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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 어쨌거나 참…, 돌이켜보니 50년 세월인데요, 그래도 진실이 밝혀졌으니까…."

24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나문석 두엄출판사 대표는 담담했다. 오히려 떨떠름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아버지 고 나경일씨는 지난 12일, 46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부장판사 강영수)는 1969년 나씨의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전략당사건)'국가보안법 유죄 판결을 재심한 결과, 그의 혐의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수사기관의 고문·협박에 못이겨 허위자백한 내용뿐이라고 판단했다.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 1심 판결이 나온 1969년 1월 18일자 <동아일보> 기사.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 1심 판결이 나온 1969년 1월 18일자 <동아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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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씨는 박정희 정부 시절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조작으로 9명이 사형당한 인민혁명당 재건위사건(아래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전략당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사건 역시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간첩사건이었고, 촉망받던 경제학자 권재혁씨가 사형당하는 등 그 피해가 컸다. 당시 나경일씨는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자격정지 3년에 처해졌다(관련 기사 : 간첩 몰려 처형된 경제학자 40년만에 한풀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인혁당 사건에 비해 형량은 적은 편이었지만 가족들이 받은 충격은 컸다. 나 대표는 "전략당사건 이후 아버지는 직장을 구할 수 없는 사람이 됐다"며 "가족들에게는 인혁당 사건보다 더 큰 상처가 됐다"고 말했다. 나경일씨는 2심 때 집행유예로 풀려나긴 했지만, 처음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을 때부터 1년 넘게 구금상태였다. 나문석 대표는 "이 사건이 저희에게 미친 영향은 말로 다 설명이 안 된다"며 "짜증나고…, 뭐 이땅에 살고 싶겠냐, 이런 나라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 상하고 너무 싫다"며 답답해했다.

두 글자 때문에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나경일씨는 생전에 이뤄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에서 자신이 어떤 고문을 받았는지를 상세히 증언해뒀다.(☞ 진실·화해위 보고서 바로가기).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이 처음 저를 보고 물은 말이 '(공범으로 잡힌)이형락을 아느냐'였는데 저는 그의 이름을 이권으로 알고 있었기에 모른다고 하니 수사관들이 '이형락은 안다고 하는데 왜 모른다고 하냐'며 엎드려뻗쳐를 시킨 다음 야전침대 각목으로 때리기 시작했는데 그게 부러졌습니다. 하도 맞아서 완전히 파김치가 되고 기절하니 수사관들이 물을 부어 깨웠습니다. 다음날 헌병들이 들것으로 이형락씨를 데려와 대질시켰고, 제가 '이 사람을 이권으로 알고 있었다'고 하니 수사관이 어이없어했습니다. 이름 두 자 때문에 제가 하루 동안 매타작을 당한 것입니다. 저도 무척 힘들었지만 이형락씨 또한 고개도 제대로 못 가눌 정도였고, 눈을 제대로 못 뜨고 저를 겨우 쳐다보는데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때 들것에 실려 왔던 이형락씨는 만기 출소 이후 우울증 등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 다른 피해자 이강복씨는 복역 중 위암으로 사망했다. 두 사람은 2011년 이일재·김봉규씨와 함께 재심 무죄판결을 받았다. 전략당사건 피해자 13명 가운데 처음이었다(관련 기사 : "1만여쪽 수사 기록 발견, 기적이었다"). 지난해에는 억울하게 죽은 권혁재씨의 재심 무죄판결도 확정됐다.

나씨의 경우 전략당사건 피해자 13명 가운데 처벌 수위가 낮은 편이었지만 그는 몇 년 뒤 인혁당 사건으로 또 다시 감옥에 들어간다. 아들 나문석 대표는 "아버지가 감옥에서 보낸 세월이 10년은 넘는다"며 "그래도 당신이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얘기하지도 않으셨다"고 했다.

부자는 그렇게 말없이 고통의 세월을 함께 견뎠다. 동네 사람들은 '여기 왕빨갱이가 사는 줄 몰랐다'며 그들을 피해 다녔다. 가까운 친척들도 나씨 가족들과 왕래할 때마다 조심해야했다. 나 대표는 "(다들) 일단 살아남아야 했다"며 "우리는 친구들도 스스로 멀리했다, 아무리 좋은 친구여도 나 때문에 피해 입는 것은 원치 않으니까…"라고 했다. 아버지는 평생을 '빨갱이' 오명과, 고문후유증과 싸우다 2010년 7월 12일 세상을 떴다.

아버지 명예회복에도 웃지 못한 아들 "조국도, 아무 것도 필요없다"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뒤 8년 8개월의 옥고를 치렀던 고 나경일(76)씨.
 인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뒤 8년 8개월의 옥고를 치렀던 고 나경일(76)씨.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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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일씨는 전략당사건 재심 무죄 판결은 직접 듣지 못했지만 생전에 인혁당 사건의 명예회복은 이뤘다. 그런데 나씨와 가족 등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에게 사과까지 했던 국가는 '채권자'로 돌변했다. 2011년 1월 27일 대법원이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이 청구한 국가배상금의 이자 계산법을 바꿨기 때문이었다. '원고 대한민국'은 2013년 잘못 더해진 이자를 내놓으라며 소송을 걸었고 법원은 그들의 손을 들어줬다. 나문석 대표 역시 패소했다(관련 기사 : 피해자들이 물어야 할 이자... 하루에만 무려 1151만원).

"결국 이중의 고통을 주고 있잖아요!"

나 대표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더 이상 말도 하기 싫은 그런 상황이다. 세상 사람들은 저희가 엄청난 보상을 받은 줄 아는데, 제 인생을 보상받으려면 그 돈의 열배를 줘도 만족 못한다. 액수로 따질 수 없다. 그리고 저희는 여전히 빚 투성이다. ('빨갱이' 낙인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워) 전 생애를 빚으로 살아왔다. 제가 먹고 살고,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진 빚만큼은 국가배상금으로 갚겠구나, 정말 빚 없이 살고 싶다 했다. 매일매일 피가 마르는데… (이자 반환소송) 항소심 때 재판장님도 (원고 대한민국에게) '가족들에게 이러면 안 된다, 두 번 죽이는 일 아닌가'라고 했다. 우리는 진짜 다 죽어가고 있다."

그는 "(정부가 이자) 환수재판을 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다"며 "그런 상황에서 아버지의 또 다른 재판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하다"며 말끝을 흐렸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신 분에 대한 게 이런 거라면…, 조국도 없고, 아무 것도 필요 없다."

46년 만에 아버지는 '빨갱이' 오명을 벗었지만, 아들이 끝내 활짝 웃지 못했다.


태그:#나경일, #남조선해방전략당, #인혁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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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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