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영화 <허삼관>을 보면 한국인의 인식 저변에 깔린 '핏줄'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하정우가 연기한 허삼관은 마을에서 내로라하는 절세 미녀 옥란과 결혼하기 위해 당시 불법적으로 행해지던 '매혈'(피를 팔아 돈을 버는 행위)을 합니다. '매혈'은 영화에서 허삼관과 옥란, 그리고 이들의 세 아들이 겪는 갈등과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열쇠가 되죠.

옥란과 허삼관은 결혼 후에도 가정형편은 나아지지 않지만, 세 아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갑니다. 아들들의 이름도 '일락', '이락, '삼락'이라고 지은 걸로 봐서는 한자의 '즐겁다'라는 뜻 '락(樂)'을 사용했음을 짐작해 봅니다. 이는 자신의 핏줄인 세 아들이 곧 자기의 기쁨이란 해석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허삼관은 그중에서도 첫째인 일락을 제일 아낍니다. 가부장제에서 장남이 차지하는 위치는 굳이 말을 안 해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둘째는 형의 일을 도와주고 막내를 살뜰히 챙기는 그런 역할로 나옵니다.

자신의 핏줄이 아니니 아저씨라 부르라는 허삼관

가족의 의미에 대해 무겁지만 담담한 톤으로 풀어낸 영화. 핏줄만이 내 가족이라는 고집도 정답이 될 순 없다.
▲ 영화 <허삼관> 가족의 의미에 대해 무겁지만 담담한 톤으로 풀어낸 영화. 핏줄만이 내 가족이라는 고집도 정답이 될 순 없다.
ⓒ NEW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이 행복도 잠시뿐, 이 영화의 핵심 요소인 핏줄에 대한 갈등이 등장합니다. 허삼관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고 아끼던 첫째 아들 '일락'이 자신의 핏줄이 아니라 읍내 바람둥이 '하소용'의 아들이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피검사 즉, 혈액형 검사로 말이죠. 충격을 받은 그는 옥란과 첫째 일락에게 180도 태도를 바꾸어 버립니다. 심지어 일락에게는 자신을 '아저씨'라 부르라 강요하기도 하죠.

허삼관의 이러한 태도가 관객에게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보이긴 하지만, 과연 내가 그 상황에 처했다면 어땠을까요? 그토록 자랑거리였던 나의 첫째 아들 일락이 내 핏줄이 다른 남자의 핏줄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그래도 영화는 허삼관이 느꼈을 충격과 분노를 미워할 수만은 없게 그려 나갑니다. 조금 코믹스럽고 애들 같은, '지질한' 모습으로요. 하지만 관객은 첫째 아들 '일락'을 보며 눈물을 글썽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락'은 허삼관에게도 하소용에게도 아들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투명인간 같은 인생이기 때문이죠.

그러다가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며 '일락'은 뇌염에 걸립니다. 당시에는 지금 같은 예방주사도 없던 시절이라 한번 걸리면 사망에 이르기도 하는 중병이었습니다. '일락'은 동네 의원에서도 방법이 없다 하여 대전의 큰 병원으로 가지만 그곳에서도 치료할 수 없어 서울로 올라갑니다.

허삼관은 어떻게 했을까요? 자기 아들이 아니니 옥란에게 "네가 알아서 해라"라고 했을까요? 아님 친부인 하소용에게 가라고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옥란과의 결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피를 팔았던 동네 의원을 찾아갑니다. 이때부터 허삼관의 '매혈기'가 시작됩니다.

저는 원작을 보지 않아 글로 보는 허삼관의 눈물겨운 사랑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허삼관의 '매혈' 장면은 정말 가슴이 찡합니다. 그는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각기 다른 병원을 찾아다니며 피를 뽑아 돈을 마련합니다. 하지만 피를 뽑는 것도 한계가 있지요. 너무 많은 피를 뽑았던 탓에 병원에서 쓰러지고 다시 자신의 피와 타인의 피를 수혈 받는 상황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면서도 허삼관은 자기의 피만 넣지 왜 다른 사람의 피까지 넣어서 자기에게 돈을 내라고 하냐며 의사에게 눈물로 호소합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요?

