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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15일 오후 5시 23분]

"대덕사(다이토쿠지, 大徳寺)의 '대덕'이란 이름은 절이 건립되기 전의 고려(高麗) 연호지요. 그런데 스님은 1459년 대덕사의 주지가 조선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그 한국인 주지가 바로 전대의 주지를 지낸 '여소'이며 그 스님을 그린 화가 '문청'도 조선인이라는 것을 아시는지요?"

이는 미국인 최초로 일본미술사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01~1996) 박사가 그의 책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2008)의 '대덕사 삼문(三門, 金毛閣)의 고려 16나한상' 편에서 한 말이다.

기자는 2월 14일 교토시 서북쪽 외곽에 있는 임제종 절인 대덕사를 찾았다. 임제종대덕사파 총본산인 만큼 규모도 엄청나서 30만평 부지에 말사만도 23개소에 달하고 있는 절이다. 평소 코벨 박사의 글을 읽기도 했거니와 기자 역시 일본 속의 한국문화를 찾아 글을 쓰는 사람으로 교토에 발걸음을 한 김에 코벨 박사의 발자취도 돌아볼 겸 대덕사를 찾았다. 날씨는 쾌청했으나 약간 쌀쌀했다. 교토역에서 버스로 금각사 방향으로 40분을 달리면 닿는 곳이다.

코벨 박사의 발자취 따라 온 일본의 대덕사

삼문(일명 金毛閣) 안에는 고려시대 16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 삼문 삼문(일명 金毛閣) 안에는 고려시대 16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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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에 금박을 한 금각사는 한국에 잘 알려진 절인데 금각사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대덕사는 23개의 말사(일본에서는 탑두 '塔頭'라 함)를 거느린 큰 절이지만 사람들이 잘 모른다. 이곳은 대선원(大仙院)을 포함한 4군데 외에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 팻말이 놓여 있는 비공개 암자가 대부분이다. 

대덕사 안에 옹기종기 기다란 담장을 치고 들어 앉아 있는 말사 <(암(庵), 원(院), 사(寺)>의 건물들은 말끔한 기와집이 많았다. 특히 코벨 박사가 대덕사에서 공부할 때 묵었던 진주암(眞珠庵)은 수많은 암자 가운데서도 오래된 역사를 말해주는 듯 대덕사 본당 한쪽 이끼낀 정원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본 대부분의 절은 한국의 절처럼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따라서 누구나 쉽게 절에 들어가서 잘 가꾸어진 정원이나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다만, 절 안의 특수한 곳은 입장료를 받고 공개한다. 대덕사도 각 암자별로 보여 줄 곳이 많은 곳만 입장료를 받는다.

사실 기자는 코벨 박사가 머물렀던 '진주암'을 보고 싶었으나 비공개지역이라 암자 안은 들어가지 못한 채 코벨 박사가 드나들었던 대문 앞에서만 서성거려야 했다.

교토 대덕사 진주암에 선 기자. 아쉽게도 진주암은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 신주암 교토 대덕사 진주암에 선 기자. 아쉽게도 진주암은 일반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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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다 나가마사 쇼군(將軍)의 원찰 용광원(龍光院, 료코인)에는 그가 1590년 조선의 어느 절에서 해체시켜 훔쳐 온 건축 구조물이 들어서 있다. 본전에는 신라시대 향로를 놓고 조선의 문과 창문을 설치했고 마당에는 고려 시대 석등을 세워놓았다."

코벨 박사는 대덕사에 머물면서 일반인들이 접할 수 없는 수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비공개로 하고 있는 수많은 암자들을 무시로 드나들면서 찬찬히 보아온 "한국에서 온" 것들을 기록해 놓았다. 물론 사진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임진왜란 때 빼앗아온 한국 물건들이 많은 용광원

"대덕사의 2층 문루로 된 삼문은 1590년 다도의 대가 센리큐(千利休, 1522-1591)가 세웠다. 이층문루에 있는 16나한상은 가등청정(가토기요마사)이 조선에서 가져와서 대덕사에 기증한 것이다. 이는 1933년 일본의 대학교수 20명이 집필한 일본관광안내서에 나와 있다"고 코벨 박사는 쓰고 있다. 일본 교수들도 차마 "도적질해서"라고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멀쩡한 조선의 건축물을 뜯어 온 것 자체가 도적질이 아니고 무엇이랴!

뿐만이 아니다. "용광원 주지 고보리 안레이 스님은 대덕사의 200여 명 절집 식구들 가운데 영어를 할 줄 아는 단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용광원은 1606년에 세워진 절인데 이 절은 내가 아는 일본 내 어느 곳보다 임진왜란 때 전리품으로 뺏어온 많은 한국의 물건들을 소장하고 있다. 조선시대 절의 목조미술품(불상), 이도다완, 석등, 불화, 그 외 여러 물건들이 이 절에 있다"고 코벨 박사는 증언했다. 

불화만 해도 그렇다. 코벨 박사는 '대덕사 <양유관세음도>의 고려 국적 찾기' 글에서 뛰어난 고려불화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더 심각한 문제는 이곳에 소장된 '고려불화'가 중국 것으로 국적이 잘못 표기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1978년 10월 18일 나라(奈良) 야마토분카(大和文化館)에서 열린 '고려불화특별전'에서는 그동안 9세기 일본화가 가나오카가 그렸다고 믿었던 <양유관세음도>와 8세기 중국화가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불화가 모두 <고려불화>로 밝혀진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고 했다.

