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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층층나무꽃으로 5~6월에 피는 들꽃이다.
 층층나무꽃으로 5~6월에 피는 들꽃이다.
ⓒ 임소혁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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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지사의 울부짖음

우리 일행은 그날(1999. 8. 2.) 오후 베이징의 인민대회당, 천안문 광장, 고궁박물원인 자금성을 둘러봤다. 저녁 식사 후, 이태형 선생과 1차 면담이 미진하여 다시 선생 댁을 방문했다. 선생은 여전히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단아한 모습으로 가슴 깊이 묻어둔 말들을 쏟았다.

"조선 민족은 참 불쌍하다. 북쪽에서는 굶어죽는다고 야단이고, 남쪽에서는 아직도 대한제국 시절과 같은 부정부패가 횡행하며 민족의 자존심이나 긍지를 잃은 채 부일배(附日輩, 친일파무리)나 그 후손들이 날뛰고 있다. 내 듣자 하니 이완용이 후손이 제 할아비 매국해서 일본으로부터 받은 토지와 일왕 은사금으로 산 토지를 재판으로 찾아갔다는데, 그게 무슨 법치국가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법은 법이 아니다.

민족 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는 기타 범죄는 범죄가 아닌 세상이다. 나라 팔아먹은 놈도, 일본 앞잡이 노릇하던 놈도, 높은 벼슬하며 떵떵거리고 사는 세상에 배고파서 도둑질한 사람이 무슨 죄가 되겠느냐? 그런 나라는 부패하기 마련이고, 도의와 양심은 땅에 떨어져 버린다."

베이징 인민대회당
 베이징 인민대회당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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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지사의 울부짖음이었다. 노 독립지사는 한참 동안 말씀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삭였다. 나는 선생에게 후대에게 남길 말씀을 부탁드렸다.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야 한다

첫째, 올바른 사람이라면 그 시대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살아야 한다. 일본 밑에서는 마땅히 독립운동을 하는 게 그 시대 양심이었다. 개미나 벌 같은 미물도 자기의 왕이나 제 집을 해치면 죽기를 각오하고 외적을 물리친다. 이민족 치하에 가만히 있는 것도 비겁한데 하물며 외적 편에서 그 놈들의 앞잡이가 되는 이는 버러지보다 못하다.

둘째, 지금의 매장 풍습을 바꿔야 한다. 특히 오늘날 조선에서 매장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나 김일성 주석도 죽은 후에 화장하지 않고 안전관에 모셔 두고 있는데, 인민을 교육하기 위하여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잘못된 일로 생각한다.

지금은 몰라도 앞으로 일백년이나 일천년이 지난 다음에는 분명히 잘못된 일로 판명될 것이다. 한 줌의 재로 날려버린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나 덩샤오핑(鄧小平) 주석이야말로 훌륭한 선각자다. 호화 분묘를 만들고, 비석을 세우는 일은 다 소용없는 일이다. 정말로 후손을 위한다면 화장하는 게 옳다. 나는 이미 부모와 처를 모두 화장했고, 나도 화장하라고 일렀다.

셋째, 남북 조선이 서로가 상대를 헐뜯지 말고 사실대로 인정해야 한다. 예를 들면 청산리 전투를 북쪽에서는 홍범도·김좌진 장군이 한 게 아니고 조선 빨치산이 했다든지, 남쪽에서는 요즘은 쑥 들어간 듯하지만, 지난날 '가짜 김일성'이라고 역사를 왜곡하면서 김일성 장군의 항일운동을 부인한다든지 하는 것은 서로의 틈만 더욱 벌리는 일이다.

그 당시 항일 독립운동은 민족계열, 공산계열이 모두 힘을 합쳐 한 일이지, 어느 한쪽만이 한 것은 아니다. 3·1운동 때 기독교, 천도교, 불교계가 일심 단합하여 만세를 부른 것과 같다. 거짓은 언젠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서로가 자기만이 옳다는 극단은 좋지 않다. 단군의 자손으로 외세에 눌려 분단이 된 채, 서로가 대화를 하지 않고 한 하늘 아래 원수처럼 사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오늘만 보지 말고 지난날을 돌아보고, 먼 장래를 내다보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답이 나올 것이다.

분단된 고향 땅에 묻히고 싶지 않다

독립지사 이태형 선생(왼쪽)과 필자의 대담
 독립지사 이태형 선생(왼쪽)과 필자의 대담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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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밤이 늦었다. 하루 동안 90평생을 사신 인생 역정을 다 듣는 것은 무리이리라. 동석한 이항증 선생은 이태형 선생의 장인어른이 월송(月松) 김형식(金衡植) 선생으로, 의성 김씨 가문의 대단한 항일 운동가라고 했다.

월송 선생은 해방 후에도 조국의 분단을 막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고자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 등이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협상(남북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을 할 때 사회를 봤던 분이라고 했다.

"남북이 분단된 이대로는 고향 땅에 묻힐 생각은 없고, 죽으면 화장을 해서 중국 땅에 재를 뿌리라고 했다."

노옹(老翁)의 단호한 말씀 속에 담겨진 의미를 내 나름대로 추리하면서, 작별 인사를 나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어귀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 어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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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8월 3일(화) 아침 베이징공항 찬청(식당)에서 만두로 요기를 한 다음, 8시에 중국 남방항공 여객기에 탑승하여, 9시 30분에 상하이공항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곧장 택시를 타고 마당로(馬當路)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옛 터를 찾았다. 이곳은 상하이 중심지와는 달리 길도 좁고 건물도 죄다 낡았다.

