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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의 파리
 흐린 날의 파리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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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무치게 그립네요. 함께 거닐던 사람이 고국으로 떠난 지 불과 서너 시간도 되지 않은 시간,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서 동행하던 사람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진 파리,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 흐렸어요. 차창으로 처연한 빗줄기가 흩뿌렸고, 흐느끼는 지하철을 타고 북역까지 왔어요. 마치 아프리카 땅을 밟은 것만 같은, 흑인 형제들이 가득 에워싸고 있는 역전을 무겁게 걸었고요. 역과 가까워 잡은 민박집의 첫인상은 생각보다 별로였어요.

고백하건대, 저는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도 몰라요. 낯선 땅에 완전히 홀로 남겨진 지금을 말이죠. 지난해 연말, 크리스마스이브에 저는 한 사람과 함께 로마행 비행기에 올랐어요. 크리스마스를 로마에서 보내고 이탈리아 중부지방을 거쳐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프랑스에 왔죠. 화창한 남프랑스에서 새해를 맞은 뒤, 2015년 1월 3일, 오늘, 바로 오늘 유일한 동행자이던 사람을 고국으로 떠나보냈어요.

꼭 열흘을 함께 걸었네요. 함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죠. 뭐라고 덧붙일 말이 더 있을까요. 그런데 간혹, 그러나 매우 강렬하게, 혼자 걸었으면 하는 순간들도 문득문득 밀려오더라고요.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종단하며, 동시에 내뱉는 탄성의 공감과 불현듯 찾아오는 차갑게 엇갈리는 시선이 공존했죠.

결속의 풍요와 구속의 부담을 오가는 시소타기를 짙게 체감한 나날들을 보내며, 동행의 의미와 앞으로 함께 걸어갈 나날들에 대해 생각했어요. 그리하여 떠나보낸 아쉬움의 바다 한 구석에는 기대의 섬도 묵직하게 자리했어요. 오늘을 기다렸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막상 그 순간이 오자, 저는 벌써부터 고독에 짓눌리며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어요.

혼자 여행을 하나요? 함께 하는 편인가요?

작년에도 왔었던 파리 북역에 올해도 왔다.
 작년에도 왔었던 파리 북역에 올해도 왔다.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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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허름한 중국식 식당, 유색 인종이 많은 파리 북역에는 인도 식당, 중국 식당, 베트남 식당, 터키 식당, 일본 식당, '꾸스꾸스'로 잘 알려진 북아프리카식 식당…… 이민자들이 터를 일궜을 식당들이 주위에 널렸어요. 그냥 만만해 보이는, 쌀 요리가 보이고 반찬들도 그다지 이질적이지 않은 '오리엔탈'이라고 적힌 서민적인 중식당에 허기진 배를 채우려 들어왔어요.

진열된 찬거리 두어 개와 쌀밥 종류를 하나 골라 주문했어요. 비가오니, 가벼운 빵보다는 묵직한 한 끼 밥이 먹고싶었나봐요. 저와 비슷한 풍모를 한 동양인 점원은 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요리를 집어들더니, 일회용기에 담아 전자레인지에 데워 주네요. 6~7유로 남짓으로 한 끼 해결할 수 있는 프랑스에서는 저렴한 식당. 그동안 함께 걸었던 사람은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음식을 참 싫어했죠. 함께였으면 이런 곳은 싫어했겠구나. 물론 저도 그래요. 한 끼 식사는 정찬으로 제대로 '슬로우'하게 먹자는 주의죠. 다행히 입맛에는 잘 맞네요.

이번에 제가 드리는 이야기는, 이탈리아부터 남프랑스까지 열흘 동안 함께한 여행과 파리에서부터 벨기에를 거쳐 네덜란드까지 이어질 보름 동안의 '홀로 여행' 순간들일 거예요. 따로 또 같이 유럽을 종단했네요.

혼자 여행을 하나요? 함께 하는 편인가요? 둘 다 일장일단이 있다고요? 함께였기도, 완전히 혼자였기도 한 제 여행 경험을 솔직담백하게 말씀드릴게요. 앞서도 잠깐 말씀드렸는데, 함께여서 풍요로운 결속이 속박이 되는 순간들을 전할 거예요. 어디든 누구의 시선에도 거리낌 없이 거닐 수 있는 자유가 어느덧 시린 외로움이 되는, 즉 지금, 홀로 자유로이 이국땅에 놓여 있으면서 깊은 고독의 빗물에 흠뻑 젖어있는 여기 북역에서와 같은 장면들도 나누고 싶어요.

