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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드름의 형상이 꼭 발레를 하는 무용수 같다.
 고드름의 형상이 꼭 발레를 하는 무용수 같다.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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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은 봄인 듯했다가도 다시 추워지기를 반복했다. 날씨 변화가 너무 심했다. 어느 날은 개나리가 피고 또 어떤 날은 이름 모르는 꽃들이 만개하고 또 다른 날은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알을 낳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날이 추워지자 꽃잎은 피어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개구리 알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연못 위로 둥둥 떠올랐다.

시골집 내 방은 춥다. 입김이 나올 정도는 아니지만, 손과 발이 시리고 오래 앉아 있으면 몸이 오돌오돌 떨렸다. 연탄보일러가 돌아가지만, 예전과 달리 내 몸은 추위에 맥을 추지 못했다. 내복, 겉옷, 외투까지 걸쳤지만, 찬바람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내 살을 에는 것 같았다. 룸메이트가 이런 내 모습을 보더니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입으면 불편 안혀? 보는 내가 다 답답한디. 춥다고 웅크리지만 말고 밖으로 나가봐. 움직여야 덜 춥제."

고드름이 바람을 맞아 이리저리 휘어져 자랐다.
 고드름이 바람을 맞아 이리저리 휘어져 자랐다.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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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메이트 성화에 못 이겨 마당으로 나갔다. 모든 것이 얼었다. 해가 떠도 얼어있던 연못은 녹지 않았고, 처마에는 고드름이 장식처럼 매달려 있었다. 크기도 제각각이고 모양도 다양했다. 슬레이트 지붕 아래 자리한 철쭉나무에도 치자나무에도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놓은 듯 고드름이 열렸다. 나는 시린 손에 입김을 불어가며 마당 곳곳을 돌아다녔다. 가는 곳마다 고드름이다. 어찌나 맛나게 열렸는지 하나를 똑 따서 먹어보고 싶다. 하지만 차가운 고드름을 만질 자신이 없었다.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달아 놓아요.


어릴 적, 겨울이 오면 '눈' 동요 다음으로 즐겨 부르곤 했던 노래다. 어린 나에게 긴 겨울 방학은 지겹고 답답했다. 매일 만나던 친구들을 만날 수 없고 집을 벗어날 수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매일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모험을 떠나는 상상 속에 빠져 살았다. 상상 놀이가 지겨울 때 동네 친구들과 골목에 모여 '눈' 동요를 큰소리로 불렀다.

놀라운 것은 이 노래를 수십 번 반복해서 부르면 정말로 눈이 왔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 노래를 듣고 감동하여 선녀님들이 하얀 솜을 뿌려준다며 정말 좋아했었다. 까불까불 춤추며 노래를 몇 번 더 부르면, 조금씩 내리던 눈이 함박눈으로 변하기도 했다. 우연의 일치였겠으나 눈 동요를 부르면 눈이 내렸으니 하늘이 감동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때, 친구들과 즐겨 먹었던 것이 처마 밑에 오이마냥 길쭉하게 자라있던 고드름이었다. 뾰족한 부분을 한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처마 끝을 톡하고 치면 기다란 고드름이 내손에 들어왔다. 우리들은 자신의 것이 더 크다며 큰소리치다 손의 열기로 고드름이 녹기 시작하면 혀로 핥아 먹기 바빴다. 얼음 덩어리가 특별한 맛이 있으련만 그때는 하드처럼 쪽쪽 빨아먹으면 그렇게도 달고 맛날 수가 없었다. 고드름은 피부로 느껴지는 차가움보다 혀로 전해지는 달달함 그것으로 기억되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 하나를 떼어내기로 했다.

'처마 밑에서만 열리는 수정 열매다. 투명하게 빛나는 이 열매는 달디 달다.'

온 몸이 떨릴 정도로 추웠고 선뜻 손이 가지 않아서 나에게 채면을 걸었던 것이다. 눈을 질끈 감고 낚아채듯 고드름을 땄다.

"아이 차."

고드름을 만지는 순간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고드름이 바닥에 떨어져 맛을 보지 못했다. 이대로 방안으로 들어가 버린다면 다시는 어릴 적 고드름의 맛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시 고드름 하나를 떼어내 입가로 가져갔다. 떨리는 입술 사이로 혀를 내밀어 고드름을 핥았다.

철쭉에 고드름이 열매처럼 달렸다.
 철쭉에 고드름이 열매처럼 달렸다.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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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맛이 나기도 흙 맛이 나기도 했다. 겨울 맛이 있다면 속이 뻥 뚫리는 가스 활명수를 마신 것 같은 맛이라고나 할까. 속이 뻥하고 뚫리며 깊은 숲 속의 향기가 콧속으로 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릴 때 맛본 달콤함은 아니었지만 이 맛은 아주 오래된 물건에서 느껴지는 편안함과 같은 깊은 맛이 있었다. 아마도 내가 지내는 이 집이 백년이 넘은 오래된 집이라는 생각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여튼 어릴 적 그 맛이 아니었다.

문득 도시에서 보낸 겨울이 생각났다. 도시에서 보낸 겨울은 춥고 배고팠다. 돈도 없었고, 취업 문턱도 높았으며, 나는 계속 비정규직이었다. 일한 시간만큼 쉬게 되는 날이 많았다. 그렇다보니 목돈 마련은커녕 적은 돈으로 한 달을 근근이 살아갔다. 그때 살았던 옥탑 방은 겨울 내내 수도꼭지를 틀어 놓지 않으면 얼 정도로 추웠다. 보일러가 자주 고장이 나는 통에 전기 히터기 하나로 겨울 났었다.

옥탑 지붕에도 고드름이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너무 커서 먹고 싶거나 만지고 싶다기보다 보는 것만으로도 불쾌했었다. 다행히 몇 년 후 반 지하로 이사를 가서 매서운 추위는 면하게 되었지만 추위에 약해져버렸다.  

서울 생활을 접기 전까지 살았던 상봉동 집도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십 오년 된 노후한 집은 위풍이 심했고 볕이 잘 들지 않았다. 방안 온도를 높여도 바닥만 따듯할 뿐 공기는 차가웠다. 이곳에 살면서부터 내복을 입기 시작했다. 그래도 살만 했던 건 옥탑 방처럼 물이 어는 일이 없었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수 있다는 것, 넉넉하진 않지만 조금은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날들이었다. 이 집에도 고드름이 열렸는지 알 수 없다. 바삐 사느라 주위를 둘러볼 겨를이 없었으니까.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윤희방 영창에 달아놓아요.


나는 노래를 부르면 밖을 내다봤다. 아직도 처마에는 고드름이 매달려 있었다. 정오가 되자 고드름이 녹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물방울이 온 집안에 퍼져 맑은 소리를 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처마 밑으로 갔다. 며칠 전보다 고드름의 모양이 더 다양해졌다.

순간 넋을 잃고 한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춤사위를 선보이는 무용수의 모습을 닮은 고드름을 발견하고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다시 추워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고드름의 형상을 오랫동안 보고 싶었다. 하지만 자연이 만들고 허물어내는 일에 내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나는 다시 주위를 돌다 처마 아래 섰다.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어 떨어지는 물방울을 입 안 가득 담았다. 그리고는 쩝쩝 소리 내어 맛을 음미했다.

'아, 달콤 쌉싸름하다.'

키 작은 고드름이 열리다.
 키 작은 고드름이 열리다.
ⓒ 김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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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고드름, #겨울, #얼음, #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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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경의로움에 고개를 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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