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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나올듯 말듯. 푼힐의 일출.
 해가 나올듯 말듯. 푼힐의 일출.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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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명의 사람들은 서쪽을 등지고 일렬종대로 서 있었다. 30분 동안 산길을 오르느라 넓어진 땀구멍으로 차고 축축한 공기가 빨려들어 왔다. 어제 온 비로 일출 전망이 좋을 거라던 산장 주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해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이내 덜 익은 밥알처럼 제각기 흩어졌다. 일출 없는 푼힐 전망대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건 밀크티다. 따뜻한 차를 한 잔씩 받아든 사람들은 뭐가 좋다고 속도 없이 희희낙락이다.

오늘로 스물두 날째다. 포카라에서 버스를 타고 베시사하르에 도착했던 스물두 날 전. 강바람을 맞으며 잠이 들었던 첫날밤. 죽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으며 넘은 쏘롱 라. 맞바람을 가르며 두 무릎을 꿇고 기어 내린 벼랑길. 그렇게 스물두 날. 푼힐 전망대에 오른 우리 둘은 그야말로 산사람이다.

네팔 사람들도 엄지를 치켜드는 더스틴의 덥수룩한 수염. 하얀 눈에 반사된 햇살에 거뭇하게 탄 얼굴. 헝클어진 머리카락. 구멍 난 셔츠. 다 떨어진 등산화. 옷만큼 헤진 표정. 그래, 이 표정. 푼힐을 오른 사람들과 대조되는 이 표정. 이 사람들은 뭐가 이리 즐거운가. 포카라에서 고레파니로 어제 막 도착했다는 서른두 명의 한국인 트레커 그룹. 푼힐 등반을 맞이해 얼굴도 새로 갈아 끼운 듯 신선하고 산뜻하다.

한달이 아니라 일년은 산에 있었던 것 같은 우리의 몰골.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삼십분 동안 산길을 올랐더니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지만, 일단 웃자. 웃어.
 한달이 아니라 일년은 산에 있었던 것 같은 우리의 몰골.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삼십분 동안 산길을 올랐더니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지만, 일단 웃자. 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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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그들에게 푼힐은 휴가지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푼힐은 스물두 날의 산행 끝에 닿은 또 다른 골목이기 때문이다. 스물두 날 후의 안나푸르나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두려움이기도 하다. 강한 맞바람의 피로함이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이고, 무심한 자연이다. 산뜻한 얼굴을 한 휴가자들에게 푼힐은 아름다움일 뿐이다. 경이로움과 설렘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설렘은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에 섞여 빛이 바랬다. 설레는 마음으로 순수한 아름다움만 담아갈 수 있는 휴가자들을, 나는 질투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스물두 날 만에 처음 만나는 한국인이지만, 나는 이들에게 아무런 동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동질감을 느끼는 존재들은 나의 동료다.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스쳐 지났던, 함께 산을 오른 사람들. 이제는 모두 떠나고, 더스틴과 네덜란드 커플만 남았다.

"오늘 내려가? 우리는 촘롱으로 가려고."
"촘롱? ABC 트레킹* 하게?"
"응, 또 언제 오겠어."
"하긴…. 경치는 ABC 쪽이 더 좋다고 하더라. 대단하다. 우리는 오늘로 끝. 더는 못하겠어."


마지막 남은 동료인 네덜란드 커플과도 여기서 안녕이다. 오늘은 조금 외로운 하산길이 될 것이다. 헤어지기 아쉽다는 이유로 동료를 따라 ABC로 갈 수는 없다. 더는 못하겠다. 목숨을 내놓고 산을 오르는 일에 지쳤다. 목숨을 내놓는 일은 쏘롱 라로, 맞바람에 몸을 휘청이며 걸었던 좀솜의 벼랑길로 족하다. 도시로 돌아가, 몸을 쉬이자.