쌀밥 요리에 곁들인 1664 크로넨버그 맥주(프랑스에서 가장 흔한)를 한 모금 들이켰어요. 수첩을 꺼내들고 함께였던 시간들을 떠올려요. 바로 여기 파리에서 작년까지만 해도 '무신론적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를 읽던 제가, 예수를 붙들고 쫓아 남프랑스 생폴드방스의 수녀원에 깊숙이 들어가 본 사연, 그것도 '금단의 구역'이라던 그녀들의 성소에 외간남자가 터벅터벅 들어가던 순간의 긴장과 호기심이 뒤섞인 떨림, 이 무지막지한 자유주의 세상에서 육신의 자유를 가두고 봉쇄를 택한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요. 겨울에도 눈이 부시던 햇살 가득한 프로방스의 멋진 풍경과 함께 말이죠.

의외로 차분한 분위기던 로마의 크리스마스 풍경도 생각나고요. 이탈리아 중부의 아시시에서는 산길을 오르고 또 올라 당도한 곳, 세찬 산바람이 신비로이 요동치던 요새, 세속과 멀리하고플 때 프란치스코 성인이 훌쩍 떠나와 머물렀다는 은둔소에 가본 얘기도 들려줄게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넘어올 때, 해안선 기차 안에서 맞이한 휘황찬란한 금빛 지중해 풍경도.

겨우내 우중충하다는 '베네룩스'선 어떤 일이...

파리의 고서점(The abbey Bookshop). 상점 앞에 진열해놓은 책 위로 빗물이 떨어지고 있다.
 파리의 고서점(The abbey Bookshop). 상점 앞에 진열해놓은 책 위로 빗물이 떨어지고 있다.
ⓒ 송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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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북쪽으로, 겨우내 우중충하다는 '베네룩스'(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에서는 또 어떤 여정이 펼쳐질까요? 그러고 보니 며칠 후에 이 북역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벨기에로 떠나네요. 제 이야기는 아마도 여행 책에는 잘 소개되지 않았을 거예요. 소개 되었어도 잘 언급되지 않은 옆이나 뒷풍경을 비춘 사연일 거예요. 제가 좀 그래요. '다른 사람 다 가는 곳 말고', '나만의 특별한 명소?'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나르시즘적 기질이 있어요. 좋은 표현으로, 화려한 치장과 북적임의 명소보다는 소탈한 있는 그대로의 멋에 더 매료된다고 해두죠.

파리에서도, 샹젤리제나 에펠탑보다는 서민과 이민자들이 몰려 산다는 19구와 20구를 둘러볼 생각이에요. 그렇다고 다 계획하고 오진 않았어요. 이곳 주민들에게 이렇게 물어볼 생각이거든요. "관광객들 말고 현지 주민들이 자주 찾는 곳을 몇 군데 소개해주세요." 그렇게 계획 없이, 옷깃만 스칠지 모르는 인연에 발걸음을 내맡기며 거닐어도 보려고요.

어찌하다보니 벌써 세 번째 파리에 와서 이렇게 놓여있게 됐네요. 또 지구 건너편 먼 땅으로 오게 되었네요. 무엇이 저를 경계 너머로, 일탈로, 단절과 벗어던짐으로, 떠남과 방랑과 방황으로, 여행으로 이끌었을까요? 원인 모를 아픔에 시달리는 휴직기간 동안에도, 길에서 멈춰 서서 다른 길을 모색하는 순간에도, 다른 비용과 시간은 아끼고 아껴서라도 오늘처럼 떠나오곤 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네요. 물론 이 이야기는 제 이야기예요. 당신의 이야기는 아닐 거예요. 다만 제 이야기가 당신의, 당신만의 여행 감각과 더듬이를 더 넓고 깊숙이 흔들어 놓기를. 오늘의 파리는 흐렸고 스산했고 오직 외로웠어요.

흐린 날의 파리. 유명한 고서점 세익스피어앤 컴퍼니 옆 골목길 풍경.
 흐린 날의 파리. 유명한 고서점 세익스피어앤 컴퍼니 옆 골목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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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의 파리. 일찍 저녁이 찾아오는 겨울.
 흐린 날의 파리. 일찍 저녁이 찾아오는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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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유럽 여행, #파리,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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