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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홍매화, 꽃말은 고결, 정조, 결백, 충실 등이다.
 홍매화, 꽃말은 고결, 정조, 결백, 충실 등이다.
ⓒ 임소혁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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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임시정부 주석이 되다

1926년 무렵 임시정부는 얼마 동안 사상 대립과 파벌 싸움으로 무정부 상태라 할 만큼 매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이동녕이 김구를 찾아왔다.

"아무래도 이 난국을 헤쳐 갈 사람은 백범밖에 없을 것 같소."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첫째 저는 황해도 시골 상놈의 아들입니다. 그런 제가 한 나라 원수가 된다는 것은 국가와 민족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둘째 저보다 훌륭한 사람들도 인재를 얻지 못해 정부를 조직하지 못하였는데, 제가 나서면 더욱 호응할 인재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동녕은 김구를 계속 간곡히 설득했다.

"첫 번째 것은 이유될 것도 없고, 다음 것은 백범만 나서면 지원자가 있을 것이오. 임시정부가 무정부 상태로 되는 것만은 면하게 해주시오."

김구는 이동녕의 간청에 못 이겨 1926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인 국무령에 올랐다. 김구는 큰 권한과 책임을 지우는 국무령 제를 모두가 똑같은 권리와 책임을 지는 국무위원제로 고친 뒤,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되었다.

임시정부 경무국장 시절의 백범, 아내 최준례 여사와 아들 인과 함께. 1920년대 초로 당신 생애 가운데 가장 단란했던 한때로 추정된다.
 임시정부 경무국장 시절의 백범, 아내 최준례 여사와 아들 인과 함께. 1920년대 초로 당신 생애 가운데 가장 단란했던 한때로 추정된다.
ⓒ 백범기념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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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의거

김구가 주석이 되자 일단 임시정부는 자리가 잡혔다. 하지만 재정이 너무 빈약해 임시정부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웠다. 얼마 안 되는 청사 집세조차 내지 못할 정도였다. 김구 주석은 미국, 멕시코 등지의 동포들에게 임시정부의 어려운 사정을 알리고 성금을 보내 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하와이의 안창호, 임성우 등 여러 분이 편지를 보내왔다.

이봉창 의사
 이봉창 의사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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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정부를 지키고 있는 것을 감사히 생각한다. 그런데 당신 생각에 무슨 사업을 하고 싶은가?"

김구는 답장을 보냈다.

"미리 말할 수 없는 사정이오. 필요한 때 연락할 터이니 그때 보내주시오."

그때 김구는 오랜 궁리 끝에 생각해 낸 것이 '한인애국단' 운동이었다. 일본의 주요 인물을 습격해 처단하고 중요기관을 파괴하면 전쟁 이상의 효과를 거두고, 침체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그런 가운데 어느 날 한 젊은이가 김구를 찾아왔다.

"저는 이봉창으로 일본에서 노동을 하다가 독립운동을 하고자 이곳을 찾아왔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길이 없겠습니까?"

김구는 이봉창의 애국심을 확인한 뒤 단둘이 만났다.

"사실 나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일할 젊은이를 찾고 있소."

1931년 12월, 김구는 이봉창을 프랑스 조계 한 여관으로 몰래 불러 일본에 가서 천황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이튿날 김구는 그를 안공근(안중근 의사 동생)의 집으로 데려가 한국애국단 입단 선서식을 한 뒤 그에게 수류탄 두 개와 돈 3백 원을 주며 말했다.

"이 선생, 마지막 가시는 길이니 이 돈은 아끼지 마시고 쓰시오. 동경서 전보를 치면 다시 송금하리다."

1932년 1월 8일, 김구는 신문을 펴들고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중국 국민당 기관지 <민국일보> 기사였다.

"한인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명중하지 않았다(韓人 李奉昌 狙擊 日皇 不幸不中)."

윤봉길 의사
 윤봉길 의사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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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거

1932년 2월 하순 어느 날 한 청년이 김구를 찾아왔다.

"저는 충남 예산 출신으로 훙커우(虹口)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하는 윤봉길입니다. 제가 나라를 위해 마땅히 죽을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4월 29일은 왜놈 천황 생일이오. 그들이 훙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에서 경축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는 모양인데 군의 일생에 큰 목적을 이날에 이뤄보는 게 어떠하오?"

4월 29일 김구는 윤봉길과 같이 동포 김해산 집에 가서 마지막 아침밥을 먹은 뒤 배웅했다. 그때 윤봉길은 자기 시계를 꺼내 김구에게 주면서 시계와 바꾸기를 청했다.

"한인 애국단 선서식 후 선생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산 것입니다. 선생님 시계는 2원 짜리니 제게 주십시오. 저는 한 시간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김구는 말없이 그것을 기념품으로 받고, 대신 당신 시계를 건네주었다. 김구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루쉰공원의 윤봉길 의거 표지석
 루쉰공원의 윤봉길 의거 표지석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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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 훙커우 공원에서 거행된 일왕 생일 경축과 상하이사변 승전 기념식장에 모든 참석자들은 빳빳이 선 채로 해군 군악대 주악에 맞춰 일본국가 기미가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윤봉길은 이때를 하늘이 준 기회로 알고 물통 형 폭탄의 안전핀을 뽑아 단상 한복판을 향해 힘껏 던졌다. 폭탄은 포물선을 그리며 힘차게 날아가 단상 중앙에 떨어지자 곧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소리와 함께 일본국가의 남은 부분도 폭음 소리에 묻혀 버렸다.

그 폭탄으로 일본인 거류민단장 카와바다, 일본군사령관 시라카와 육군 대장을 그 자리에서 절명케 했다. 이 밖에도 일본해군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 중장, 육군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 등은 중상을 입었다. 당시 중국 장제스(蔣介石) 주석은 윤봉길 의거를 대단히 격찬했다.

"중국 백만 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젊은이가 능히 했으니 장하다."

'4·29 분화(噴火)'

루쉰공원 정문현판(1999. 8.)
 루쉰공원 정문현판(1999. 8.)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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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분화(噴火)'로 일컬어지는 이 의거는 그 무렵 만보산 사건(1931년 7월 중국 길림성 만보산 지역에서 관개 수로를 둘러싼 조·중 농민 사이에서 일어난 충돌 사건)으로 악화됐던 조선인에 대한 중국인의 감정을 일변시켜 중국 정부가 임시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계기가 됐다.

또한 중국 당국은 임시정부에 재정 지원뿐 아니라, 중국 군관학교 뤄양(洛陽)분교에 한인 특별 훈련반을 설치케 하는 호의를 베풀었다.

그날(1999년 8월 3일) 우리 일행은 임시정부 청사를 나온 후, 곧장 훙커우 공원(현, 루쉰 공원)으로 갔다. 이 공원은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추앙 받는 루쉰을 기념한 곳으로, 공원 내에는 루쉰의 묘와 루쉰기념관, 공원 옆에는 루쉰이 말년에 살던 집이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루쉰 공원 안내 표지판을 따라가자 윤봉길의사기념관 '매헌(梅軒)'이 나오고, 거기서 조금 더 걷자 윤봉길 의사 의거 표지석이 나타냈다. 우리 일행은 그 표지석 앞에 고국에서 가져간 술을 잔에 부어 드린 뒤 두 번 큰절을 했다.

삼천만 동포에게 겨레혼을 일깨워주신 윤봉길 님이시여!
저희가 드린 이 조촐한 술잔을 흠향(歆饗)하시고, 부디 분단된 조국을 통일시켜 주시옵소서. 

김중생, 이항증, 박도 재배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와 박도 지음 <항일유적답사기>를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태그:#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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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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