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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20일 일본 아베 정부가 고교무상화 제도를 시행하는 성령(省令)을 발표할 때 외국인학교 중 유독 재일조선학교만 배제되자, 일본 교육계와 인권·평화단체들이 이를 '인권차별'로 비판하며 대책기구를 구성하고 항의행동에 돌입했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은 조선학교에 대한 '무상교육 배제' 처분 취소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에 나섰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되는 날을 맞아 2015년 2월 20~21일, 일본 문부과학성에 직접 의견을 전달하고, 소송에 나선 조선학교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한 '전국통일행동'이 개최됐습니다.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은 이를 계기로 재일조선학교 차별 문제에 대해 돌아보는 기획연재를 시작합니다. 청산되지 못한 과거사 속에서 차별받는 동포들의 인권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 기자 말

양심적인 일본인들과 재일조선인들은 해마다 도쿄의 한복판에서 조선학생에 대한 제도적 차별에 항의하는 집회와 시위행진을 연다
 양심적인 일본인들과 재일조선인들은 해마다 도쿄의 한복판에서 조선학생에 대한 제도적 차별에 항의하는 집회와 시위행진을 연다
ⓒ 김명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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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 고온다습한 공기가 턱턱 숨을 막히게 하는 일본 오사카 시내 동쪽의 주택지 3층 건물이었다. 데뷔작을 준비하던 조은령 감독은 하루 종일 전화기 앞에서 숨을 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왜일까? 왜 전화가 오지 않는 걸까?"

분명 그 선생님은 '곧 연락을 준다'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조은령 감독은 조선학교를 배경으로 한 <하나>라는 장편 극영화 시나리오를 집필 중이었다. 친하게 된 재일동포가 '조선학교'라는 생소한 곳의 교장선생님을 소개했고, 중급부, 고급부 학생들의 생활도 알기 위해서 연락을 취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푹푹 찌는 더위는 집 밖에 한 걸음 나서기조차 두렵게 만들었고, 조은령 감독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무소식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 생활이 두 달이 되어갈 무렵, 드디어 전화벨이 울렸다.

"남쪽에서 오신 조은령 영화감독이십니까? 참으로 안 되었습니다. 아직도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어서 우리학교로 와주십시요."

교장선생님은 학교의 국어교원으로부터 '이러저러한 남쪽 손님이 우리학교를 방문하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좀체 없던 일이기도 하고 아직은 남쪽 손님을, 그것도 한 개인을 그저 '보고 싶어 한다'는 이유만으로 학교에 들이기엔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어느새 까맣게 잊어 버렸다. 그렇게 두 달이 흘렀고, 국어교원이 시장에서 우연히 조은령 감독을 만나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교장선생님은 허겁지겁 수화기를 든 것이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학교의 중급부 3학년 학생들과 함께 반 학기를 넘게 생활하며 그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영화 <우리학교>(2006)의 출발점에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비극' 전하기 바쁘던 뉴스... 한가운데에 있던 '우리학교'는?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은 센다이시에 있는 도호쿠 조선학교 또한 집어삼켰다. 현재 아이들은 기숙사를 개조한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다.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은 센다이시에 있는 도호쿠 조선학교 또한 집어삼켰다. 현재 아이들은 기숙사를 개조한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다.
ⓒ 김명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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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어느 날이었다. 배우 권해효는 북녘 땅에 있었다. '남북청년학생통일대회' 무대에 올라 사회를 보며 감격스러워 했다. 남과 북의 대학생들이 어우러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다시 만나자요. 함께 가자요."

대학생들의 축제는 하나 됨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하는 듯했다. 무대의 불이 꺼지고 서로가 재회의 다짐을 하는 시간이었다. 무대 한편에 치마저고리를 입은 앳된 아이들이 있었다. 얼굴에는 하염없는 눈물이…. 마치 영영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너희들은 누구길래 그렇게 서럽게 우니?"
"우리들은 일본의 조선학교에 다닙니다. 조국방문을 왔습니다."

아이들은 고3이었다. 졸업여행으로 조국에 방문했는데 남북 대학생의 축제가 있다고 하기에 선생님을 설득해 한 달을 더 머물렀다고 한다. 이 감격적인 순간을 직접 경험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제 어느덧 남도 북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데, 그래서 그게 그렇게 신기한 것도 아닌데 이 아이들에게만은 그게 아니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드라마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인기몰이를 했고, 조연으로 출연한 배우 권해효도 '김차장'이라는 역할의 유명세에 힘입어 일본 방문이 잦아졌다. 거기서 다시 만난 '조선학교 아이들'. 끌어안고 함께 울었다. 그 인연은 오래 지속되었다. 그리고 '몽당연필'(비영리 민간단체,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의 출발점이 되었다.

