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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한 달 앞둔 지난 16일, 실종자 가족들이 진도 팽목항을 찾아 "국민 여러분, 정부가 세월호 실종자 모두를 애타는 가족 품에 돌려보낼 수 있도록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 세월호 참사 1주기 앞둔 진도 팽목항 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한 달 앞둔 지난 16일, 실종자 가족들이 진도 팽목항을 찾아 "국민 여러분, 정부가 세월호 실종자 모두를 애타는 가족 품에 돌려보낼 수 있도록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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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학교에서 수학여행 참석 여부 설문 조사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새 학기를 맞아 올해 고2가 된 딸 아이로부터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새삼 놀랐다. 우리나라에서 '고등학교 2학년'과 '수학여행'은 더 이상 행복한 연관어가 아니었다.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묘한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딸 아이에게 물었다.

"너는 어때? 수학여행 가고 싶니?"

그러자 딸 아이는 웃으며 "부모님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답했다. 그 후 나는 딸 아이와 이 문제를 가지고 상당 시간 동안 각자의 생각을 내놓고 논의했다. 그 결과 우리 부녀는 '수학여행을 가지 않기로' 결정하고 이를 설문지에 썼다. 나는 이러한 결정을 내려준 딸에게 고맙다. 그 이유는 이렇다.

세월호 참사, 그 비극의 아침, 잊을 수 없다

지난해 4월 16일 아침 9시 30분께. 그날 나는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포털 사이트 뉴스 검색에서 '여객선 침몰 중'이라는 기사가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우리나라 소식이 아니라 먼 나라 어느 곳에서 벌어진 '해외 토픽' 기사라고 생각하며 클릭하지 않았다. 자료를 찾아 문서를 만들어야 했기에 다른 기사를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잠시 후 사무실에 틀어놓은 TV에서 다급한 사고 소식이 다시 들려왔다. 그제야 눈을 들어 살펴보니 배 침몰 사고는 다름 아닌 우리나라 남도 바다에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나는 그제야 하던 일을 멈추고 TV 앞으로 다가가 사고 소식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그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방송을 보니 이미 사고 현장에는 헬기도 떠 있었고 출동한 해경 배도 보였다. 날은 이미 훤하게 밝은 아침이었고, 사고 난 배 역시 금방 가라앉을 리 없어 보이는 대형 여객선이었다. 우리나라 같은 선진국이 이 훤한 아침에 저런 사고도 해결하지 못하리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역시나 잠시 후, 방송은 내가 기다렸던 소식을 알려줬다.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과 교직원이 전부 구조됐다는 속보였다. 나는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며 다시 하던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한편 '그 배에 일반인 승객도 많다던데 왜 학생들만 전원 구조됐다고 할까? 나머지 승객도 다 구한 건가?'라는 의문은 들었다. 하지만, 곧 '전원 구조 속보가 뜨겠지' 하며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충격적인 진실이 알려진 것은 전원 구조 속보가 뜨고 채 5분이 넘지 않은 즈음이었다.

오보였다. '단원고 학생 및 교직원 전원 구조'는 사실이 아니었다. 경악과 비명이 절로 터져 나오며 "그럼 어떻게 됐다는 거야"라며 TV 앞에 다시 다가간 순간은, 그야말로 끔찍한 악몽의 시작이었다.

무려 304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어진 참사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연속이었다. 살아 있다며, 또 살려 달라며 배 안에 갇힌 실종자 아이가 보낸 카톡이 풍문처럼 떠돌았고 이 카톡을 받은 부모는 팽목항 앞에서 내 아이를 구해달라고 절규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또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생과 사가 엇갈리면서 대한민국 전 국민은 같이 울었고 또 고통스러워했다. 그 끔찍한 기억이 바로 지난해 4월 16일, 진도 팽목항과 이름도 낯선 맹골수도를 전 국민의 뇌리 속에 남겼다.