스물두 날 간의 트레킹 이후에도, 안나푸르나는 여전히 아름답다.
 스물두 날 간의 트레킹 이후에도, 안나푸르나는 여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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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날으는 마법 버스를 타고, 포카라로

몸에서 빨간 불이 깜박거렸다. 금방이라도 꺼지려는 힘을 짜내 8시간 동안 산을 내려왔다. 두 발로 걷는 건 이제 끝이다. 우리는 조금 섭섭해져서 나야풀 버스 정류장에 섰다. 끝이다. 끝. 호텔로 가자. 살이 데일 만큼 뜨거운 물로 샤워하자.

푹신한 침대로 뛰어들어 퀴퀴한 이불 냄새를 맡으며 잠들자. 해질 무렵 일어나 거리를 어슬렁대다 저녁을 먹고 맥주를 마시자. 며칠이고 그러자. 우리는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고행 후의 휴식은 더 달콤한 법이니까. 시무룩하던 우리는 다시 웃었다. 몸이 간지러워질 때까지, 지치도록 게으르자.

버스는 오지 않았다. 포카라로 향하는 들뜬 마음이 다 말라버릴 만큼 오랫동안. 지루해진 심신에 스프라이트를 한 병 쏟아 부었다. 먼지까지 반 병쯤 마시고 난 후에야 미덥지 않은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안은 고요했다. 이런저런 보따리를 들고있는 아주머니들, 안경 쓴 젊은 여자, 어린 손녀의 손을 꼭 붙잡고 앉은 할아버지.

성경책을 펼쳐 든 아주머니. 그리고 지붕 위의 젊은 남자들. 남자들은 언제나처럼 버스 지붕 위에 올라앉아 신나게 떠들어댔다. 뭐라고 떠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버스 지붕 위에 타지 않는 건 젊음이 아니라고 늙어버린 승객들을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버스는 그렇게, 버스 안팎에 덕지덕지 붙은 사람들을 태우고 산길을 내려갔다.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의 종착지인 나야풀의 고도는 아직 1070m이다. 도로 사정은 우리가 두 발로 걸었던 좁은 산길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벼랑의 옆구리를 대충 깎아 놓은, 차 한 대가 서기엔 조금 모자란 길 위를 몸집 큰 깡통 버스가 용케도 따라 굴러갔다.

"창문 아래 보지 마. 아무것도 없어."


창가에 앉은 더스틴이 손등이 하얘지도록 손잡이를 꼭 붙들었다. 버스는 네 개의 둔한 바퀴를 벼랑 끝에 겨우 걸치고 있었다. 낭떠러지 쪽인 왼쪽 창가에 앉은 우리는 버스가 하늘을 날고 있는 듯한 착시 현상을 느껴야했다. 우리는 날고 있는가. 날아갈 걸 그랬나. 항공 사고가 잦은 네팔이지만, 사실 항공 사고보다 버스 사고가 훨씬 많은 네팔이다. 그럴 만도 하다. 버스의 바퀴가 길에서 벗어나, 날으는 마법 버스를 타고 승객 전원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소치는 어린 꼬마
 소치는 어린 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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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비가 와서 전망이 좋을거라던 산장 주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구름 뿐이다.
 어제 비가 와서 전망이 좋을거라던 산장 주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구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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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버스는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요염하게 구불대던 길은 산의 양쪽 끝에서 급하게 꺾어 들어갔다. 머릿속에선 버스가 꺾어 돌다 반동으로 튀어 나가, 설산을 배경으로 아름답게 공중부양하는 장면이 무한 반복됐다. 버스 대신 점심으로 먹은 야채 볶음면이 뱃속에서 공중부양했다. 식은땀에 젖어 미끄러운 두 손으로 손잡이를 어떻게든 부여잡았다. 마치 하늘로 튀어 오른 버스 안에서 손잡이를 잡고 있는 것이 도움이라도 될 거라는 듯이.

