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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 동안 남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기자 말

묵티나트 마을 트레킹. 가끔은 소와 함께 걷기도 한다.
 묵티나트 마을 트레킹. 가끔은 소와 함께 걷기도 한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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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밀의 두 눈이 아득해졌다. 뭐지. 푼힐 전망대가 볼 만하냐고 물었을 뿐인데. 쉽게 공상에 빠지는 성격인 모양이다. 푼힐 전망대는 여차하면 안 갈 요량이다. 푼힐에 가려면 하산 일정에 하루 이틀은 더 잡아야 한다. 가진 건 시간밖에 없으니 그깟 이틀 더 걸으면 그만이지만, 산에서 2주 넘게 있다가 보니 슬슬 도시가 그립기도 한 것이었다. 도시로 돌아가면 그제야 산이 그립다고 징징거릴 변덕스런 인간이 나지만.

"푼힐 전망대는 꼭 가세요. 푼힐로 이어지는 마을들도 그림같이 아름다워요."

아밀은 가이드다. 밥 말리 호텔에서 만난 아밀은 내일부터 가이드를 맡을 스페인 산악자전거 그룹을 기다리는 중이다. 원하는 답은 아니다만, 히말라야를 몇 번이고 올랐을 가이드가 하는 말이라면 들어야지. 푼힐을 극찬하던 아밀은 히말라야 예찬을 이어갔다.

"저는 카트만두 출신이에요. 네팔 사람이라고 다 히말라야를 올라보는 건 아니에요. 대부분 산을 모르고 살아요. 저도 히말라야가 있다는 것만 알았지 산을 본 적도, 오른 적도 없었죠. 11년 전까지. 11년 전 처음으로 안나푸르나 라운딩 트레킹을 했어요. 그땐 정말, 얼마나 행복했던지. 히말라야를 처음 마주했던 그때 그 감정은 지금도 잊지 못해요. 태어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죠. 그래서 결심했어요. 내가 가장 행복할 수 있는 히말라야에서 살아야겠다고. 그래서 가이드가 됐어요. 히말라야를 가장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직업이잖아요."

묵티나트 주변 트레킹. 종, 까끄베니 등 주변 마을까지는 트레킹이 가능하나, 무스탕 지역을 트레킹하려면 별도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묵티나트 주변 트레킹. 종, 까끄베니 등 주변 마을까지는 트레킹이 가능하나, 무스탕 지역을 트레킹하려면 별도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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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티나트 이웃 마을. 황량한 풍경 사이사이에 끼어든 설산이 인상적이다.
 묵티나트 이웃 마을. 황량한 풍경 사이사이에 끼어든 설산이 인상적이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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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에 사랑에 빠진 히말라야. 그렇게 시작된 인연. 11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두 눈이 그득해지는, 아, 히말라야. 뭐 그런 거니? 아밀은 행복해 보였다. 충만해 보였다. 만족할 줄 아는 성격도 타고나는 모양이다. 무엇이든 쉽게 질려 하는 나는 떠돈다. 산에 있으면 도시가 그립고 바다에 있으면 들이 그립다. 이렇게 사는 것도 피곤하다.

밥 말리 호텔에서 사흘을 쉬었다. 하산할 시간이다. 사랑에 빠진 히말라야를 뒤로하고 포카라로 간다. 안녕 쏘롱 라. 원수 같은 놈. 사랑하는 놈. 내 꼭 다시 오리오. 그때는 조금은 맑은 얼굴로 날 맞아 주시게. 어이. 내 말 듣고 있나? 맑게 갠 하늘 아래 청량한 설산은 언제나처럼 차갑고, 말이 없다.