대덕사의 총문(総門, 소몽)을 들어서면 바로 만나는 삼문 (三門) 역시 비공개지역이다. 그러나 울타리가 낮아 사진만은 찍을 수 있었다. 만일 누각에 올라갈 수 있다면 그 누각에는 코벨 박사가 말한 고려시대의 16나한상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천여 년이나 됐음직한 이 16나한상은 또 어느 절에서 훔쳐온 것이란 말인가? 모두 베일에 싸여 있을 뿐이다.

대덕사의 가람을 자유자재로 드나들었던 코벨 박사는 대덕사의 모든 건축물 지붕에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문양인 삼태극의 소용돌이가 새겨진, 기와가 궁금하여 어느날 대덕사 주지에게 물었다. 그러나 주지는 삼태극이 조선의 문양이라는 사실은 잘 모른 채 1314년 아카마츠 집안에서 돈을 대어 대덕사가 완성되었다는 답을 하고 만다.

아카마츠(赤松)란 적송으로 조선 소나무를 뜻한다. 일본에는 적송이 없다. 적송 집안이라면 조선과 밀접한 인연이 있는 집안일 것으로 코벨 박사는 생각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대덕사에는 조선과의 인연이 깊은 인물들이 많다.

먼저 대덕사의 선승이자 시인으로 유명한 잇큐(一休宗純, 생년월일 모름)의 어머니는 고려국 궁녀와 일왕(100대, 後小松天皇)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며 다도의 명인으로 다성(茶聖)이라 일컬어지는 센리큐(千利休)도 한국인 천씨 가문의 성씨로 조선과 밀접하다고 했다.

한국문화를 받아들인 거대한 저수지 대덕사

 대덕사에는 23개의 암자가 있는데 고작 4곳만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용광원도 비공개지만 이날 입구쪽 작은 뜰은 열려있었다.
▲ 용광원 대덕사에는 23개의 암자가 있는데 고작 4곳만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용광원도 비공개지만 이날 입구쪽 작은 뜰은 열려있었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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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일본 선화(禪畵)의 창시자라고 알려진 죠세츠의 아들은 <묵죽화첩>을 남긴 화가 이수문(李秀文)인데 여태까지 일본에서는 이수문을 일본의 주분(周文)과 같은 인물로 혼동하고 있었다고 코벨 박사는 지적했다. 이수문은 그의 <묵죽화첩>에 자신이 조선인으로 일본에 온 경위를 밝히고 있다.

코벨 박사는 조선개국과 함께 조선 조정에서는 도성 안에 승려 출입을 금하는 등의 정책을 펴 유능한 고려의 승려(특히 승려 출신 화가)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오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일본에 건너온 조선  출신 승려들은 법명으로만 남아 그들의 뛰어난 작품들이 일본인으로 '둔갑' 되어 남아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푸른 눈의 미국인 처녀가 일본 대덕사에 건너와서 일본의 뛰어난 선(禪) 문화에 심취한다. 그리고 그것을 정리하여 미국인 최초의 동양학 박사가 된다. 그런 그녀의 공부가 깊어질수록 그 원류가 한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본고장의 문화를 공부하고자 한국에 건너온다. 그리고 일본 대덕사에서 본 '일본문화'가 우물안 개구리였음을 실토한다. "내가 처음 대덕사에 가 있던 5년간은 일본문화와 코리안커넥션(한국과의 유대)을 알아채지 못했다(1974년)"고 실토했던 것이다.

대덕사 대선원 안의 매화는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 매화 대덕사 대선원 안의 매화는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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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마침내 대덕사야말로 "한국문화를 받아들인 거대한 저수지" 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가 연구한 일본의 선(禪)만 해도 한국보다 400년이나 뒤진 선(禪)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한국에서는 7~8세기에 이미 선종사찰이 등장하고 9세기에는 한국불교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지만 일본은 12세기에 선종이 도입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코벨 박사는 자신에게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일본 속에 들어 와 있는 한국문화를 더 소개하고 싶다고 했는데... 아쉽다. 진주암 앞에서 이끼낀 정원(정원이랄 것도 없는 손바닥만한 뜰)을 서성이며 기자는 많은 생각에 잠겼다.

코벨 박사는 이 세상을 떠났다. 고색창연한 진주암은 지금 일반인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대나무 한 토막을 대문에 가로 질러 놓았다. 마치 그것은 진주암의 모든 것은 진주암 것, 곧 일본에 건너온 한국 것은 모두 '일본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진주암의 하늘은 높고 푸른데 코벨 박사는 저 하늘 어딘가에서도 '일본 속의 한국문화를 찾는 일'을 계속하는 것일까? 많은 상념에 젖으며 대덕사를 나왔다.

* 찾아 가는 길 :  京都府 京都市 北区 紫野大徳寺町 , 교토역에서 시영버스 205번을 타고 30여분 거리의 대덕사 앞 정류장에서 내리면 바로 있다.

덧붙이는 글 | 한국문화신문과 대자보에도 보냈습니다.



태그:#대덕사, #코벨, #고려문화재, #고려석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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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시인.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한국외대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일본 와세다대학 객원연구원, 국립국어원 국어순화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운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냄 저서 《사쿠라 훈민정음》, 《오염된국어사전》,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는 시집《서간도에 들꽃 피다 》전 10권, 《인물로 보는 여성독립운동사》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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