나는 버스 안을 살폈다. 여전히 고요하고 평화롭다. 동요하고 있는 건 우리 둘뿐이다. 네팔 사람들에겐 일상이다. 바퀴를 반쯤 걸치고 낭떠러지를 구르는 위태로운 버스 안에서, 할아버지는 손녀의 시답지 않은 재롱을 보며 껄껄대고 있었고 정신 나간 젊은이들은 버스 지붕 위에 앉아 산 공기 속으로 바보 같은 웃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뒷좌석에 앉은 아주머니는 성경책을 읽는 듯 조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이면 헛갈리는 것이다. 우리가 민감한 것인가 이들이 정신이 나간 것인가?

버스 안에 시큼한 냄새가 퍼졌다. 더스틴과 나도 아직 속을 게우지 않았는데 누가? 어린 손녀였다. 아니 지붕 위의 정신 나간 젊은이들이었다. 어린 손녀가 비닐봉지 안에 속을 게워내는 동시에 더스틴이 앉은 창문 밖으로 시큼한 물이 떨어졌다. 버스는 광분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네팔 사람들이 느끼기에도 정상이 아니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더 빠르게. 비탈길을 빠르게 달리던 버스가 급하게 코너를 꺾었다. 속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공중부양의 시간이다.

"비스타디('천천히'라는 뜻의 네팔어)! 비스타디!"


코너를 돈 버스는 용케도 길에 붙어서 광분의 속도로 산길을 내리길 계속했다. 천천히! 천천히! 얌전하고 평화롭던 승객들이 좌석에서 엉덩이를 떼고 반쯤 일어나 기사에게 항의했다. 젊은 기사는 승객들의 항의를 들었는지 말았는지 속력을 줄이지 않았다. 아니 줄일 수 없는지도 모른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게다. 이대로 계속 간다면 가속도는 더 붙을 것이고, 코너를 다시 한 번 꺾는 순간 머릿속에서 무한 반복되던 버스의 공중부양은 현실이 될 것이다.

네팔 사람들도 엄지를 치켜드는 더스틴의 덥수룩한 수염.
 네팔 사람들도 엄지를 치켜드는 더스틴의 덥수룩한 수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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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에 반사된 햇살에 거뭇하게 탄 내 피부. 빛바랜 표정. 산 여인 납시오.
 하얀 눈에 반사된 햇살에 거뭇하게 탄 내 피부. 빛바랜 표정. 산 여인 납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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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반쯤 졸며 성경책을 묵상하던 뒷좌석의 아주머니가 괴성을 질렀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성경책 뒷면의 찬송가를 펼친 아주머니는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끝을 예감한 거다. 무슨 끝? 생의 끝. 아주머니의 박수소리를 따라 내 심장은 고동쳤다.

우리 죽는 거야? 이게 끝이야? 목숨을 내놓고 산을 올랐던 건 다 뭐였어? 이제 다 내려왔는데 이게 뭐야? 목숨을 내놓는 일에 지쳐서 이제 내려간다는데 꼭 이래야겠어? 이렇게 끝나는 거야? 고작 이거야? 정말 어처구니없는 인생이군! 나는 아주머니를 따라 조용히 할렐루야를 중얼거렸다. 할렐루야의 중얼거림은 머지않아 욕설로 변했다. "에라이. 이따위 인생." 이제 살아남는 건 기적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기적 같은 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남편아 그동안 고마웠다. 우리, 후회는 말자.

기적이 일어났다.

"..."
"살았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게 빠르게 구르던 버스는, 다시 무슨 영문인지 모르게 정상 속도를 되찾았다. '비스타디'를 외치던 승객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평화롭고 착한 얼굴을 하고 좌석에 앉아 살던 삶을 계속 살았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계속되었다.

스물두 날 후의 안나푸르나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두려움이기도 하다. 강한 맞바람의 피로함이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이고, 무심한 자연이다.
 스물두 날 후의 안나푸르나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두려움이기도 하다. 강한 맞바람의 피로함이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이고, 무심한 자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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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날 후의 안나푸르나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두려움이기도 하다. 강한 맞바람의 피로함이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이고, 무심한 자연이다. 산뜻한 얼굴을 한 휴가자들에게 푼힐은 아름다움일 뿐이다. 경이로움과 설렘만 있을 뿐이다.
 스물두 날 후의 안나푸르나는 여전히 아름답지만 두려움이기도 하다. 강한 맞바람의 피로함이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이고, 무심한 자연이다. 산뜻한 얼굴을 한 휴가자들에게 푼힐은 아름다움일 뿐이다. 경이로움과 설렘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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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상관 없다지만, 이건 아니다