묵티나트 사원. 무스탕 지역은 티베트 문화가 잘 간직된 곳으로 유명하다.
 묵티나트 사원. 무스탕 지역은 티베트 문화가 잘 간직된 곳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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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행성 같은 모습
 외계행성 같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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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티나트 사이드 트레킹. 황량한 산 아래 초록의 밭. 그 위의 설산.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리는 풍경.
 묵티나트 사이드 트레킹. 황량한 산 아래 초록의 밭. 그 위의 설산.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울리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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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바람, 회오리. 하산도 쉽지 않다

까끄베니까지는 세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등산하는 트레커가 있었다면 하산하는 트레커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토마스와 마케터는 어디쯤 걷고 있을까. 쏘롱 라에서 나를 도와준 네덜란드 커플은 오늘도 씩씩하게 걷고 있겠지. 당나귀를 타고 쏘롱 라를 넘는다던 미라는 무사히 잘 갔을까. 술 때문에 속이 뒤집힌 헨드릭과 로레나는 오늘도 알콩달콩 행복하려나. 시끌벅적한 잔치가 끝난 기분이다. 조용히 각자의 길을 걸을 시간이다.

히말라야는 우리를 보내는 게 영 아쉬운 모양이었다. 벼랑, 바람, 회오리 따위를 대동해 우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45도 경도의 돌무더기 언덕을 내려오니 모진 풍파가 우리를 맞았다. 날숨을 내뱉기도 어려운 힘센 바람을 가르고 있는데 회오리바람이 다가왔다. 차마 피하지 못하고 회오리바람 안으로 빨려들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 아니 견뎌라. 눈을 감고,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히말라야는 우리를 보내는 게 영 아쉬운 모양이었다. 벼랑, 바람, 회오리 따위를 대동해 우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45도 경도의 돌무더기 언덕을 내려오니 모진 풍파가 우리를 맞았다.
 히말라야는 우리를 보내는 게 영 아쉬운 모양이었다. 벼랑, 바람, 회오리 따위를 대동해 우리의 발목을 붙잡았다. 45도 경도의 돌무더기 언덕을 내려오니 모진 풍파가 우리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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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막길 아래로 보이는 킹가 마을
 내리막길 아래로 보이는 킹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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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바람에 눈이 시다. 바람에 춤을 추는 머리카락이 얼굴을 후려쳤다. 사랑하는 애인에게 바람을 맞은들 이렇게 아플까. 묵직한 바람을 온몸으로 들어올려야 겨우 한 걸음이다. 그렇게 8시간을 걸었다. 모래바람에 몰골과 정신이 피폐하다. 바람과 함께 혼이 쏙 날아갔다. 좀솜이다. 바람은 좀솜에서도 잦아들 줄을 몰랐다.

좀솜은 큰 마을이다. 큰 마을에선 원하는 건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이 개고생을 때려치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미 80달러를 내면 비행기를 타고 우리가 걸어온 히말라야의 설산을 상공에서 감상한 후 포카라로 돌아갈 수 있다. 그것도 단 20분 만에. 멋진 피날레다. 돈이 없다면 버스를 타도 좋다. 안나푸르나 라운딩의 종착역인 베니까지 500루피(한화 약 7천 원)다. 버스를 타야 할 이유는 많다. 맞바람이 심하다. 게다가 트레일의 종착지인 베니까지 찻길이 나 있기 때문에 트레킹을 하기엔 길이 영 좋지 않다. 지프의 뒤꽁무니를 쫓으며 배기가스와 먼지 다발을 뒤집어써야 한다.

밥 말리 호텔에서 만난 네덜란드 트레커들은 버스를 타고 간다며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났다. 현명한 선택이야. 그럼 우리도? 우린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절레절레. 시작한 건 끝을 봐야지. 좀 미련하게 가자. 우린 벌여 놓은 일을 마무리하는 습관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두 발로 오른 산이니 두 발로 걸어 내려가자. 게다가 우린, 직업도 없고 시간만 많은 백수 두 마리잖아. 아낀 버스값으로 야크 스테이크를 사 먹었다.