지난해 4월16일 오후 진도 인근 해역에서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
 지난해 4월16일 오후 진도 인근 해역에서 침몰한 여객선 '세월호'.
ⓒ 해양경찰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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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이 되는 게 꿈? 그 끔찍한 소원, 잊을 수 없어

사고 이후 나 역시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매일 매일 세월호 관련 속보를 보며 그들의 생환을 목 타게 기도했다. '에어 포켓' 안에서 72시간 동안 생존이 가능하다는 해경의 발표를 듣고, 또 그 안에 언딘이 산소를 주입했고, 그 덕분에 얼마간의 생존 시간이 연장되었다는 뉴스를 들으며 다시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그래서 단 한 명이라도 살아서 구조됐다는 소식이 들려오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사실은 전부 거짓말이었다고 한다. 에어포켓은 처음부터 없었고 구조업체가 주입했다는 진짜 공기도 없었다. '정말 끔찍한 거짓말'로 전 국민과 유족을 속였지만, 지금까지 책임을 진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그리고 또 하나, 방송에서 나온 장면을 보며 나 혼자 착각한 사실이 더 있다. 방송국 생중계를 통해 팽목항 앞에 나와 절규하는 유족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갖게 된 '착각'이었다. 나는 유족이 팽목항 앞에서 주저 앉아 하염없이 바다를 향해 소리치는 것을 보며 세월호 침몰 사고가 그곳에서 보이는 어디쯤인 줄 알았다. 그러다 팽목항을 직접 방문하고 나서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팽목항에서 사고가 난 곳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팽목항에서 쾌속선을 타고 약 1시간 가량 망망대해를 달려가야 그곳이 사고가 난 '맹골수도'라는 것을. 또 그곳에는 세월호가 아무 흔적도 없이 가라 앉아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사실을 알고 다시 눈물을 흘렸다. 팽목항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를 향해 아이들의 부모가 외친 절규가 내 가슴에 슬프게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그날, 사고 현장을 다녀온 후 진도 체육관에서 유족들을 만났을 때였다. 나는 그곳에서 유족의 호소를 들으며 가슴에 통증을 느낄 정도로 슬픔을 느껴야 했다. 그때까지도 아이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한 어머니가 우리를 보며 간절하게 부탁한 이야기였다.

"여기 찾아오신 여러분. 제 소원이 뭔지 아세요? 전 유족이 되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처음엔 그분의 말을 듣고 무슨 뜻인지 금방 이해하지 못했다. 죽은 사람의 가족이 되는 것이 소원이라니. 사고의 충격으로 그만 정신줄이라도 놓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살려 달라'가 아니라 '유족이 되고 싶다'니. 미진한 구조 활동에 항의하고자 반어법으로 말씀하시는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 뒤에 이어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전후 사정을 이해하게 됐다.

"부탁입니다. 제 아이를 찾아주십시오. 마지막까지 못 찾는 사람이 한 명만 남게 되면 구조 본부가 그냥 철수할까 봐 두렵습니다. 그 사람이 제가 될까 봐, 아니 우리 중 누가 되든 그렇게 될까 봐 모두 걱정합니다. 이러다 끝내 실종자 가족으로 남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실종자 가족에서 시신을 찾은 유족이 되고 싶은 이 심정을 이해하실 수 있나요?"