어쨌든 간에 죽지는 않았으니 호텔로 가야 했다. 호텔에 맡겨 둔 짐을 찾아야 했다. 고양이를 안은 낯익은 소녀가 우리를 맞았다. 한 달 전에 묵었던 숙소도, 고양이도, 소녀도 그대로다. 변한 건 우리뿐이다. 몸은 더러워졌고 머리는 무모해졌으며 전반적으로 조금 이상해졌다. 비행기고 기차고 출발 4시간 전에는 공항에 기차역에 도착해야 했던 더스틴도 조금 이상해졌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하기야. 어쨌거나 죽지 않았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소녀를 따라 우리 짐이 있는 창고로 갔다. 더스틴이 문을 열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왜?"

뭐니 그 똥 씹은 표정은.

"똥."
"뭐?"
"똥이 있어."
"똥?"
"응. 똥. 누가 우리 짐 위에 똥을 싸놨어."


똥 씹은 표정으로 한다는 말이 누가 똥을 싸놨다니. 반쯤 열린 창고 문 사이로 냄새가 새어나왔다. 똥 냄새가. 냄새로 확인했으니 두 눈으로는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짐이고 뭐고 이 자리에서 뒤로 돌아 그대로 호텔을 나가 버리면 인생이 편해진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더스틴이 창고의 문을 활짝 열었다. 처참한 광경을 후각과 시각의 공감각으로 맞이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일단 코를 막았다.

"똥…."

편편하게 펴진 검은 더플백 위로 묽은 황토색 설사가 폭탄처럼 터져 있었다. 오줌도 지려놨다. 냄새는 아주 '프레시'했다. 나는 소녀의 이름을 외쳤다.

"라이!"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의 종착지인 나야풀의 고도는 아직 1,070m이다.
 안나푸르나 라운딩 코스의 종착지인 나야풀의 고도는 아직 1,070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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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은 모두 떠났다.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스쳐 지났던, 함께 산을 오른 나의 동료들. 오늘은 조금 외로운 하산길이 될 것이다.
 동료들은 모두 떠났다.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스쳐 지났던, 함께 산을 오른 나의 동료들. 오늘은 조금 외로운 하산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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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맞이했던 밝은 미소를 아직 거두지 않은 단발머리의 라이가 창고로 들어왔다. 지금 웃어? 이 꼴을 보렴? 짐을 맡겨달라니까 똥을 싸놔? 포카라나 카트만두의 숙소에 짐을 맡기고 트레킹을 갔다가 도난당했다는 소리를 들어봤어도, 똥? 살아남았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은 취소다. 아무래도 상관없다지만, 똥은 좀 아니잖아?

"오 마이 캣!"

창고를 어슬렁대던 회색 고양이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눈치채고 요염하게 꼬리를 흔들며 창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고양이 똥이었다. 왜 하필 창고였을까. 왜 하필 창고의 왼쪽 구석이었을까. 왜 하필 우리 가방 위였을까.

"미안해요. 우리 고양이 때문에…. 여기 가방…."

라이가 똥을 대충 쓸어내고 가방을 내밀었다. 받기 싫다. 차라리 도난당했다면 똥을 치울 일은 없었을 것을. 나는 더스틴의 눈치를 살폈다. 나 대신 가방 좀 받아. 비위 약한 더스틴이 이 가방을 받을 리 없다. 몽땅 버렸으면 버렸지 그럴 리 없다.

내 예상을 깨고, 더스틴이 침착하게 가방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배설물이 가방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지퍼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이건 아웃."

3개월 넘게 여행을 함께한 크로스 백은 아웃이다. 더스틴이 쓰던 여행용 노트도 아웃이다.