허삼관의 세 아들, 가운데가 첫째 '일락', 왼쪽이 둘째 '이락', 오른쪽이 셋째 '삼락'
▲ 영화 <허삼관> 허삼관의 세 아들, 가운데가 첫째 '일락', 왼쪽이 둘째 '이락', 오른쪽이 셋째 '삼락'
ⓒ NEW

관련사진보기


​허삼관은 생명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피를 다 짜내며 피붙이도 아닌 '일락'을 위해 서울로 갑니다. 그는 왜 자신의 핏줄도 아닌 '일락'을 위해 매혈을 했을까요?  단지 그동안 살아온 정 때문에 그랬을까요, 아니면 그 살아온 날들이 '일락'을 비로소 가족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도록 했기 때문일까요? ​

다른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옥란과 하소용의 핏줄인 '일락'에게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하소용일까요 아니면 허삼관일까요?

우린 여기서 가족이란 무엇인지, 흔히 말하는 식구(食口)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족이란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를 일컫는다고 생각하죠.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부부를 중심으로 하여 그로부터 생겨난 아들 딸 손자 손녀 등 가까운 혈육들로 이루어지는 집단 또는 그 구성원 대개 한 집에서 생활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가족은 이렇게만 정의할 수 있을까요? 뭔가 모자란 감이 있습니다. 한국어 위키 백과사전을 보았습니다.

"'가족(家族)은 대체로 혈연, 혼인, 입양, 친분 등으로 관계되어 같이 일상의 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집단(공동체) 또는 그 구성원을 말한다. 집단을 말할 때는 가정이라고도 하며, 그 구성원을 말할 때는 가솔(家率)이라고도 한다."

​여기에서는 '혼인', '입양'이란 단어가 등장합니다. 가족의 구성원에 대해 좀 더 확장된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에 언급했던 국어사전에 나오는 정의와 다른 뜻은 아닙니다. 어차피 한 집에서 생활하는 구성원이라는 뜻으로 볼 때는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으니까요.

'일락'의 아버지는 누가 맞을까요?

허삼관의 첫째 아들 '일락'은 비록 옥란과 하소용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니지만, 허삼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11년 동안 가족으로 살아왔습니다. 법률적의미나 보편적의미에서 '일락'은 허삼관의 가족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영화 <허삼관> 허삼관의 첫째 아들 '일락'은 비록 옥란과 하소용의 관계에서 태어난 아니지만, 허삼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11년 동안 가족으로 살아왔습니다. 법률적의미나 보편적의미에서 '일락'은 허삼관의 가족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NEW

관련사진보기


그럼 여기에서 허삼관 이야기로 돌아가 보기로 합니다. 허삼관의 첫째 아들 '일락', 즉 옥란과 하소용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허삼관의 가족으로 볼 수 있을까요? 가족이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가족이 아니라고 냉정히 말하기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의 나이 11살,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허삼관 가정의 구성원으로 살아왔으니까요.

가족들과 모인 자리에서 허삼관은 '식구란 함께 밥을 먹는 입'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함께 밥을 먹고 밖에 나가 열심히 일한 후 다시 저녁에 돌아와서 다같이 밥을 먹는 사람들! 이것이 식구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말처럼 '일락'이 허삼관의 가족이 아닐 이유는 없습니다. 

​그럼 국어사전에서 가족의 법률적 의미를 보겠습니다.

"가족이란 동일한 호적 내에 있는 친족을 가리킨다."

위의 의미를 따라가 본다면, 의학적으로는 일락의 아버지는 하소용이겠지만 법률적으로 본다면 허삼관이 바로 일락의 아버지가 됩니다.

그런데 허삼관이 '일락'의 핏줄을 문제 삼아 하소용에게 '일락'을 넘기고 법적인 절차도 끝내 버리면 '일락'은 허삼관이 아닌 하소용의 가족이 될 겁니다. 이렇게 본다면 가족이란 개념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는,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죠. 그러나 반대로 본다면, 모든 인간이 동등한 인격을 가지고 대우받아야 한다는 '인권'의 측면에서는 보다 다각적인 형태의 가족이라는 개념을 추출해볼 수 있습니다.

가족의 탄생, 오직 핏줄만?

