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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菓子 中의 菓子 (과자 중의 과자)' 라는 제과점의 구호가 재미있다.
 '菓子 中의 菓子 (과자 중의 과자)' 라는 제과점의 구호가 재미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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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 바람이 부드러워질 즈음이면 자전거를 타고 서울 남산에 올랐다가 장충동 국립극장 방향으로 내려오곤 한다. 간판 이름에서 느껴지는 '크고 극적인 달달함'이 기대되는 제과점 '태극당'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 전북 군산에 있는 이성당이라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은 장충동의 태극당이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창업주 고 신창근씨가 태극당을 창업한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해방 이전 일본인 제과점에서 일했던 신씨는 해방이 되자 주인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두고 간 장비를 받아 명동에 제과점을 열고 '태극당'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빵'이란 말 또한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18세기 포르투갈과 교역을 하면서 빵을 수입하게 된 일본인들은 빵의 포르투갈어 '팡데로(Pão-de-ló)'를 '팡'이라 불렀다고 한다. 19세기 서양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가져온 빵은 처음엔 '서양떡'이라 불렸으나, 후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빵'이 되었다.

태극당은 이후 1974년 현재의 장충동 자리로 옮겨 왔다. 당시 이 제과점이 만들어 팔 수 있었던 것은 '센베이'라고 불렀던 일본식 과자나 유가 사탕 등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태극당은 고풍스러운 제과점 분위기 덕분에 만남의 장소나 선을 보는 곳으로 소문나 당시 젊은 남녀에게 인기가 높았단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빵들이 쏟아지는 '베이커리'의 시대에 '제과점'의 옛 맛을 그대로 지키는 태극당의 빵과 과자는 왠지 식상하거나 지겹지 않다.

'과자 중의 과자' 만드는 모범 과자점

빵 고르는 즐거움을 더해주는 정다운 빵 봉지.
 빵 고르는 즐거움을 더해주는 정다운 빵 봉지.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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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항, 수석, 고풍스런 의자가 있어 빵을 먹으며 앉아가기 좋은 매장내 카페.
 어항, 수석, 고풍스런 의자가 있어 빵을 먹으며 앉아가기 좋은 매장내 카페.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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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이래 줄곧 같은 맛과 모양으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안내문처럼 태극당은 들어서는 건물 외관부터 옛날 그대로의 정취를 간직하고 있어 참 인상적이다. 태극당 간판 위로 보이는 글자 '菓子 中의 菓子 (과자 중의 과자)', 서울에서 제일 오래됐다는 빵집의 구호가 여행자를 웃음 짓게 한다. 요즘의 '모범 식당'처럼 '모범 과자점'이라는 옛날 공인 명패도 눈길을 끌었다.

70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허름해진 건물 외관은 몇 해 전 위생 문제가 제기되기도 해 올해 5월 개보수 공사를 거쳐 새로 단장을 한단다. 서울의 빵집에선 보기 드문 간판과 글자가 사라지겠구나, 아쉬웠는데 현재의 간판과 글씨 모양은 최대한 보존할 예정이라니 다행이다.

빵과 과자를 편안히 앉아 먹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넓은 매장에는 옛 동네 제과점에서 흔히 봤던 소박한 보리빵, '사라다빵'과 솥뚜껑처럼 큰 각종 케이크, 형형색색의 과자들이 예쁘게 놓여 있다. 높은 천장 위엔 은은한 빛을 발하는 샹들리에가 손님을 따뜻하게 비쳐주고, 금붕어가 노니는 어항, 희한한 모양의 수석들이 빵 가게 곳곳 자리 잡고 있다.

요즘의 세련된 빵집과 비교하면 촌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하고 마치 영화 세트장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개성을 버리지 않고 오랜 세월 묵묵히 견뎌온 빵집만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와 정취가 그대로 스며 있었다.

태극당 빵의 재미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때 그 시절의 빵 포장지를 아직도 그대로 이어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빵을 고르고 포장지를 뜯을 때마다 피식피식 웃음이 난다. 포장지뿐 아니라 빵의 종류와 맛도 요즘 빵과는 다른 예스러운 것들이 많아 빵 맛을 보기 전에 눈이 먼저 즐겁다. 특히 옛 과자인 다양한 양과자와 월병 등을 빵과 함께 팔고 있어 나이 지긋한 손님들이 많이 찾아올 만했다.

