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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해산 결정한 헌재 판결을 정면 비판한 책이 나왔다. 필진은 이 사건의 소송대리인단(단장 김선수 변호사)이다.

소송대리인단은 이 책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무엇이 문제인가?>(도서출판 말)를 발간한 기념으로 지난 12일, 서울 서초동 변호사교육문화관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 책의 '평석'을 대표 집필한 김선수 변호사는 인사말을 통해 "통합진보당을 해산하여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 후,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으로 재판 절차를 진행한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며 헌재 재판관을 비판했다.

2월 12일 서초동 변호사교육문화관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무엇이 문제인가?> 출판기념회. 앞줄 좌로부터 한상희 교수, 이재화·김선수·이한본 변호사.
▲ 궁예의 관심법으로 결정 2월 12일 서초동 변호사교육문화관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무엇이 문제인가?> 출판기념회. 앞줄 좌로부터 한상희 교수, 이재화·김선수·이한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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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파 재판관들은 보충 의견에서 <한비자(韓非子)><설림상편(說林上篇)>에 나오는 '아주 작은 싹을 보고도 사태의 흐름을 알고 사태의 실마리를 보고 그 결과를 알아야 한다(見微以知萌 見端以知末)'는 구절을 원용하면서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주장했어요. 그런데 위 구절은 예언가나 점쟁이가 쓰기에 적합한 말이지, 헌법재판관이 엄격한 판단을 해야 할 정당해산심판 사건에 원용할 수 있는 구절은 아닙니다.

싹이 나지도 않았고, 아무런 위험성도 발현되지 않았는데 선제로 그 가능성의 씨앗을 죽여 버리는 것은 엄격한 증거재판주의 원칙,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 원칙, 정당해산의 최후 수단성 원칙에 정면으로 반하기 때문이죠. 선무당이 사람 잡는 우'를 범할 수 있거든요."

선무당이 사람 잡는 우를 범한 재판

김선수 변호사는 다수파의 입장을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명분으로 유신을 합리화하는 논리"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덧붙여, 그는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이유로 국제적 기준에 눈감은 다수 의견은 바다를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 또는 겨울 얼음을 모르는 '여름 벌레'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국제사회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좌담에 참석한 한상희 교수(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헌법학)는 진보정당해산 사건으로 '분노조절장애'에 빠졌다며 헌재의 판결에 분개했다.

"황교안 법무부장관은 최종 변론에서 <한비자(韓非子)>의 '제궤의혈(堤潰蟻穴)', 즉 "개미구멍으로 큰 둑이 무너진다"는 구절을 원용했어요. 그런데 왜 21세기에 <한비자>를 인용합니까? 그때는 흙으로 둑을 쌓아서 개미구멍도 조심해야 하지만, 요즘은 폭격에도 끄떡없게 콘크리트로 잘 만들잖아요. 개미구멍 아무리 많아도 둑 안 무너집니다."

헌재 재판관들이 '개미구멍'을 두려워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에 너무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한 교수는 무엇보다도 침묵하는 법학자들에게 화가 난다고 했다.

"헌법이 유린당하고 절단당한 상황에서 헌법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오늘 같은 자리에 헌법학자들이 많이 참석해야 해요. 헌재 때문에 내가 헌법을 배우던 1970년대 유신 시대로 돌아갔어요. 유신 시대에 입을 다물던 사람들이 이 결정을 정당화하는 일에 앞장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들에게 우리의 분노가 전달돼야 해요."

한상희 교수와 함께 좌담한 이재화 변호사는 헌재 재판관들이 세 가지 잘못된 판단 기준을 갖고 있으며, 이로 인해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고 말했다.

"첫째, 헌재 재판관들은 그릇된 민주주의관을 갖고 있는데, 이들은 반공주의가 민주주의라고 착각하고 있어요. 두번째, 헌법 위에 국가보안법이 있다는 생각을 해요. 세번째, 이들은 북의 언행을 기준으로 헌법 해석을 합니다. '진보적 민주주의', '연방제' 등에 대한 판단 기준도 헌법이 아니라 북한의 말이에요."

재판정에서 공공연히 사상검증 하기도

이재화 변호사는 특히 헌재 재판관들이 증거가 아닌 궁예의 관심법에 기초해서 재판했다며 소리를 높였다.

"재판정에서 공공연히 사상검증이 벌어졌어요. 국정원 협력자인 이성윤 증인에게 당원 이름 대면서 엔엘(NL)이냐 피디(PD)냐 묻게 해요. 헌법재판소에서 헌법을 위배하며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무시하며 재판하는 거예요.