묵티나트에서 좀솜까지는, 이른바 말바람이라고 불리는 맞바람이 심하다. 정말 심하다.
 묵티나트에서 좀솜까지는, 이른바 말바람이라고 불리는 맞바람이 심하다. 정말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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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가 마을엔 맥도날드 대신 야크 도날드가 있다.
 킹가 마을엔 맥도날드 대신 야크 도날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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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지르고 보는 성격엔 늘 후회가 그림자처럼 뒤따른다. 다음날. 산장을 나서자마자 한숨이 푹 나왔다. 아니, 한숨도 제대로 못 내뱉을 정도의 거센 맞바람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비행기를 안 타? 버스를 안 타? 그럼 바람이나 타라! 성난 바람이 우리를 냅다 들어 산골 어딘가로 처박아 놓을 것 같다. 우리가 뭘 잘못했나요. 기껏 넘은 쏘롱 라 반대편으로 보내지만 말아 주세요. 서 있기도 어려운 바람을 가르며 한참을 걸었다. 한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좀솜의 끝을 알리는 표지판이 등장했다. 마을 한 번 더럽게 크다.

이건 분명히 하산길이다. 산을 오르는 고통을 추억처럼 되새기며, '고통이 지나가니 이제야 풍경이 눈에 들어오오' 같은 하나마나 한 말을 지껄이다 도토리묵에 막걸리로 종결하는 것, 그게 내가 아는 하산이다. 고생은 끝이라는 안도감과 나에 대한 대견함을 느끼고, 이 산의 훌륭함과 앞으로의 갈 길 등에 대해 생각하며 아쉬운 마음에 하늘 한 번 산 한 번 바라봐주는, 뭐 그런 거. 안나푸르나에선 하산 길조차 장엄하다. 한 발 한 발이 사뭇 진지하다. 매일 새 산을 오르듯 걸어야 한다. 지친다. 산에 지친 우릴 위로하는 건 산이다. 설경. 나뭇잎 하나 없는 휑한 나뭇가지를 붙잡고 선 절벽. 사실 내 발목을 붙잡았던 건 맞바람이 아닌, 안나푸르나의 풍경인 것 같다.

산에 지친 우릴 위로하는 건 산이다. 설경. 나뭇잎 하나 없는 휑한 나뭇가지를 붙잡고 선 절벽. 사실 내 발목을 붙잡았던 건 맞바람이 아닌, 안나푸르나의 풍경인 것 같다.
 산에 지친 우릴 위로하는 건 산이다. 설경. 나뭇잎 하나 없는 휑한 나뭇가지를 붙잡고 선 절벽. 사실 내 발목을 붙잡았던 건 맞바람이 아닌, 안나푸르나의 풍경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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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솜의 둠바 호수
 좀솜의 둠바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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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시간동안 같은 자리만 맴맴... 무엇에 홀린 게냐

작은 마을 하나를 지나니 다시 내리막길이다. 내리막길의 끝은 강이다. 강물 건너편으로 좀솜을 떠난 지프가 먼지를 흥얼대며 베니로 향하고 있었다. 강을 건너 차도로 가야 하는 건가. 광활한 대지 중앙에 서 있으니 애초에 미약하던 방향감각마저 소실됐다.

"뭐야. 어디로 가야 해?"
"여기 있어봐. 보고 올게."


내비게이션 담당 더스틴이 주위를 돌며 방향을 조사했다.

"여기! 트레일 표시가 있어!"


길은 찾았지만 별로 달갑지가 않다. 가까이 갈수록 길은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 바위로 메주를 쑤어놓은 듯 엉성한 길이다. 이 길을 오르다 성질이 난 사람들이 바위를 냅다 던져 놓은 모양이다. 깨진 바위 무더기를 따라 올랐다. 오르막길 끝에 나타난 길은 더 가관이다.

