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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전 통일부장관.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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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월 29일에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가리켜 '악의 축'이라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그날 오전에 통일부 장관 임명장을 받았다. '앞으로 아무것도 못 하고 책상만 지키다 끝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2월 20일 서울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열렸고, 그때 김대중 대통령이 확대정상회담도 안 하고 100분 동안 부시를 붙들고 설득했고, 결국 부시가 설득당했다. 통역 포함해 말이다. 국가 자존심이 있는 것이니 쫓아다닐 수는 없는 일이고, 박 대통령도 오바마 대통령하고 직접 100분만 통화해봐라. 북한에 대한 적대감정이 극에 달했던 부시도 설득되는 마당인데, 오바마는 명색이 진보적 대통령 아닌가."


지난해 12월 29일 남의 통일준비위원회(통준위)가 북의 통일전선부에 대화를 제안하고,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최고위급(남북정상회담) 회담을 언급했다. 파탄 상태인 남북관계에 이같은 유화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은 소니픽처스 해킹 사건과 관련해 대북제재를 확대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정세현(70) 전 통일부 장관은 미국의 이 행정명령을, '분단 70주년'인 2015년 벽두의 남북관계에서 "가장 아픈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설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오바마를 설득하지 않으면 남북정상회담은 어렵다"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휴가지에서 서명한 이번 행정명령을 통해 미국이 남북관계 개선에 제동을 걸고 있다는 시각에 대해 그는 "아니기를 바라지만, 그런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1977년부터 2004년까지는 정부에서, 그 이후에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대표상임의장(2005~2009년),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2006~현재), 원광대 총장(2010~2014년)으로 민간에서 남북관계를 짚어온 그는 이번 미국의 행정명령 발동에서,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던 1998년의 '금창리 사건'과 2005년의 BDA사태를 떠올렸다.

다음은 6일 만난 정 전 장관과의 문답 전문.

"북과 대화하거나 북의 글을 읽을 때는 조건절이 중요"

- 통상 북한의 신년사는 어느 정도의 의미를 두고 봐야하는가.
"북의 신년사는 일단 전년도 것을 정리한 다음 새해 그 분야의 과업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들도 그냥 허장성세로만 얘기할 수 없다. 아무리 지위가 낮은 주민이라도 <노동신문> 전면에 나오니 다들 열심히 보게 된다. 지난해에 했던 말이 전혀 이행되지 않았다면 당과 정부의 신뢰도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로서는 진정성 있는 얘기를 해야 한다."

- 올해 북의 신년사에서 김정은 제1위원장의 '최고위급 회담' 발언이 가장 눈에 띈다.
"그렇다. '분위기와 환경이 마련됨에 따라'라는 조건절이 붙기는 했지만도 '최고위급 회담'이란 단어를 쓴 게 중요하다. 북쪽 사람들과의 대화를 하거나 공식적인 논설 등 글을 읽을 때는 이 조건절을 잘 해석해야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것 아닌가.

또 '남쪽 통준위와 북쪽 통일전선부(통전부)가 대화하자'는 통준위 제안을 일절 언급하지 않은 것도 눈에 띈다.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통준위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이다. 대신 '고위급 접촉 재개'라는 표현을 썼다. 지난해 2월에 김규현 청와대 국가안보실 1차장과 원동연 통일전선부 부부장이 만났는데, 이 멤버 그대로 하자는 것이다. '고위급 접촉 재개'라는 형식으로 통준위-통전부 대화 제의에 대한 역제의를 한 것으로 보인다."

- 이번 신년사에는 '경영전략, 기업전략' 등 기존에 잘 쓰지 않던 자본주의 용어에, '정이 넘치고 귀여운 우리 어린이들, 인민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삼가 드립니다'처럼 대중친화적이고 부드러운 표현들도 있었다.
"이 단어 하나하나에도 복선이 있다. 80년대 일인데, 북쪽 실무자한테 들어보니 통전부에 <노동신문> 기자까지 (각종 문건 등) 글 쓰는 사람이 400명인데, 가장 좋은 표현과 복선을 깔면서 나중에 책임질 수 있는 일을 피해가는 그런 단어들을 모아서 완성한다고 한다. 그걸 '집체작'이라고 한다.

