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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보내고 맞는 아쉬움과 새로움의 접점에 눈이 내린다.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제야의 종소리를 싣고 포근하고 소담스런 함박눈이 건물과 대지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내려 양 털 같은 따스함을 전한다. 눈은 정월 초이틀 새벽까지 그치고 내리기를 반복해 온 누리를 하얀 융단으로 덮었다.

 

초사흘, 새해 첫 번째 맞는 주말, 광주광역시 광산구 서봉동 어등산에 올랐다. 눈 쌓인 등산로를 아이젠도 없이 싸목싸목 올랐다. 습기를 머금은 눈은 발밑에서 뽀드득 뽀드득 압착되며 그 보드라운 촉감이 온몸으로 전한다. 사람들이 많이 오르내려 반들반들한 길 한가운데를 피해 언저리를 밟아가며 조심조심 발길을 옮기노라니 등줄기와 이마에 금세 땀이 밴다.

 


을미년 새해를 맞아 목자가 숲속에 양떼를 풀어놓고 간 듯 검은빛 숲속에는 눈으로 빚은 하얀 양떼들이 노닐고, 행여 그들이 깰 새라 숲길을 라르고(largo) 풍으로 조심조심 걷노라면 양떼들의 노랫소리가 피아니시모(pianissimo)로 낮고 여리게 나무 사이로 흐른다.

 

언뜻언뜻 나뭇가지 새로 쏟아지는 햇살에 양떼들이 와르르 무너지면 놀란 숲이 화들짝 잠에서 깬다. 시누대를 흔드는 바람소리, 눈 더미 쏟아지는 소리, 멀리 혹은 가까이서 산객들의 수런거림이 겨울 숲의 풍경에 갇혀 고적하다.

 

잉어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을 가진 물고기의 등처럼 굽은 어등산은 광주광역시의 서쪽에 위치한 해발 338m의 낮은 산이지만, 동쪽으로 호남대학교를 안은 듯 감싸고 있으며, 남으로는 황룡강을 품고 서쪽으로는 영광통으로 뻗는 넓은 들녘이 펼쳐진다.

 

호남대학교 우측의 동자봉 삼거리에서 시작한 산행은 큰 경사는 없지만 줄곧 오르막으로, 산정약수터를 지나 절골 삼거리를 끼고 산 정상 석봉까지는 5.1㎞에 불과하지만 눈길이라 발걸음이 여간 더딘 게 아니다.

 

도심에 위치한 낮은 산이라 등산객이 끊이지 않아 주말이면 인근 주민들로 산을 늘 북적인다. 하지만 오늘은 산행길이 좋지 않은 탓인지 비교적 한산하다. 2시간여를 걸어 정상에 도착하니 석양에 포효하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석봉이 버티고 있다. 먼저 도착한 산행꾼들이 진을 치고 있어 선채로 간단히 목이 축이고 고개를 드니 멀리 시가지 너머로 무등산이 웅장하게 버티고 있다. 사방으로 눈 덮인 겨울풍경이 을씨년스럽다. 

 

눈이든 비든 모든 자연은 낮은 곳으로 내려 세상을 덮거나 씻어주며 제몫을 다하는데, 유독 사람들만이 자꾸 높은 곳을 지향한 채 자연을 파괴하며 오르기를 좋아한다.

 


결국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 산허리에는 어등산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어느새 골프장이 들어서 있고, 앞으로도 산자락에 호텔과 콘도, 체육시설과 더불어 70m 높이의 전망대를 세운다니, 개발인지 파괴인지 산에게나 산을 지키고 있는 초목과 새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되짚어 내려오는 길은 오르는 길보다 더 조심스럽다. 자칫 잘못하면 넘어지기 일쑤여서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떼어놓지 않으면 안 된다. 앙상하게 드러난 나무뿌리와 돌부리를 지지대 삼아 떼어놓는 발걸음에 힘이 들어가 다리가 후들거린다. 산행에서의 사고는 대부분 하산 중에 발생한다고 한다. 그만큼 내려가는 길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인생길로 마찬가지다. 올라갈 때는 앞뒤 재지 않고 부지런히 올라갔으되, 내려서는 길은 늘 주위를 살피고 조심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도 보고, 옆으로 스치는 사람들과 나무들도 보면서 여유롭게 살 일이다. 지금 내 인생은 오르는 길인가 내려가는 길인가. 뭐 인생길이 오르내리는 길이 따로 있겠는가.

 

인생 그 자체가 바이킹처럼 날마다 오르내리는 굴곡인데,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오후 2시가 넘었다. 10.2㎞ 거리를 꼬박 4시간이 걸린 셈이다. 눈 덮인 길이 험하고 미끄러워 힘들었지만, 숲속의 눈꽃양떼와 잔잔한 바람소리가 함께 한 새해 첫 산행의 뒤끝이 골 깊은 산속 약수처럼 달콤했다.


태그:#어등산, #무등산, #눈꽃, #양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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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 essayist, reader, 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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