미묘하게 다르다. 하루는 우즈베키스탄 친구가 물어봤다.

"너 여행하느라 지쳤지? 우리 고려인 식당에 가서 개고기 먹을까?"

순간 얼음이 되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개고기를 판다는 게 놀라운 건지, 무슬림인 친구가 개고기를 권하는 게 놀라운 건지 모르겠다. 물어보니 고려인이 운영하는 한국식당에는 보신탕과 수육이 있단다. 그리고 이슬람교도도 몸이 아플 때 개고기를 먹는 것은 예외라고 한다. 본인이 지금 머리가 아프고 기침을 하니 개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거다.

배추 김치는 없고, 오이김치, 당근김치, 버섯김치 등 김치 비슷한 것들이 있다.
▲ 고려인 반찬 가게 배추 김치는 없고, 오이김치, 당근김치, 버섯김치 등 김치 비슷한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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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좋게 서로 사진을 한 장씩 찍어 나눠 가졌다.
▲ 반찬가게 고려인 아가씨 사이좋게 서로 사진을 한 장씩 찍어 나눠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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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나다.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딱히 개고기를 반대하진 않지만 '다른 맛있는 고기도 많은데 굳이 개까지 먹어야하나.' 정도의 입장이다. 순간 갈등했다. 생애 최초의 개고기를 우즈베키스탄에서 먹을 것인가. 하지만 날이 더워도 너무 덥다. 이런 날 괜히 생소한 음식을 시도했다가 오히려 탈이 날 수도 있을 거 같아서 그만뒀다.

고려인 식당에서 내가 좋아했던 것은 '국시'였다. 육수에 소면을 만 냉국수인데, 고명으로는 고기와 오이, 김치 그리고 특이하게 러시아 요리에서 쓰이는 허브인 딜이 얹혀져있다. 한참 국시를 먹고 있는데 친구가 김치도 먹어보라고 권한다. 김치가 어디 있냐고 물어보자 그는 무생채처럼 생긴 당근샐러드를 가리켰다.

국수가 아니다. 차가운 육수에 국수를 말고 러시아 허브로 고명을 한 국시다.
▲ 고려인 레스토랑에 파는 국시 국수가 아니다. 차가운 육수에 국수를 말고 러시아 허브로 고명을 한 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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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당근샐러드잖아?"
"이게 당근 김치야. 그 전에 우즈베키스탄엔 없던 음식이야. 고려인들이 만들어서 먹기 시작했어."

정확한 명칭은 '마르콥 빠까레이스키(Морковь по-корейски)', '한국식 당근샐러드'란다. 한국에 있는 우즈베키스탄 레스토랑에서도 자주 시켜먹었었는데, 여태 러시아식 샐러드인줄 알고 있었다.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이 배추도 없고 무도 없는 이곳에서 당근을 김치처럼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하긴, 태 여사님도 이주 당시 풀 쪼가리란 풀 쪼가리는 다 절여서 먹었다고 했다. 당근 김치는 특이하게 기름기가 살짝 있다. 끓인 식용유를 넣는다고 한다. 하지만 느끼하지 않고 새콤한 맛이어서 입에 맞는다. 

당근김치. 특이하게도 새콤달콤한 맛이 난다. 느끼한 뽈로프(기름볶음밥)과 잘 어울린다.
▲ 이게 김치라고? 당근김치. 특이하게도 새콤달콤한 맛이 난다. 느끼한 뽈로프(기름볶음밥)과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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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강제이주의 역사였다. 짐승처럼 화물차에 던져지고 감자포대처럼 아무 곳에나 내려졌다. 말 그대로 맨손으로 시작해야 하는 삶이었다.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1937년 강제이주당한 소수민족 등 가장 빨리 러시아인으로 동화되었다는 평가를 듣는다. 지옥 같았던 강제이주와 스탈린의 민족 탄압에서 살아남기 위해한 생존법이었던 것이다.

브로드웨이(번화가)의 좌판에서  한국계 러시아인 가수 빅토르 최를 만났다.
▲ 빅토르 최의 흔적 브로드웨이(번화가)의 좌판에서 한국계 러시아인 가수 빅토르 최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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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이 나라에서도, 떠나온 나라에서도 이방인이다. 우리가 근현대의 내우외환을 극복하기 위해 '단일민족'이라는 상(想)을 만들어 쫓는 사이, 그들은 경계 밖의 존재들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어디 사람이냐 물으면, 그냥 '고려인'이라고 답한다고 한다.

지금도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유랑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이 마을의 젊은 고려인들은 모두 러시아로 떠났다고 했다. 태 여사님의 자녀는 모두 모스크바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이 부모를 만나기 위해 돌아갈 곳은 개고기와 당근김치가 있는 이곳 백테미르 마을일 것이다. 경계의 사람들, 고려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체성이었다.

붉은 색은 현재까지 이동경로이며 초록색은 현재 위치, 파란색은 앞으로 이동 예정입니다.
▲ 실크로드 루트 붉은 색은 현재까지 이동경로이며 초록색은 현재 위치, 파란색은 앞으로 이동 예정입니다.
ⓒ 구글 지도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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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

- 김병화 박물관 가는 법
꿀룩 (Kuyluk) 바자르에서 벡테미르(Bektemir) 혹은 카레이스키 콜호즈 (корейски колхоз)로 가 달라고 한다. 박물관 문은 보통 닫혀있으니, 미리 전화를 해두어야 한다. 관람료는 소정의 기부로 받는다(연락처 +998901786850 태 아멜리에).

- 현금 인출
우즈베키스탄 전역에 외국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현금인출기가 드물다. 은행에 가도 달러가 없거나, 고장 나 있는 경우가 많다. 타슈켄트의 4성급이상의 호텔에 현금인출기가 있으니 가능한 달러인출을 해두도록 하자. 타 지역으로 가면 ATM 찾기가 힘들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덧붙이는 글 | 2014년 4월부터 10월까지의 여행 중, 실크로드- 경주, 중국,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터키, 로마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동쪽과 서쪽을 잇는 실크로드의 과거 이야기와 현재 진행형 이야기입니다. 더불어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노처녀의 한풀이이기도 합니다. 실크로드에서 건져낸 이야기를 점과 점으로 이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에 또 하나의 실크로드가 그려졌으면 합니다.



태그:#실크로드,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고려인, #김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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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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