'삼가'라는 단어 하나가 북한 주민들에게 어떻게 전달되겠나. 자신이 군림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인민들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계산이 깔린 표현이다. 김 위원장이 젊기 때문에 그런 것을 더 신경 쓰는 것 아니겠나. '나이는 어리지만 참 우리를 모시는 자세로 일하는 구나' 하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분위기와 환경 마련'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시간이 별로 없다. 대통령이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
 "시간이 별로 없다. 대통령이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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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단 70주년이고 박 대통령 임기 3년차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올해가 남북정상회담 적기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은 어떻게 보고 있나.

"(깊은 한숨을 쉬며) 아휴 글쎄… 그것이 참…. 저쪽에서 말한 대로 '분위기와 환경이 마련되기'가 좀 쉽지 않을 것 같다. 미국의 대북적대시 정책, 국내의 계속되는 종북몰이 등이 '분위기와 환경'에 해당하는 문제다.

또 드레스덴 선언 등 박 대통령이 지금까지 외국에서 연설했던 내용들을 보면 북한 내부 문제까지 언급했다. 배고픈 어린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농촌이 피폐해졌다는 등 이런 말은 다음 이야기를 (상대방이) 못 받게 하는 것이다. 북한이 아무리 가난하고, 1인당 국민소득 규모가 30대 1정도 차이난다고 해도, 자존심을 긁으면서 도와주겠다고 하면 개인도 못 받지 않겠나. 더구나 저기가 아무리 가난하고 못 살고, 때로는 얄미운 짓을 해도 명색이 국가다, 국가."

-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한미 정상회담 뒤 "북한은 핵개발·경제발전 병진노선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문제 있다. 물론 북이 핵과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는 어렵다. 하지만 평론가들이 얘기하는 것과 국가 최고지도자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말하는 것은 다르다. 자기 얘기를 정면으로, 그것도 국제사회에 나가서 비판하는 사람과 정상회담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분위기와 조건 마련이 굉장히 어렵다는 얘기다. 정상회담까지 가야 광복 70년, 분단 70년답게 되는데…. 다만 '이벤트성 남북정상회담'을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자원외교나 4대강 사업 같은) 이명박 대통령 때 일 아니면 남북정상회담 두 가지 정도가 (정국) 돌파구로 쓰일 수 있다는 말이 있던데 일리가 있다고 본다."

- 이벤트성 정상회담이라도 하는 쪽이 좋다고 보는가.
"이벤트로 끝나면 안 하느니만 못하고, 박 대통령 지지도는 결국은 더 떨어질 거다. 기왕 판을 벌였으면 경제, 사회 등 부문별 회담으로 쭉 내려가도록 정부가 정책을 세워서 밀어줘야 한다. 북에선 고위급 접촉 → 부문별 회담 → 최고위급 회담 단계별로 올라가자고 하지만, 내가 정책결정권자라면 고위급 접촉으로 설 명절 전에 이산가족 상봉부터 한 번 하고... 그 다음 5·24조치 해제 등으로 민간차원 교류나 대북 지원 등을 정부가 적극 허용해 분위기를 조성한 뒤에 먼저 정상회담을 하고 부문별 회담으로 가는 게 더 좋지 않겠나. 그럼 이번 광복절에는 진짜 의미 있는 남북한 공동행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별로 없다. 대통령이 빨리 결단을 내려야 한다."

▲ 정세현 "미국의 남북관계 제동? 의심 안할 수 없어"
ⓒ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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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군사훈련 안 할 수는 없지만, 범위와 강도를 낮춰서 북에 성의 보여야"

- 그런데 2~3월에 한미군사훈련이 예정돼 있다. 다시 긴장이 높아질 수도 있는데.
"북한이 하지 말라고 해서 예정된 한미훈련을 안 할 수는 없다. 다만 북한이 위협을 크게 느끼지 않도록 지금부터 (미국과) 조율해서 범위와 강도를 낮출 수는 있다. 그렇게 성의를 보이는 것이다."

- 미국이 소니픽처스 해킹 사건과 관련해 대북제재를 확대하는 행정명령을 발동했다. 5일(현지 시각)에는 미 국무부가 "다른 대응 옵션들을 계속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BDA사태가 연상된다. 미국이 남북관계 개선에 제동을 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기자 주 - 북핵 문제 해결의 이정표라는 평을 들었던 2005년 9·19 공동성명이 나오기 직전, 미국 재무부는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이 북한 위조달러 유통, 마약거래 자금세탁 의혹이 있다며 이 은행을 돈세탁 우려대상으로 지정하고, 또 여기에 예치돼 있던 북한 자금 2500만 달러를 동결시켰다. 북은 이에 반발했고 결국 2006년 1차 핵실험을 했다).
"글쎄요, 아니기를 바라지만 그런 의심을 안 할 수가 없다(웃음). 1998년에 김대중 대통령이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햇볕정책을 직접 설명한 다음부터 미국 정부가 햇볕정책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이때 미 보수진영과 군산복합체가  <뉴욕타임즈>에 평안북도 금창리 지하동굴 사진을 흘렸다.

