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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한국을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밥상도 '시스템'의 산물입니다. 이 시스템은 누가, 어떻게 결정할까요? 한국인의 끼니, 그 실체를 드러내고 오늘날의 음식문화 지형도 살펴봅니다. 궁극적으로는 한국 노동자들의 '행복한 밥상'이 어떻게 가능할지 그 대안적 접근법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노동자는 오늘 뭐 먹지?
 노동자는 오늘 뭐 먹지?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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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먹느냐'를 고민하는 시대의 도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다."

그렇다. 우리가 습관처럼 되뇌는 이 문장 속에 사실 모든 답이 있다. 인간이 힘겨운 노동을 감수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최저)임금을 위해 투쟁하는 것은 모두 먹고 살기 위한 발버둥이다.

한때는 끼니를 때우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던 적도 있다.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해야 했던 시절의 노동은 곧 '밥벌이'다. 나라님의 가장 큰 과제 또한 '먹고사니즘'이었다. 세종대왕은 '나라는 백성이 근본이고, 백성은 먹을 것이 하늘이다(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이후로도 <조선왕조실록>에 이 말이 여섯 차례나 더 나온다고 한다. 결국 백성의 끼니를 살피고, 굶는 백성이 없도록 하는 것이 왕의 역할이었던 셈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업적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통일벼'의 개발을 꼽는다. 1960년대까지 이 땅의 국민들에게는 쌀의 절대량이 부족했다. 박정희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로지 수확량에만 초점을 맞춘 벼 품종의 개발을 독려했다. 1971년 탄생한 통일벼는 기존 벼 품종 대비 40%나 높은 수확량을 자랑하며 '기적의 볍씨'로 불렸다. 덕분에 쌀 자급률이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보릿고개'라는 말도 점차 잊혀갔다.

하지만 맛은 없고 오로지 생산량만 많았던 통일벼는 그 유일한 장점 때문에 오히려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쌀 자급률이 높아지자 통일벼는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 1991년을 마지막으로 통일벼라는 품종은 이 땅의 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아마도 통일벼가 사라지던 그 즈음을 전후해서였을 거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사는 '먹느냐 못 먹느냐'에서 '무엇을 먹느냐'로 발전하게 된다. 비로소 잘 먹고, 제대로 먹는 것을 고민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바야흐로 먹는 문제에 있어 인간의 기본권이 보장되고 개인의 선택이 존중되는 신세계가 열리는 줄 알았다.

자본의 '화장발', 선택을 강요하다

그런데 웬걸! 배고픔이 사라지니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식품산업과 외식시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대기업이라는 자본이 적극적으로 끼어들기 시작했다. 식재료의 생산은 대량생산과 획일화라는 시스템의 지배가 시작된다. 우루과이라운드와 FTA 체결 등으로 외국의 자본과 수입 식재료까지 무차별적으로 상륙하기에 이른다.

자본은 염치가 없고 시스템은 효율성과 수익성을 최고의 가치로 친다. 나랏님들은 백성을 위하는 시늉이라도 했건만, 자본과 시스템에게 명분은 그저 거추장스러울 따름이다. 오로지 다양한 브랜드와 현란한 마케팅으로 소비자를 유혹한다. 마트와 편의점에 가면 먹거리가 넘쳐나지만 실상 그 본질을 헤아려보면 반복과 변주를 거듭할 뿐 단순하기 그지없다.

선택의 폭이 넓어졌고 각자의 기호와 예산에 따라 합리적인 소비가 가능한 세상에 산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착각이다. 오늘날 소비자는 염치없는 자본과 효율성이라는 시스템에 의해 철저하게 걸러진, 제한된 선택만을 강요받는다. 선택은 소비자의 몫이 아닌 자본과 시스템의 몫이다. 브랜드와 마케팅이라는 '화장발'에 속아 이를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여기에 미디어는 '푸드 포르노'라는 말로 상징되는 화려한 요리프로그램과 '먹방'을 쏟아내며 자본의 나팔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포르노에는 서사와 의미가 없다. 보다 자극적인 영상과 사운드로 관객의 말초신경을 자극할 뿐이다. 관객을 얼마나 흥분시키느냐가 곧 포르노의 완성도가 된다.

푸드 포르노 역시 마찬가지다. 음식에 담긴 스토리와 사회적 의미 따위는 애당초 관심 밖이다. 그저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 화면과 진행자나 게스트의 호들갑스러운 리액션이 있을 뿐이다. 화면이 화려하고 리액션이 강할수록 소비자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즉시적이다. 오늘도 이 땅의 소비자들은 마치 '파블로프의 개' 마냥 그 자극에 이끌려 맛집을 찾고 긴 행렬의 끝에서 기다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 쌀의 90%가 혼합미?