절벽 옆으로 겨우 깎아놓은 좁은 트레일. 쏘롱 라에서 우리를 위협하던 눈과 얼음 대신, 거센 바람이 우리를 위협했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다. 후욱. 훅. 후우욱. 바람은 짧고 긴 호흡을 연거푸 뿜어냈다. 미친 바람이다. 미친 바람을 막고 미친 절벽 위에 서서, 미친년처럼 욕을 내뱉는 미친 형국이 이어졌다. 다시 한 번 후우우우욱. 우린 폭탄이라도 터진 듯 몸을 바닥에 깔았다.

"이게 뭐야아아아! 이게 길이야아아아? 어디까지 가야돼에에에에!"

비명인지 말인지 모를 소리가 바람 사이를 오갔다. 이 길 끝에 바비큐 한 마리가 기다리고 있다 해도, 혹은 그와 비슷한 그 어떤 천국의 나날들이 펼쳐진다 해도, 이 길은 가지 못할 길이다. 다시 돌아가야 했다. 바람이 바짝 말려놓은 얼굴이 찢기듯 아팠다. 기껏 힘들게 오른 메주 길을 다시 내렸다. 다시 제자리다.

어린 산양과 함께 걷기도 한다.
 어린 산양과 함께 걷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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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바람이여
 아, 바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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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길은 찻길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수백 대의 차가 몰려와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 써도 달게 받아들일 수밖에. 다시 강가로 돌아갔다. 광활한 대지는 원근감을 떨어뜨렸다. 지척인가 했던 길은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강가에 도착해서는 강을 건널 다리를 찾아야 했다. 다리를 찾아 한 시간을 더 걸었다.

"지긋지긋해!"


좀솜에서 마르파는 고작 한 시간 반 거리다. 우리는 지금 네 시간째, 똑같은 풍경을 보며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 나를 농락하는 안나푸르나에 바짝 약이 올랐다. 좌절과 짜증과 분노로 달아오른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안나푸르나에 와서 이렇게 자주 울 줄은 몰랐다. 그것도 분해서. 배낭을 내팽개치고 땅바닥에 냅다 누워 온종일 울어도 분이 안 풀릴 것 같다. 이쯤이면 더 미친 자가 승자다. 반쯤 돌아있던 더스틴은 완전히 돌아버린 나를 보더니 정신을 차렸다. 정신 차려. 길을 잃은 것뿐이야. 이제 찾았으니까 걷기만 하면 되는 거야.

강줄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강줄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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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곳에서도 나무는 자란다
 황량한 곳에서도 나무는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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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후. 심호흡. 다시 일어섰다. 강물 사이에 대충 걸쳐놓은 나무다리를 건넜다. 인간은 정말 속수무책이군. 이 허름한 나무다리 없이는 강물 하나도 건너지 못해. 황량한 땅을 하염없이 걸었다. 익숙한 얼굴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축구경기 때문에 오늘은 좀솜에서 쉰다고 했던 네덜란드 남자다. 어떻게 여기에?

"어디에서 오는 길이에요?"
"좀솜에서 쉬다가 좀이 쑤셔서…. 마르파 마을에 있는 곰파에 갔다가 스님을 한 명 만났어요. 말하는 게 재밌길래 오전 내내 같이 차 마시면서 얘기하다 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벌써 마르파에 다녀왔다고요? 몇 시에 출발했는데요?"
"한 11시나 출발했나…."

뭐 11시? 11시라고 했느냐? 네놈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버릴 테다! 우리가 좀솜을 출발한 건 아침 8시. 지금은 1시. 5시간을 헤매 겨우 마르파 입구까지 왔다. 헌데 고작 한 시간 반 만에 마르파에 갔다고? 스님이랑 한참을 노닥거렸다고? 네놈의 발이 빠른 게냐 우리가 무엇에 홀린 게냐. 홀린 거라면 바람에 홀린 게 분명하다. 아아, 바람이여.