실종자 9명,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한 달 앞둔 지난 16일, 실종자 가족들이 진도 팽목항을 찾아 "국민 여러분, 정부가 세월호 실종자 모두를 애타는 가족 품에 돌려보낼 수 있도록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팽목항 방파제에서 기자회견을 연 이들은 "실종자 가족들이 원하는 단 하나는 사랑하는 내 가족을 찾아서 유가족이 되는 것"이라며 "1년 되도록 공포 속에 갇혀 있는 실종자들이 1분, 1초라도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힘을 모아달라"고 외쳤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실종자 허다윤(단원고)양의 어머니 박은미씨가 부축을 받으며 팽목항 방파제를 걷고 있다.
▲ 팽목항 걷는 '다윤 엄마' 세월호 참사 1주기를 한 달 앞둔 지난 16일, 실종자 가족들이 진도 팽목항을 찾아 "국민 여러분, 정부가 세월호 실종자 모두를 애타는 가족 품에 돌려보낼 수 있도록 지지해 달라"고 호소했다. 팽목항 방파제에서 기자회견을 연 이들은 "실종자 가족들이 원하는 단 하나는 사랑하는 내 가족을 찾아서 유가족이 되는 것"이라며 "1년 되도록 공포 속에 갇혀 있는 실종자들이 1분, 1초라도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힘을 모아달라"고 외쳤다. 기자회견이 끝난 후, 실종자 허다윤(단원고)양의 어머니 박은미씨가 부축을 받으며 팽목항 방파제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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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게도 그 유족 분의 예감은 사실이 되었다. 처음 그분의 절규를 듣고 슬프기는 했지만, 반드시 모든 실종자가 구조될 것이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확신했다. 비록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한 무능한 정부지만 실종자마저 수습하지 못하리라고 난 의심하지 않았다. 그 정도의 능력은 있다고 믿은 것이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의 비극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기대를 벗어났다.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무능한 정부는 다시 그 실종된 이들조차 제때 수습하지 못했다. 결국 사고 발생 210일 만인 2014년 11월 11일, 정부는 9명의 실종자를 끝내 포기했다.

어려운 부모 사정을 생각해 "수학여행을 가지 않아도 된다"며 오히려 웃었다던 단원고 2학년 1반 조은화, 어머니 병환으로 수학 여행비가 없자 이모가 대신 내준 돈으로 수학여행을 떠난 2학년 2반 허다윤, 기타 연주가 취미였고 4대 독자로 여섯 살 때 혼자 할머니 임종을 했다는 어른스러운 아이 2학년 6반 남현철. 축구를 좋아했으나 생전 축구화를 사지 못했다는 2학년 6반 박영인. 영인이 부모님은 아이가 돌아오기를 염원하며 지금도 팽목항에 축구화를 걸어 놓았다고 한다.

또한 단원고 부장 교사로서 형편 어려운 학생에게 장학금을 마련해준 양승진 선생님과, 같은 교사인 고창석 선생님 역시 그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일반인 승객 중 눈길을 끄는 사연은 일가족이 제주도 귀농을 위해 내려가다 6살 아들과 함께 실종된 권재근씨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고생 끝에 정규직으로 전환되어 제주도로 이사를 가던 이영숙씨. 그렇게 9명은 지금까지도 실종자로 남아 있다.

딸 아이와 나는 적어도 단원고 실종자 학생들이 다시 그들의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지금, 수학여행을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다시 그 부모에게 돌아가지도 못했는데 지금 또 수학여행을 가자는 교육 당국의 처사에 나와 딸은 동의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게 해서 다시 사고가 난다면, 그때도 역시 이 나라는 실종자를 포기할 것 아닌가.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아무 일 없듯이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들을 그렇게 잃고도 뭐 하나 달라진 것이 없다. 오히려 일각에서는 세월호 사건을 그만 잊고, 노란 리본도 떼어내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잊을 것은 세월호도, 노란 리본도 아니다. 여전히 실종된 아이들은 물을 것이다. "선배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왜 후배가 수학여행을 가냐"고.

"수학여행이 언제까지냐"는 어머니의 물음에 "금요일에 돌아온다"던 아이는 그 후 수십 번의 금요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다. 나와 딸 아이는 그 아이들이 어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수학여행 참가 여부를 묻는 담임 선생님에게 '실종자들이 돌아오지 않는 한' 수학여행을 가지 않겠다며 말씀드렸다는 딸 아이에게 나는 고맙다. 이 작은 연대와 저항이 세월호 인양을 요구하며 지금 이 시간에도 3보 1배로 광화문을 향하는 세월호 희생자 고 이승현군의 아버지와 누나에게 작은 응원이 되기를 나와 딸은 또 소원한다.

침몰된 세월호는 하루 빨리 인양돼야 한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 정부는 9명의 국민을 구해야 한다. 국민을 포기한 정부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세월호 실종자가 다시 그 가족에게 돌아가기를 염원한다. 세월호 참사 유족과 끝까지 함께 울겠다.


태그:#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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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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