아울러 정보는 독점되어 있고 권력은 자본의 편에 서 있다. 소비자는 자신이 먹는 음식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산되고 유통되는지 알지 못한다. 국민을 위하는 척 제정된 법률과 제도는 기실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예나 지금이나 한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식재료는 쌀이다. 통일벼 이후 한국의 벼 품종 개발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에 올랐다. 현재 우리나라가 보유한 벼 품종은 260여 종에 이르고 그 중에서 매년 수십 종의 품종이 농가에 보급된다. 그럼에도 소비자는 각각의 품종의 특징은커녕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이것은 소비자의 무관심이라기보다는 제도의 문제다.

양곡의 유통에 관한 제반 사항을 규정한 '양곡관리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양곡 포장지에 표시해야 할 '의무표시사항'을 법률로 규정하고 있다. 품목, 생산년도, 중량, 품종, 도정연월일 등을 의무적으로 표시하도록 되어 있다. 이중 '품종' 관련 표시사항을 보면 "품종명을 표시하되, 품종명을 모르는 경우는 혼합으로 표시하고, 품종을 혼합한 경우에도 혼합으로 표시한다"라고 규정해 놓았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이 규정이 뭐 그리 중요한 문제일까 싶지만 농협을 비롯한 양곡 유통업자에게는 수익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다. 만약 법률에서 품종을 의무적으로 표시하도록 하면 쌀은 그 보관과 유통에 있어 매우 철저하고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현재 시행중인 양곡관리법 시행규칙은 유통업자들이 이러한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준 셈이다.

그 결과는 어떻게 나타날까? 현재 국내에는 1500여 개의 쌀 브랜드가 있다. 이중 10% 정도만 품종을 표시할 뿐, 나머지 90%는 혼합으로 표시되어 있다. 국가기관인 농업진흥청에서 아무리 좋은 품종을 개발한들 유통단계에서 의미가 없어진다. 농민이 좋은 품종을 골라 애써 농사를 짓는다 한들 그에 합당한 가격을 받을 수 없다. 무엇보다 소비자는 좋은 품종의 쌀을 선택할 기회를 박탈 당한다.

법률이 이런 식으로 제정되는 이유는 농협을 비롯한 유통업자가 법률 제정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조직과 협상력을 가진 반면, 소비자는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가장 중요한 식재료인 쌀의 상황이 이런 실정이니 식품산업 전체로 보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식품관련 법률이 생산자와 유통업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을지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대한민국의 음식은 노동자의 음식

결국 먹거리의 문제는 개인의 취향과 선택이 아닌 정치의 문제로 귀결된다. 언론 역시 푸드 포르노에만 탐닉할 뿐 이런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유권자의 참여와 관심만이 정치를 바꾸듯 먹거리 문제 또한 소비자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만이 답이다.

우리 시대 먹거리 문제에 관한 담론을 형성하고 올바른 식문화의 확산을 위해 만들어진 '사단법인 끼니'는 그 창립선언문의 첫머리에서 "대한민국은 노동자의 나라이다"라고 선언한다. 이는 윤봉길 의사의 역사의식에 대한 오마주다. 농민운동가 출신이었던 윤봉길 의사는 그의 저서 <농민독본>에서 이렇게 밝혔다.

"우리 조선은 농민의 나라입니다. 과거 4천여 년 동안의 역사를 돌아볼 때 어느 때에 비록 하루라도 농업을 아니 하고 살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역사의 첫머리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혀 농민의 나라인 것은 감출 수 없는 사실입니다."

1960년대 이후 4천여 년의 농민의 나라가 순식간에 노동자의 나라로 바뀌었다. 국민의 겨우 4%만 농민일 뿐 절대 다수는 노동자다. 오늘날 한국에서 벌어지는 먹거리 문제의 대부분은 농민의 나라에서 노동자의 나라로 바뀌는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농민은 자급자족이 삶의 원칙이다. 스스로 먹거리를 생산한다. 먹고 남은 먹거리로 교환과 판매를 한다. 하지만 노동자는 먹거리를 생산하지 않는다.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번 돈으로 먹거리를 산다. 대한민국의 음식은, 그러니 당연히 노동자의 음식이어야 한다.

먹거리 문제에서 "대한민국은 노동자의 나라이다"는 선언은 그래서 중요하다. 자본에게, 권력에게, 미디어에게 뺏긴 먹거리에 대한 선택권을 노동자가 가져야 한다. 결국 '먹고 살자고 하는 일'에 우리는 조금 더 치열하고 조직적일 필요가 있다.

○ 편집ㅣ최규화 기자

덧붙이는 글 | * 박상현 기자는 맛칼럼니스트로, <일본의 맛, 규슈를 먹다> 저자입니다.
* 이 글은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laborzine.laborparty.kr) 20호(2015년 5월)에 실렸습니다.



태그:#밥,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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