김영환이 증인으로 나와서 손가락 총을 쏘는 데도 제지하지 않았어요. 1946년 여순사건 때 손가락으로 빨갱이라고 지목하면 끌고 가서 총살했잖아요. 김영환의 추측성 진술이 정당 해산 판결의 기초가 됐어요."

해산된 통합진보당의 강병기 당대표 후보(좌측)가 출판기념회에 참석해서 필자인 소송대리인단의 얘기를 듣고 있다.
▲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해산된 통합진보당의 강병기 당대표 후보(좌측)가 출판기념회에 참석해서 필자인 소송대리인단의 얘기를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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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대리인단에 참여했던 변호사들이 돌아가며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이광철 변호사는 "재판관들이 최소한 증거와 법리에 근거해 판결할 줄 알았는데, 이번 판결로 사법부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마저 사라졌다"고 말했다.

"권영길 전 민노당 대표의 증언이 감동적이었다. 단지 통합진보당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구하려고 나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윤덕 변호사)

"처음엔 9:0 전원 일치로 정당해산 청구가 기각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12월 19일로 서둘러 선고기일 잡는 것을 보고, 8:1이라는 최악의 결정을 예상했다." (최용근 변호사)

"이 책은 당연히 헌법재판관들이 읽어야 한다. 사법연수원에서 헌법 가르치던 판사 출신 교수도 있었는데, 이런 결정이 나온 것을 보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이한본 변호사)

"애 둘 키우는 엄마인데 얼른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내버려두면 안 되는 일이다. 대법원이 내란음모 무죄 선고하고, RO(혁명조직)가 없다고 판단했는데, 헌재는 이와는 전혀 다른 사실에 기초해서 정당 해산을 결정했기 때문에 재심해야 한다." (하주희 변호사)

'쓸모 있는 바보들'이 누구인가?

소송대리인단이 '세기적 참사'라 부른 정당 해산 사건을 다룬 이 한 권의 책 속에는 단순히 정당 해산을 둘러싼 법리 논쟁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예민한 이념 문제, 민주주의와 헌법 정신을 둘러싼 변호사와 헌법학자의 고민이 담겨 있다.

헌재 결정 직후 소송대리인단은 "오늘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대한 사망선고이자 헌법재판소 자신에 대한 사망선고"라고 선언했다. 홍윤기 교수는 "8명의 헌재 재판관이 발포한 12월 유신"이라고 격분했다. 김선수 변호사는 "이 사건 결정으로 우리 사회는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오세아니아가 되고 말았다"며 헌재의 결정을 비판했다.

헌법재판소의 정당 해산 결정에 대한 통합진보당 소송대리인단의 공식 비판서인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무엇이 문제인가?>(도서출판 말)가 출간됐다.
▲ "대한민국은 입헌주의의 갈라파고스 섬이 됐다" 헌법재판소의 정당 해산 결정에 대한 통합진보당 소송대리인단의 공식 비판서인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 무엇이 문제인가?>(도서출판 말)가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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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해산에 찬성한 다수파 헌법재판관들은 보충의견을 통해 피청구인(통합진보당)의 해산에 반대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쓸모 있는 바보'들로 희화화했다.

"그들(피청구인 주도세력)의 가면과 참모습을 혼동하고 오도하는 광장의 중우(衆愚), 기회주의 지식인·언론인, 사이비 진보주의자, 인기영합 정치인 등과 같은, 레닌이 말하는'쓸모 있는 바보들'이 되지 않도록 경계를 하여야 한다."

김선수 변호사는 "헌재 재판관들은 피청구인 대리인인 변호사들도 '바보들'로 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면 '쓸모 있는 바보'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게 된다. 진보정당을 해산하고 민주주의를 유신 시절로 돌려놓으려는 박근혜 정권의 '가면과 참모습을 혼동하고 오도'한 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헌법의 이름으로 헌법을 짓밟은 '쓸모있는 바보'의 모습이 떠오른다.


통합진보당 해산결정, 무엇이 문제인가?

김선수 지음, 한상희 좌담, 도서출판 말(2015)


태그:#헌법재판소, #통합진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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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는 채식과 마라톤, 지금은 달마와 곤충이 핵심 단어. 2006년에 <뼈로 누운 신화>라는 시집을 자비로 펴냈는데, 10년 후에 또 한 권의 시집을 펴낼만한 꿈이 남아있기 바란다. 자비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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