2011년 3월 11일, 길을 걸으면서도 습관적으로 들여다보게 된 트위터. 저녁 무렵이었다. 갑자기 비명소리가 트위터를 도배하기 시작했다.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트위터도 페이스북도 온통 비명소리였다. 일본 동쪽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지진이 일어났다. 진도 9.0. 유난히 재일동포 트위터, 페이스북 친구가 많던 배우 권해효는 우선 동포들의 소식부터 물었다. 아뿔싸! 센다이였다. 그리고 후쿠시마였다. 거기에는 술잔을 기울이던 친구도 있었고, 무엇보다 '우리학교'가 있었다.

뉴스는 온통 이 '비극'을 전하기에 바빴다.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했다. 그 한가운데에 '우리학교', '우리 동포'가 있는데 뉴스는 그걸 전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온몸을 감쌌다. 잠도 잘 수 없고 먹을 수도 없었다. SNS만 들여다보며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슬픔을 나누기 위해 모여야만 했다. 그리고 '몽당연필'을 시작했다. 그동안 재일동포, 조선학교와 함께 정을 나눈 사람들, 단체들이 똘똘 뭉쳐 한국사회에 조선학교를, 조선학교 아이들도 지진 피해의 한복판에 있었음을 외쳤다.

하나 됨의 비결은 없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다'는 끌림뿐 

배우 권해효씨가 대표로 있는 시민단체 몽당연필이 개최하는 '소풍 콘서트'. 2014년은 히로시마에서 개최되었다.
 배우 권해효씨가 대표로 있는 시민단체 몽당연필이 개최하는 '소풍 콘서트'. 2014년은 히로시마에서 개최되었다.
ⓒ 김명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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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매주 화요일 정오마다 몇몇의 시민들이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 모인다. "조선학교 차별을 없애라", "고교무상화를 조선학교에도 실행해라"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1인시위를 벌이는 사람들. 영화 <우리학교> 팬카페 사람들이다. 일본 오사카 시청 앞에 화요일마다 모여 이른바 '화요행동'이라는 이름으로 시위를 벌이는 일본인, 재일동포들과 함께 행동하자는 것이다.

매주 금요일 정오, 다시 몇몇의 사람들이 모인다. 역시 일본대사관 앞이다. 같은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다.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시민모임'이라는 모임 회원들이다. 일본의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매주 금요일 문부과학성 앞에서 벌이는 '금요시위'에, 그들의 고향에서도 함께하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15년.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15년이 흘렀다. 그리고 일반 시민들이 '우리학교'의 정당성을 외치며 거리로 나서고 있다. 여전히 일본의 조선학교는 고교무상화 제외, 지방자치단체의 교육보조금 동결, '재일조선인의 특혜를 반대하는 시민모임(재특회)' 등의 혐한(嫌韓)시위, 악화되어가는 반한(反韓)감정 등에 시달리고 있다. 여전히 한국 정부는 재일동포의 민족교육에 대해서 '기민정책(棄民政策)'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15년 전 6·15공동선언 이후 시작된 남과 북, 해외동포들의 작은 만남들이 일구어낸 결실은 분명히 있었다. 조선학교를 다니는 학생과 그 부모들, 동포들만의 외로운 싸움은 그 시간을 지나면서 수많은 일본인들과 한국 사람들을 끌어안고 가는 형국이다. 외로움은 이제 거두어내도 괜찮은 기분이 되었다. 그렇게 믿는다.

이 믿음의 근거는 결코 새롭거나 독특한 것이 아니다. 처음의 만남과 그 인연의 길에서 어떤 이념도 어떤 사상도 어떤 추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보고 싶고 만지고 싶다'는 끌림뿐이었다. 만나서 눈 마주치니 정겹고 손 잡으니 따스하다. 얼굴을 비비고 술잔을 기울이니 수십 년 헤어짐이 한순간에 녹아난다. 어색하지도 부끄럽지도 않은 이 끌림이 있었기에 15년을 한결같이 '하나' 된 기분이었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누군가 '하나 됨'의 비결을 묻는다. 글쎄, 답변하기가 너무 어렵다. 비결 따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옆에 있어주는 것. 누구나 다 아는 평범한, 어쩌면 가장 쉽지만 어쩌면 가장 어려운 그 길. 그 길을 함께 걷는 게 즐겁기 때문이었을 거다.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 손미희 대표의 일본대사관 앞 1인시위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 손미희 대표의 일본대사관 앞 1인시위
ⓒ 김명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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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조은령
영화감독 고 조은령은 재일조선학교의 일상을 담은 영화 <우리학교>의 연출자 김명준의 아내다. 그녀는 2000년 6·15공동선언의 영향으로 자신의 데뷔작의 주제를 '통일'로 잡고 고민하던 중 재일동포 다큐멘터리를 보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일본에서 알게 된 '조선학교'를 자신의 영화 소재로 잡고 시나리오를 쓰며 동시에 다큐멘터리를 기획했다. 당시 촬영감독으로 결합한 김명준 감독과의 결혼 후 불의의 사고로 운명하여 김명준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촬영한 것이 <우리학교>이다.(조은령 감독 추모사이트 http://www.echofilm.com/main2)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다큐멘터리 <우리학교> 감독,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입니다.



태그:#조선학교, #우리학교, #몽당연필, #재일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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