허삼관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피가 섞인 하소용? 11년간 키워 온 허삼관? 어떻게 본다면, 핏줄로 맺어진 가족관계에 대해 비아냥 거리는 영화로 볼 수도 있습니다.
▲ 영화 <허삼관> 허삼관의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피가 섞인 하소용? 11년간 키워 온 허삼관? 어떻게 본다면, 핏줄로 맺어진 가족관계에 대해 비아냥 거리는 영화로 볼 수도 있습니다.
ⓒ NEW

관련사진보기


돌아가신 아버지께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 남자아이를 양자로 들이거나, 집안 형편상 '먹는 입(食口)' 하나 줄이려고 딸들도 종종 양녀로 보내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꼭 아들이 없는 집안이 아니어도, 집안 형편이 좋지 않더라도 양쪽 부모들 간에 약속 혹은 진한 우애로 이루어진 관계일 경우에는 양자를 보내고 받았답니다. ​

1960년대나 1970년대 영화나 TV 드라마를 보면 이런 주제를 토대로 갈등을 끌어가는 내용이 나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요즘 드라마도 보면 대리모나 정자 기증의 형태로 부모 중 어느 한쪽의 핏줄이 아닌 아이를 가족으로 들이는 내용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죠.

달리 보면 이미 핏줄이 아니지만 가족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예전부터 상당수 존재했다고 봐야 합니다. 대리모의 경우는 가끔 신문에 나오는 '신생아 매매'처럼 음성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제 친구 부부는 입양을 하였습니다. 그 남자아이가 지금 5살입니다. 그리고 1년 전에 또 남자아이를 입양했죠. 그래서 지금은 두 아들의 아빠입니다. 워낙 남들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고 넉살 좋은 부부라 친구들도 많고 인기도 좋았죠. 그런 부부가 두 아들을 입양하여 알콩달콩 사는 모습을 보고 또 다른 부부도 입양을 결정했습니다. 지금 3개월 정도 된 남자 아이입니다. 그 부부도 저와 친한 부부입니다.

지난 설 연휴(2월 20일)에 입양을 했던 두 부부를 만났습니다. 키우다 보면 속상한 일도 있고 즐거운 일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한 부부의 입양이 좋은 모델이 되고 다른 부부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동참하게 되는 모습을 보니 참 멋진 부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속으로 그들을 응원했습니다. 그리고 멋진 부모를 만난 아이들을 보며 나름대로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실은 저희 가정도 입양 가족입니다. 저의 막내 여동생이 그렇습니다. 35년 전에 신생아를 입양했습니다. 그러나 입양된 지 10여 년 후, 엄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며 우리 가족은 큰 변화를 맞게 됩니다. 있어서는 안 될 일, 다시 보육원으로 돌려보내는 마음 아픈 사건이 발생합니다. 다시는 생각하도 싫은 과거입니다.

얼마 전 그 여동생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오빠! 나 임신했어. 3개월이래."
"정말? 축하한다, 사랑한다 우리 막둥아. 이럴 때 엄마나 아빠가 계시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지난해 30대 중반의 나이에 결혼한 우리 막둥이 여동생이 임신을 했습니다. 작은 댁, 큰 댁 할 것 없이 온 형제가 막둥이에게 축하를 해줬습니다. 이제 엄마와 아빠가 우리에게 남겨준 소중한 생명이 또 다른 생명을 가졌습니다. 가족은 이렇게 탄생되나 봅니다.

요즘 아동학대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나고 입양과 파양에 대한 소문도 심심치 않게 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주위에 입양을 했던 친구들이 생각나더라고요. 그리고 수십 년 전 우리 가정으로 들어온 막둥이에 대한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이상은 영화 <허삼관>을 보며 든 생각을 저희 가정과 제 주위 친구들의 삶을 보며 간략히 적어 보았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입양이란 어려운 결정을 한 두 명의 친구 부부와 우리 막둥이 얘기를 해 볼까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입양이란 것은 우리 가족에게 익숙한 일이었지만 가슴아픈 상처이기도 했습니다. 여동생은 엄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아빠와 삼촌의 얘기를 몰래 듣고 자기가 입양아란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 삼형제는 어린 나이에 막둥이에게 어떤 위로도 도움도 주지 못했습니다. 이후 파양되어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간 막내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음으로 울었습니다. 보육원 먼 발치에서 본 막내는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차마 오빠를 따라가지도 보육원으로 다시 들어가지도 못하고 훌쩍거리고 있었습니다. 다음 편에는 우리 가족의 이야기와 입양을 한 두 친구 부부의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태그:#허삼관, #가족, #식구, #핏줄, #매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