북한이 핵 활동 중단 약속을 어기고 이 동굴에서 핵 재처리 시설을 운영한다는 것이었다. 결과가 어땠나. 나중에 북한의 요청에 따라 미국이 직접 확인해보니 '꽝'이었다. BDA도 비슷하다. 당시 네오콘들이 9·19 공동성명을 깨려고 찾은 카드가 BDA였다. 9월 19일에 공동성명을 발표했는데 9월 20일에 북한 계좌를 동결해버리더라.

이번 소니 해킹 문제도 북한이 했다고 (미국 정부가) 확정지은 건 아니지 않은가. <뉴욕타임즈>도 단정할 수 없다고 보도했고, 미국의 사이버 보안 업체인 노스라는 회사는 내부자 소행이라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12월 29일 통준위가 북한에 대화를 제의하고, 1월 1일 북한 신년사가 나오니까 오바마 대통령이 휴가 중에 서명할 정도로 서둘러 행정명령을 내렸다. 미국 동북아시아정책의 핵심은 중국 견제다. 그러면 북을 계속 배드 가이(Bad guy)로 남겨놓고 압박해야 한다. 근데 남북이 같은 민족이라고, 광복 70년, 분단 70년이라고 가까워져? 미국은 그것을 두려워한다."

- 미국은 '전략적 인내'라는 이름 아래 사실상 북핵 문제를 방관하고 있다.
"미국이 중국의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배웠다. 북한과 일본을 이용해서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다. 북한을 활용해서 일본의 군사강국화, 한미일 정보공유를 추진해가고 있는 것이다."

"대북제재 행정명령, 이런 사안은 외교 장관 워싱턴에 100번 보내도 안 돼"

"지금 오바마를 설득하지 않으면 남북정상회담은 어렵다."
 "지금 오바마를 설득하지 않으면 남북정상회담은 어렵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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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당장 미국의 대북제재 행정명령이 악재가 될 가능성이 높은데, 박 대통령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

"글쎄…(천장을 바라보며) 집권 3년 차에도 남북관계를 지난해처럼 끌고 간다면 좀 곤란하다. 역사적으로 아주 나쁜 평가를 받을 것이다. 분단으로 이익을 보는 세력이 분명히 있지만 고통 받는 사람 숫자가 훨씬 많다. 박 대통령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입만 열면 이산가족 상봉을 첫 번째 사업으로 말한다.

그런 정도의 인식을 갖고 있는 정부, 대통령이라면 더군다나 올해가 분단 70주년인데… (책상을 치며) 그렇다면 미국이 적대시정책을 반복하는 것은 우리한테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얘기해야 한다. 현재 가장 아픈 것이 이 대북제재 행정명령이다. 말을 돌리지 말고, 노골적으로 해야 한다. 이런 거는 외교부 장관을 워싱턴에 100번 보내도 안 된다."

- 박근혜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오바마한테 직접 전화해서 설득하라는 거다. 2002년 1월 29일에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가리켜 '악의 축'이라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내가 그날 오전에 통일부 장관 임명장을 받았다. '앞으로 아무것도 못 하고 책상만 지키다 끝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2월 20일 서울에서 한미정상회담이 열렸고, 그때 김대중 대통령이 확대정상회담도 안 하고 100분 동안 부시를 붙들고 설득했고, 결국 부시가 설득당했다.

'북은 악의 축이고 없어져야 한다'고 한 부시 전 대통령이 '북한 공격 안 하고 인도적 지원하겠다, 대화하겠다'고 만드는 데 100분 밖에 안 걸렸다. 통역 포함해 말이다. 국가 자존심이 있는 것이니 쫓아다닐 수는 없는 일이고, 박 대통령도 오바마 대통령하고 직접 100분만 통화해봐라. 북한에 대한 적대감정이 극에 달했던 부시도 설득되는 마당인데, 오바마는 명색이 진보적 대통령 아닌가. 지금 오바마를 설득하지 않으면 남북정상회담은 어렵다."

▲ 정세현 "박 대통령, 오바마와 100분만 통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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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박근혜, #김정은, #오바마, #대북제재 행정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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