"겉만 닦으면 괜찮지 않아?"
"똥 뭍은 노트를 닦아서 쓰라고?"
"…. 아니."
"이 티셔츠는…. 킁킁(냄새를 맡는다). 아웃."


그렇게 두 시간. 고약한 고양이똥 냄새를 맡으며 짐을 선별했다. 아웃당한 짐들은 더플백과 함께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쓰레기를 담은 봉투를 꼼꼼히 싸는 더스틴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자식 꽤 의젓해졌네. 다른 것도 아니고 똥이 묻었는데, 죄다 갖다 버리자고 하지 않는 건 더스틴답지 않잖아.

네팔에 와서 고양이 똥이나 치우고 있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뜨리지 않는 것도 나답지 않고. 우리는 우리답지 않은 성숙한 모습(?)을 보이며 의젓하게 고양이 똥을 치웠다. 그렇게, 안나푸르나가 성숙시킨 두 인간이 포카라의 한 호텔 창고에서 고양이 똥을 치우는 동안 아름다운 오후가 무르익었다.

몸에서 빨간 불이 깜박거렸다. 금방이라도 꺼지려는 힘을 짜내 8시간 동안 산을 내렸다. 두 발로 걷는 건 이제 끝이다. 조금 섭섭해져서 버스 정류장에 섰다. 끝이다. 끝. 호텔로 가자. 살이 데일 만큼 뜨거운 물로 샤워하자.
 몸에서 빨간 불이 깜박거렸다. 금방이라도 꺼지려는 힘을 짜내 8시간 동안 산을 내렸다. 두 발로 걷는 건 이제 끝이다. 조금 섭섭해져서 버스 정류장에 섰다. 끝이다. 끝. 호텔로 가자. 살이 데일 만큼 뜨거운 물로 샤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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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스물두 날째다. 포카라에서 버스를 타고 베시사하르에 도착했던 스물두 날 전. 강바람을 맞으며 잠이 들었던 첫날밤. 죽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으며 넘은 쏘롱 라. 맞바람을 가르며 두 무릎을 꿇고 기어 내린 벼랑길.
 오늘로 스물두 날째다. 포카라에서 버스를 타고 베시사하르에 도착했던 스물두 날 전. 강바람을 맞으며 잠이 들었던 첫날밤. 죽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으며 넘은 쏘롱 라. 맞바람을 가르며 두 무릎을 꿇고 기어 내린 벼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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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고 우리 안에서 함께할 히말라야를 위해, 건배

두루마리 휴지 한 개와 물 두 양동이, 향수 그리고 고난의 눈물로 그나마 쓸만한 짐을 닦아내고 샤워를 했다. 고약한 고양이 똥 냄새에 익숙해진 후각이 스스로의 악취를 판별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두려웠지만, 여하간 밖으로 나가야 했다.

하루의 시간을 고양이 똥으로 모두 덧칠해 버릴 순 없지 않은가. 페와 호수는 여전했다. 카페 옆에 바, 바 옆에 마트, 마트 옆에 옷 가게. 우리는 목적 없이 어슬렁댔다. 내일은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고민하지 않는, 간만의 평화로운 오후다.

"더스틴! 수지!"


건너편에서 누군가, 우리의 이름을 절박하게 외쳤다. 시력이 좋지 않은 우리는 길가에 서서 한참을 두리번댔다. 건너편에서 키 큰 사내 한 명이 다가왔다. 토마스다! 옆에 선 아담한 여인은 마케터! 우리는 차도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며 서로 얼싸안았다.

"쏘롱 라에선 어떻게 된 거야? 반대편으로 내려간 거야?"
"아니. 수지 상태가 안 좋아서 토롱 페디로 내려가서 며칠 쉬고 다시 넘어갔어. 근데 하필 그날 날씨가…."


우리는 근처 맥줏집으로 옮겨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했다. 미라는 당나귀를 타고 쏘롱 라를 넘겼으며, 마낭에서 비행기를 타고 산에서 내려갔던 이반과 헬레나도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체코로 돌아갔다. 며칠 여유가 있는 토마스와 마케터만 남아 여독을 풀고 있다. 다섯이 함께 시작한 산행이지만 결국엔 뿔뿔이 흩어졌고,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은 여행에 관계도 조금 상했다고 했다. 사는 것도 여행도, 누군가와 함께하는 건 쉽지 않다.