엄마 손맛 나는 빵과 아이스크림

자꾸만 손이 가는 태극당의 대표 메뉴 '모나카 아이스크림'
 자꾸만 손이 가는 태극당의 대표 메뉴 '모나카 아이스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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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옛날 빵, 과자에서부터 현대식 빵 등 종류가 많다 보니 미리 생각하고 찾지 않으면 쉽게 고르기가 힘들다. 이럴 땐 직원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좋다. 처음 왔다면 사라다빵, 카스텔라, 모나카 아이스크림부터 먹어 보란다. 일종의 태극당 '입문자용' 메뉴다. 사라다빵은 부드러운 감자와 아삭아삭한 양배추가 버무려진 샐러드가 터질 듯 꽉꽉 차 있다. 자극적인 맛이 거의 없고, 재료의 순수한 맛, 씹는 맛을 오롯이 느껴졌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메밀과 무채를 넣은 제주도의 소박한 토속음식 '빙떡'이 떠올랐다. 

어릴 적 집에서 어머니가 간식으로 뚝딱 만들어 주었던 담백한 맛이다. 태극당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대표 빵은 카스텔라. 요즘 말로 '빈티지한' 포장지부터 돋보이는 빵이다. 포근하면서도 촘촘한 식감, 달걀의 진한 풍미가 느껴지는데 내 유년시절 그랬듯 우유와 함께 먹어야 비로소 카스텔라의 맛이 완성된다. 카스텔라(Castella)는 16세기 포르투갈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후 개화기 우리나라에 건너온 귀한 케이크로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빵이었단다.

'목장우유와 계란 노른자를 넣어 만든 천연 아이스크림'이라고 포장지에 친절하게 써 있는 모나카 아이스크림은 겉으론 넓적하고 각이 진 모습이 딱딱할 것 같지만 입안에 넣으면 금세 사르르 녹는다. 요즘 아이스크림과 달리 크게 달지도 않고 우유 맛이 진하게 났다. 사람들이 서너 개씩 사가는 이유가 있는 맛이다. 1960년대엔 경기도 남양주에 목장을 직접 운영하면서 우유와 달걀을 공수해 빵과 과자를 만들어냈다고 하니, 태극당의 오랜 역사와 명성이 그냥 만들어진 것은 아닌 듯하다.

군산 이성당 빵집이 그랬듯, 오래된 빵집의 먹거리들은 겉으론 특별하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생각나는 맛을 지니고 있다. 태극당 역시 특별하게 치장하지 않은 투박한 모양새의 빵과 과자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어머니 손맛 나는 이 빵들을 먹으러 나처럼 다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데엔 이유가 있을 터.

요즘의 모범 식당처럼 예전엔 '모범 과자점' 인증제도가 있었나보다.
 요즘의 모범 식당처럼 예전엔 '모범 과자점' 인증제도가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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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비싼 요리는 다 먹어보았을 세계의 유명한 요리사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음식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대부분의 요리사들은 햄버거, 김밥, 양꼬치 등 흔하디 흔한 음식을 찾았단다. 이 단순하고 소박한 음식들은 그들이 세계적인 요리사가 되기 전 제일 즐겨 먹었던 음식이었다. 세계 최고의 요리사들에게도 잊기 힘든 음식은 바로 추억이었던 셈이다. 추억이 깃든 맛은 그 어떤 음식의 맛보다 힘이 세다.

발전을 추구한다는 명목 하에 서울 종로의 유서 깊은 피맛골, 동대문 운동장 등이 사라져갔다. 시민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옛 공간들이 너무나 빨리, 너무나 많이 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유년시절의 전부였던 동네 골목, 청춘을 보낸 거리와 그 거리를 채웠던 상점과 가게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도시가 또한 서울이다.

태극당은 새것만 좋아하는 도시, 옛 공간이 품고 있던 오래된 추억과 가치가 사라지든 말든 별 관심이 없는 이 퍽퍽한 도시에 지쳐갈 때 찾아가고 싶은 곳이다. 

덧붙이는 글 | ㅇ 지난 3월 11일과 14일에 다녀왔습니다.
ㅇ 위치 : 수도권 전철 3호선 동대입구역 2번 출구 바로 앞
ㅇ 운영시간 : 매일 오후 9시 30분까지 (연중무휴)

이 기사는 <내 손 안에 서울>페이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태극당,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모나카 아이스크림, #카스테라, #과자중의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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