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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등포구청 직원들이 5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당산로 구청 광장에서 열린 사랑의 헌혈 행사에 참여해 헌혈을 하고 있다.
▲ 사랑의 주먹 서울 영등포구청 직원들이 5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당산로 구청 광장에서 열린 사랑의 헌혈 행사에 참여해 헌혈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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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는 매년 지역 혈액원과 연계하여 사랑의 헌혈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보통은 가을 무렵에 실시한다. 그런데, 작년에는 학사 일정과 혈액원의 일정을 조율하다보니, 수능이 끝난 후 12월에야 헌혈을 하게 되었다.

가정통신문을 보내 학부모님의 허락을 받은 후 헌혈 조건에 부합하는 학생들이 최종 헌혈에 참여하게 된다. 예년과 달리 3학년의 참여율이 저조했다. 헌혈 실적은 봉사활동 점수와 연계된다.

수능이 끝나고 대학입시가 본격화되면서 3학년은 사실상 더 이상 봉사점수가 필요 없게 된 데다 지각·결석으로 빠지는 학생이 많아 참여율이 떨어졌다. 다행히 1·2학년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헌혈은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됐다.

"현혈을 하고 싶다"고 찾아온 성희... 돌려보냈다

보건 수업을 하고, 보건실을 찾는 학생들의 응급처치를 하면서 틈틈이 1층에 들러 헌혈 현황을 살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때 쉬는 시간에 3학년 성희(가명)가 찾아왔다. 성희는 특수교육을 받는 학생으로 지적 발달이 늦고, 발음이 분명하지 못해 집중해야만 성희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근래에 보기 드문 명료한 말투로 "헌혈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헌혈 신청표를 찾아보니, 성희가 속한 학급은 성희를 포함해서 딱 3명만 헌혈을 신청했다.

헌혈을 하고 싶어도 헌혈 조건에 맞아야만 헌혈을 할 수 있다. 성희는 평소 머리도 자주 아프고, 요즘 감기 기운도 있어 할 수 없다고 했더니 한참을 우물거리다 실망한 기색으로 돌아섰다. 헌혈 후 받는 기념 선물을 못 받아 실망한 것 아닌가 단순하게 생각하고는 성희의 축 처진 뒷모습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성희가 또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편지를 건넨다. 3년을 학교를 다녀도 내 이름을 모르는 녀석들이 태반인데, 보건 수업 시간에 스치듯 알려준 이름을 어떻게 그렇게 잘 기억했는지 모르겠다. 구겨진 이면지에 급하게 써 온 편지는 '김지학 선생님'으로 정확히 시작했다.

맞춤법도 엉망이고 내용도 들쑥날쑥했지만 요지는 헌혈을 하고 싶어 엄마에게 허락을 받았고, 자신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헌혈에 참여해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것이었다. 성희의 편지를 읽는데, 얼마나 나 자신이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그저 다른 아이들처럼 기념품이 받고 싶어 헌혈하고자 하는 마음 아닐까 싶었는데, 성희는 온 마음과 의지를 담고 있었다. 헌혈은 남들을 돕는 것이니 당연히 참여해야 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인데 말이다.

한참 동안 헌혈을 하려는 성희의 마음을 칭찬하면서, 그러나 이번에 참여할 수 없는 이유를 반복해서 설명하고 나서야 겨우 달랠 수 있었다. 성희를 다독이면서 단순하게 살지 못하고 온갖 이유와 핑계를 끌어대 재단하고 붙여대는 나의 '지적 수준'에 대해 다시금 반성했다.

본질에만 집중하는 단순한 삶을 계획한다

<메콩 강의 진주, 라오스>의 저자 이요한 교수에 따르면, 라오스의 언어에는 시제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단어를 많이 외우는 게 라오스어를 잘 하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시제가 없다니, 언어학적으로 덜 발달된 언어 체계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성희의 편지 사건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시제가 없는 언어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려면 대화의 전후 맥락을 주의 깊게 파악해야하고, 상대방의 존재에 전심을 기울여야만 가능하다. 시제가 없어도 대화가 가능한 언어 체계야말로 오히려 가장 발달된 유물일 수도 있겠다는 발상도 했다.

돌아보면 허둥대고 좌절하며 낙담하는 이면에는 놀랄 만큼 복잡한 삶의 궤적이 자리 잡고 있다. 살아가는 날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성희처럼 본질에만 집중하면서 점점 더 단순하게 살 수 있도록, 2015년에는 단순한 삶의 근력을 기를 수 있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단순성, #새 해 소망, #보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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