묵티나트부터는 이름 모를 행성에 떨어진 것 같은 풍경이 이어진다.
 묵티나트부터는 이름 모를 행성에 떨어진 것 같은 풍경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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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per Mustang은 '안나푸르나 보존지역 프로젝트'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안나푸르나 라운딩 등산허가증 외에 별도의 허가증을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다. 10일간의 등반을 허락하는 허가증의 가격은 미 달러 500불. 하루 연장 시 50불이 추가된다.
 Upper Mustang은 '안나푸르나 보존지역 프로젝트'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안나푸르나 라운딩 등산허가증 외에 별도의 허가증을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다. 10일간의 등반을 허락하는 허가증의 가격은 미 달러 500불. 하루 연장 시 50불이 추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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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대지를 헤매다 도착한 마르파의 풍경이란 황홀한 것이었다. 바람을 등지고 선 하얀 벽돌 건물. 그 건물들 사이의 좁다란 바람길. 골목들. 산장과 카페와 식료품점. 아 그리고, 사과. 마르파는 고산지 사과로 유명한 마을이다. 골목을 가르는 바람에 산뜻한 냄새가 실려왔다. 카페로 들어가 커다란 애플파이를 해치웠다. 애플 티를 마시며 바람에 휘몰아친 정신을 가다듬고 사과 쇼핑에 나섰다. 애플 칩, 애플 잼, 애플 브랜디. 스트레스 해소엔 역시 단것과 쇼핑이다. 우리를 냄비에 든 건더기처럼 뒤적이던 주걱 같은 바람도 잠잠해졌다. 바람에 날뛰던 마음도 다시 평화로워졌다. 다시 걷자. 온종일 맴돌던 모래바람 대신 애플 칩을 입에 넣었다. 그리고 씹었다. 우리는 툭체로 향했다.

마르파를 가는 길에 우리를 홀린 것은 NATT(New Annapurna Trekking Trails)였다. 새로 난 도로 때문에 트레킹 할 맛이 떨어졌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만든, 트레커들을 위한 길이다. 좀솜에서 기존의 트레일, 그러니까 지프가 다니는 도로를 따라 걸으면 마르파까지 1시간 반 만에 도착할 수 있다. 우리가 본 하얀색 빨간색 줄로 표시된 NATT 트레일을 따라 걸으면 3시간이다. 우리처럼 방향을 잃고 헤매다 땅에 주저앉아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낸다면 거기에 2시간이 추가된다. 툭체까지는 곱게 도로 길을 따라 걸었다. 다행히 지프는 많지 않다. 대신, 비가 떨어진다.

황량한 대지를 헤매다 도착한 마르파의 풍경이란 황홀한 것이었다. 바람을 등지고 선 하얀 벽돌 건물. 그 건물들 사이의 좁다란 바람길. 골목들. 산장과 카페와 식료품점.
 황량한 대지를 헤매다 도착한 마르파의 풍경이란 황홀한 것이었다. 바람을 등지고 선 하얀 벽돌 건물. 그 건물들 사이의 좁다란 바람길. 골목들. 산장과 카페와 식료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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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가 마을
 킹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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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피해 제일 가까운 산장으로 뛰었다. 옷이 다 젖었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2층 식당으로 올라갔다. 주문한 저녁 식사를 기다리며, 밀크티를 마셨다. 차가 달다. 따뜻하다. 창밖으로 비가 굵직하게 떨어졌다.

비. 히말라야. 밀크티. 산장. 지금 내가 가진 것들. 언젠가는 이 순간이 그리울 것 같다고, 쏟아지는 비를 보며 생각했다.

묵티나트 사이드 트레킹. 독립적 왕국이었던 무스탕 지역은 티베트 국경과 맞닿은 까닭에 티베트와 언어적, 문화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묵티나트 사이드 트레킹. 독립적 왕국이었던 무스탕 지역은 티베트 국경과 맞닿은 까닭에 티베트와 언어적, 문화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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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히말라야 , #묵티나트, #좀솜, #안나푸르나, #마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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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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