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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이 쓰라리고 쓰라린 일이 일어나게 하신 분은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분이시오. 하지만 내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닌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소이다. 내 눈이 멀쩡하다면 저승에 가서 아버지와 불쌍하신 어머니를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이오. 이런 오욕을 스스로 뒤집어쓰고도 내 어찌 백성들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겠소?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오. 그건 안 될 말이오. 내 고통을 감당할 사람은 세상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오.

소포클레스의 희곡, <오이디푸스 왕>의 한 장면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한 죄는 따지자면 오이디푸스의 잘못만은 아니지만 그는 백성에 대한 의무감을 안고 끝까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다. 진실을 마주한 오이디푸스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를 심판했다.

만화 <망월>을 읽으며 오이디푸스 왕이 생각난 이유

<망월 상>(김성재 지음 / 변기현 그림 / 길찾기 펴냄 / 2015.01 / 각 1만4000원)
 <망월 상>(김성재 지음 / 변기현 그림 / 길찾기 펴냄 / 2015.01 / 각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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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망월>을 읽으면서 오이디푸스 왕이 생각난 것은 며칠 전 오종우 교수의 <예술수업>을 읽은 때문이기도 하고, <망월>의 주인공 부자가 겪은 상상하기 힘든 크기의 고통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난 2011년, 5·18 민주화운동은 유네스코 '민주주의 인권분야'의 세계기록으로 등재되며 오늘날 한국 민주화운동에 중심적인 역할은 한 것은 물론, 필리핀과 베트남 등 동아시아의 많은 국가에 영향을 미치고, 냉전종식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왜곡과 폄훼와 모욕의 대상이 아닌, 애도와 추모를 통해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자긍심입니다. - 5·18기념재단 이사장 오재일의 개정사 중

<망월>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에 관한 이야기다. 1979년 10월 김재규의 총탄으로 박정희 정권이 종식됐지만 두 달 뒤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군 사조직 하나회가 쿠데타에 성공하면서 독재정권이 연장된다. 군사독재가 이어지는 어이없는 사태를 두고 볼 수 없던 대학생들과 시민들은 시위에 나서게 됐다.

군사 권력과 언론에 의해 광주 시민들은 빨갱이로, 체제전복을 노리는 폭도로 매도된다. 미군의 묵인 아래 전두환 일당은 빛고을 광주를 핏빛으로 물들인다.

<망월>은 5·18당시 학생·시민·군인·안기부 요원 등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들의 자식들에게까지 대물림 된 깊은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는 이유도 고발하고 있다. 밝혀진 진실까지도 여전히 은폐 조작되고 있고, '님을 위한 행진곡'과 같은 노래가 기념일에도 불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광주의 아픔은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망월 하>(김성재 지음 / 변기현 그림 / 길찾기 펴냄 / 2015.01 / 각 1만4000원)
 <망월 하>(김성재 지음 / 변기현 그림 / 길찾기 펴냄 / 2015.01 / 각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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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파동으로 시위가 연일 이어지던 이명박 정권 초, 실어증에 걸린 김세환이란 노인이 엄기웅이란 노인을 녹슨 칼빈으로 살해하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1980년 5월, 세환은 서울대학교 법대를 수석으로 입학한 학생이었고, 고시에 합격해야 했기에 시위는 엄두도 못 냈다.

시위대를 피해 내려간 광주에서 오히려 비극이 시작된다. 선배와 여자 친구를 비롯한 시민군의 동향을 안기부에 보고하는 '프락치' 노릇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 그리고 여자친구를 위해 대의(大義)를 저버린 세환의 운명은 처참하다.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배신했으니 그에게 남은 삶이 의미 있을리 만무하다.

광주와 광주시민·학생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던 전두환과 그 일당은 지금도 살아있다.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여전히 육군사관학교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골프를 하며 전 대통령으로서의 온갖 혜택을 받는다. 여전히 자신이 저지른 만행이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 지 생각하지 않는 낯빛이다.

오이디푸스는 아폴론의 신탁으로 저주를 받고 태어났다. 발목에 구멍이 뚫린 채 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오이디푸스는 고난 끝에 왕이 됐다. 그러나 예전 자신이 죽였던 남자가 아버지였고 아내 이오카스테는 자신의 어머니였다. 백성들에게 떳떳하기 위해서 그는 역경을 택했다. 오이디푸스는 그렇게 우리에게 영웅이 된 것이다.

지도자가 영웅이 되는 순간, 국가와 국민은 번영과 행복의 길을 걷게 된다. 번영과 행복의 길은 여전히 우리 국민들에겐 사치일지도 모른다. 지도자였던 독재자들과 지금의 지도자들에게 영웅을 기대하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을 기대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가 경외해마지 않던 백성들, 바로 우리들이 <망월>을 읽고 기억하고 후손에게 전해야 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망월 상><망월 하>(김성재 지음 / 변기현 그림 / 길찾기 펴냄 / 2015.01 / 각 1만4000원)



망월 - 하

김성재 지음, 변기현 그림, 이미지프레임(2015)


태그:#망월, #518,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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