백범(白凡) 선생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상하이 생활이 너무 어려워 깊은 밤에 쓰레기통 안에서 근처 채소 장수들이 배추 겉껍질 버린 걸 골라다 먹었다는 당시의 모습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듯했다.

상하이시 마당로 보경리 4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가 있었다. 2차선 도로변 한 건물에 '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라는 안내판과 '大韓民國臨時政府舊址管理處'(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관리처)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가자 '안녕하세요', '大韓民國臨時政府舊址接待室'(대한민국 임시정부구지 접대실)이라는 현판도 나란히 있었다.

나는 이곳을 찾는 데 불과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에 살았던 백성들은 '임시정부'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찼고, 민족혼을 지닌 젊은이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들 젊은이 가운데는 이 임시정부를 찾아가기 위해 목숨까지도 담보했다.

심지어 일제의 '반도인학도특별지원병제(半島人學徒特別支援兵制)'를 이용하여 학도병에 입대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군을 탈출, 장장 6천리나 되는 장정(長征) 끝에 마침내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감격적으로 도착한 젊은이도 있었다. 김준엽, 장준하, 윤경빈, 김영록, 홍석훈 선생 등이 바로 그분들이다. 어디 이분들뿐이랴. 임정 요인들이 모두 그러했고, 이봉창, 윤봉길 의사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상하이 임시정부 김구 주석 집무실
 상하이 임시정부 김구 주석 집무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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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우리 일행이 찾은 마당로 보경리 4호의 임시정부 청사는 최초의 임시정부 청사가 아니고, 1926~1932년 사이 6년간 머물렀던 상하이 시절의 마지막 청사였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1919년 3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여운형, 신채호 등 30여 명이 보창로의 한 허름한 집에 모여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비밀회의를 가졌다고 한다. 각 지방 대표의 공식 회합인 제1차 임시의정원 회의는 1919년 4월 10, 11일 이틀에 걸쳐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 22호에서 열려 의장 이동녕의 사회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전문 10조를 통과시켰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호를 '대한민국'이라 하고 민주공화제를 선포한 기념비적 장소다. 하지만 이곳은 그후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프랑스 조계를 모두 접수한 이후, 이전의 거리 이름과 동네 이름을 모조리 바꾸고, 어떤 곳은 호수까지 모두 바꿔버려 최초의 임시정부 청사를 찾는 것은 솔밭에서 바늘 찾기처럼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당시 임정에 몸담았던 사람도, 이를 입증해 줄 사람도 모두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건물은 1919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 교포로부터 상당한 독립자금을 기부 받아와서 3층 건물을 임대하여 태극기도 꽂고 임시정부 간판도 달았다는 보창로 309호 건물은 지금은 지명도 호수도 바꿨고, 그 자리는 지금 공터로 남아 있다고 한다. 그 후로도 임시정부는 가난한 재정에 남의 나라, 그것도 프랑스 조계지에서 임시정부 청사를 갖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 예닐곱 차례나 옮겨 다녔다.

그래서 가장 확실한 곳은 마지막 임정 청사였던 현재의 마당로 보경리의 '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 청사인 바, 이곳도 오랜 풍상에 낡고 헐어서 무너지려는 것을 1990년 삼성재단이 그 건물에 입주하고 있던 10여 가구에게 아파트를 사 주고 건물을 비워서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단장했다고 한다. 현재는 상하이시 노만구(盧灣區) 인민정부가 이 임시정부 청사를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고, 그 당시 삼성그룹 중국담당 이사로 관여했던 동행 김중생 선생이 자세히 일러주었다.

김구와 임시정부

마침내 우리 일행은 임시정부 청사에 들어갔다. 1층은 회의실과 부엌이었고, 2층은 집무실이었다. 집무실 한쪽에는 딱딱한 나무침대가 놓여 있었는데, 김구 선생이 사용했던 침실이라고 했다.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집무실 벽에는 역대 대통령, 국무령, 주석 어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승만, 박은식, 이상룡, 홍진, 김구, 이동녕 순으로 모셔져 있었다. 벽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愛己 愛他(애기 애타)', 석오(石吾) 이동녕 선생의 '光明(광명)'이라는 글씨가 액자에 담겨져 걸려 있었다. 3층은 임정 요인 숙소와 전시실로 꾸며져 있었다.

1919년 9월, 상하이에 도착한 이튿날 김구는 김보연을 찾아갔다. 그는 경신학교 출신으로 김구가 교육사업을 할 때 무척 따랐던 청년이었다. 김보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들에게 김구를 소개시켰다. 김구는 이동녕, 이광수, 김홍서, 서병호 등과 인사를 나눴다. 김구는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를 찾아가 솔직히 말했다.

백범 김구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임시정부 주석
ⓒ 백범기념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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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고 싶습니다."
"문지기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그것이 내 진정 소원입니다. 내 일찍이 감옥에서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을 때 하느님께 빌었습니다. 나는 임시정부 문지기를 꼭 하고 싶습니다."
"알았소."

다음날 안창호는 경무국장 사령서를 교부했다. 김구는 펄쩍 뛰었다.

"나는 순사 자격도 되지 못하는데, 어찌 경무국장을 감당하겠습니까?"
"백범이 문지기로 서 있으면 중책을 맡은 젊은 후배들이 어떻게 드나들겠소. 더구나 경무국장은 왜놈 밀정들의 활동을 막고,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뒤를 보살펴주는 것이니 백범에게 합당하지 않소."

김구는 더 이상 사양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이상 <백범일지>에서 기자가 임의로 축약 정리하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와 박도 지음 <항일유적답사기>를 참고하여 썼음을 밝힙니다.



태그:#들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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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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