푼힐에서 고레파니로 내려가는 길. 어두운 새벽길에는 보이지 않던 꽃나무들이 풍성하다.
 푼힐에서 고레파니로 내려가는 길. 어두운 새벽길에는 보이지 않던 꽃나무들이 풍성하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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푼힐에서 고레파니로 내려가는 길. 일출 대신, 분홍빛 꽃이 활짝 폈다.
 푼힐에서 고레파니로 내려가는 길. 일출 대신, 분홍빛 꽃이 활짝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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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네 뚱바가 뭔지 알아?"


일주일이면 체코로 돌아가는 토마스와 마케터는 아직 뚱바를 맛보지 못했다. 애석하여라. 안타까운 마음에 그들의 손을 이끌고 뚱바를 찾아 페와 호숫가 근처를 배회했다. 페와 호수 위를 쭈뼛대던 불그스름한 해는 우리가 맥주를 마시는 사이를 못 참고 사그라졌다. 검은 어둠이 하늘과 호수와 포카라의 거리를 삼켰다. 우리는 한 줄로 나란히 서서, 술과 밤과 어둠에 취해 서로의 손을 이어 잡고 거뭇한 호숫가를 거닐었다.

"어, 반딧불이."


정전이 되었는지 화려하던 상점들의 불빛도 다 꺼졌다. 짙은 어둠은 길을 걷고 있는 내 두 발도 지워버렸다. 내 손을 잡고 앞으로 걷는 마케터의 팔 반쪽만 겨우 눈에 들어왔다. 마케터의 팔 위로, 푸르스름한 하얀 빛이 떠올랐다. 하얀 빛은 마케터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빛은 하나가 아니었다. 반딧불이다. 수십 마리의 반딧불이가 어둠이 내리깐 페와 호수 위를 반짝였다. 우리는 노점으로 들어갔다. 간이 테이블 위에 촛불을 켰다. 반딧불이가 이따금 토마스의, 마케터의, 더스틴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우리는 촛불과 반딧불이가 신비롭게 비추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앉았다.

"체코에 오면 연락해. 교외에 토마스 아버지 별장이 있는데 가끔 놀러 가거든. 경치가 정말 좋아."


우리는 그러겠다고 했다. 인도로 돌아간 후 동유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것이다. 체코에 갈 것이다. 하지만 계획은 언제나처럼 틀어질 수도 있다. 토마스, 마케터와는 다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조금 서글프지만, 괜찮다. 우리는 살아 있고, 지금 함께 있다. 나는 언제고 안나푸르나를 기억할 것이고, 안나푸르나를 기억할 때면 그 속엔 언제나 젊은 토마스와 마케터가, 이십 대 끝자락의 나와 더스틴이 있을 것이다.

뜨끈한 뚱바가 나왔다. 어둠에 잠긴 노점은 좁은 것도, 무한한 것도 같았다. 검고 무한한 공간 속에 앉은 우리는 잔을 들었다. 건배. 나스트라비. 그리고 치어스. 언제고 우리 안에서 함께할 히말라야를,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함께 할 우리를 위해.

어제 포카라에서 코레파니로 도착했다는 서른 두명의 한국인 트레커 그룹. 푼힐 등반을 맞아 얼굴도 새로 갈아끼운 듯 신선하고 산뜻하다.
 어제 포카라에서 코레파니로 도착했다는 서른 두명의 한국인 트레커 그룹. 푼힐 등반을 맞아 얼굴도 새로 갈아끼운 듯 신선하고 산뜻하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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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ABC 트레킹 : Annapurna Base Camp 트레킹의 약자.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찍고 같은 길로 하산하는 트레킹으로 일주일 정도 소요된다.



태그:#포카라, #푼힐, #안나푸르나, #히말라야, #네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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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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