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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화가의 미완성 그림일까, 이루진 못한 자신의 꿈에 대한 슬픈 자화상일까. 우리나라 국보 제240호인 공재 윤두서 자화상에 대한 의문과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얼굴부위만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윤두서 자화상은 우리나라 회화사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 현재의 윤두서 자화상 얼굴부위만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윤두서 자화상은 우리나라 회화사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 녹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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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7년 국보로 지정된 윤두서 자화상은 얼굴 부위에 보이지 않는 귀나 상체 도포의 옷 주름선이 없는 것을 놓고 미완성 작품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적외선을 통해 보면 뚜렷하게 나타나는 귀나 옷 주름선을 놓고 "그림의 제작기법에서 나타나는 문제다", "그림의 완성 시기가 다르기 때문이다"는 등 아직도 그림의 실체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어 공재의 자화상은 그림을 통해 가장 주목받는 작품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다.

윤두서 자화상은 그동안 극사실주의 적인 세밀한 그림기법, 서양화법을 도입한 묘사방법, 당시의 화풍에서는 보기 힘든 파격적인 그림의 구도 등으로 인해 혁신적인 그림으로 평가되어 왔다.

공재 서거 300주년 국립광주박물관 특별기획전

이처럼 자화상을 통해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강렬하고도 새로운 혁신의 그림세계를 보여준 공재 윤두서(1668~1715)의 회화세계와 삶이 공재 서거 300주년을 앞두고 활발히 조명되고 있다.

내년이면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가 중에 한 명으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에 걸쳐 48세를 일기로 비교적 짧은 생을 살다간 공재 서거 300주년이 된다.

공재 서거 30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 국립 광주박물관 공재 서거 30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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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은 공재 윤두서 서거 300주년을 앞두고 공재특별기획전을 지난 10월 20일 개막한 이래 내년 1월 18일까지 특별전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특별전을 계기로 지난 11월 26일에는 우리나라에서 공재를 연구하는 최고 전문가들이 모여 공재의 삶과 회화세계를 직중 조명하는 학술 세미나를 연바 있다. 이와 함께 지난 24일에는 우리나라 회화사의 권위자인 명지대 이태호 교수가 '공재 윤두서의 모든 것' 이란 주제로 특별강연을 열기도 하였다.

국립광주박물관에서는 2015년 1월 18일까지 공재 서거 3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기획전을 열고 있다.
▲ 공재 서거 30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국립광주박물관에서는 2015년 1월 18일까지 공재 서거 3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기획전을 열고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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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학술분야의 조명과 함께 MBC 방송은 11월 24, 25일에 걸쳐 그의 일대기를 그린 프로그램을 방영하기도 하였다. 공재의 고향인 해남 녹우당도 이번 특별전에 적극 참여하여 공재의 작품과 유물들을 대거 내놓는 등 공재 특별전을 통해 당시 정치적으로 소외된 남인 집안에서 살았던 젊은 천재화가의 삶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윤두서 자화상 제작의 비밀

윤두서 자화상은 현재 귀나 상체 도포의 옷주름선이 나타나 있지 않다. 그래서 마치 확대경으로 얼굴부위만 정교하게 그려놓은 듯한 형태를 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자료집에 실렸던 그림에는 귀와 상체 옷주름 선이 나타나 있는 도포차림을 하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도 복식차림과 귀가 보이는 적외선 도판을 공개한 바 있다.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사료집에는 자화상의 상체부위에 옷주름선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 1937년 <조선사료집>에 수록된 자화상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펴낸 조선사료집에는 자화상의 상체부위에 옷주름선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 국립 광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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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 자화상은 지난 2012년에도 KBS 역사스페셜을 통해 자화상의 비밀이 조명된 바 있었는데 적외선 촬영을 통해 귀를 비롯하여 상체 도포의 옷주름 선을 확인한 바 있었다.

이와 함께 현재의 원본과 같은 그림인가에 대한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지난 2003년 남북교류협의회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하였던 해남윤씨 후손에 의해 평양의 한 미술관에서 촬영한 자화상에도 도포의 복식선이 나타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2003년 남북교류협의회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하였던 해남윤씨 후손에 의해 평양의 한 미술관에서 촬영한 자화상에도 도포의 복식선이 나타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평양의 한 미술관에 전시된 자화상 지난 2003년 남북교류협의회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하였던 해남윤씨 후손에 의해 평양의 한 미술관에서 촬영한 자화상에도 도포의 복식선이 나타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로인해 현재의 자화상에 나타나 있지 않은 도포의 복식선이 예전의 그림과 적외선 촬영을 통해 나타나는 것을 놓고 미술사학계에서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이러한 논쟁은 상반신의 옷주름 선이 화면의 어느 쪽에서 그려졌나 하는 기법의 문제로 전개되었다.

지난달 26일 광주박물관에서 있었던 특별전 학술세미나에서 기조연설을 하였던 안휘준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명예교수는 "공재의 자화상에 나타나 있는 귀나 상체 복식의 옷고름선을 표현하는 수준이 떨어져 후대에 누군가가 그려 넣은 것이 아닌가" 추정하여 새로운 논란에 불을 붙였다. 후대에 화폭 뒷면에 그려 넣은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다.

공재 윤두서 자화상의 의문이자 논점은 본래 그림에 나타나 있던 상체 복식의 옷주름선이 왜 사라졌나 였다. 이에 대해 미술사학자 오주석은 숯으로 그린 의복이 1960년 표구과정에서 잘못 처리되어 1937년 자화상에 나타나 있던 복식선이 사라졌다고 추정하였다.

또한 명지대 이태호 교수는 자화상은 정면상의 얼굴만 화면의 앞면에 그렸고 얼굴선과 옷주름선은 뒷면에서 그리는 배면선묘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1937년 <조선사료집>의 자화상은 사진을 촬영할 때 그림의 앞면과 뒷면에서 동시에 조명을 주어 촬영하였기 때문에 옷주름 선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수미 연구관은 화폭 뒤에 필선을 그려 넣는 배선법은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며 이교수의 주장을 부정하였다.

이같은 논란속에서 미술사학계에서는 자화상은 정본이 될 초상화의 밑그림으로 정본이 아닌 초본으로도 보고 있다. 얼굴은 사진을 찍은 듯 완벽하게 재현한 반면 몸체는 유탄으로 희미하게 그리고 탕건도 일부분만 그린 것으로 보아 정본을 염두에 둔 초본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상상과 진실의 사이

그렇다면 자화상의 의복선이 보이지 않는 것은 착시현상일까? 아직까지 좀더 과학적이고 정밀한 조사결과가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유를 단정할 수는 없지만 자화상의 비밀은 수리를 통해 화폭 뒷면에 필선을 그려 넣었는지를 확인해 보면 알 수 있다는 방법론이 조심스럽게 대두되고 있다.

자화상은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사실을 밝혀보는 것도 좋을지 모르나 그 비밀에 대해서는 상상력으로 남겨두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신비감과 상상력이 허무한 사실로 나타날 때 공재의 자화상은 우리가 느껴왔던 그 가치로부터 멀어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재가 자화상을 그릴때 사용하였다는 거울이다.
▲ 백동경(구리거울) 공재가 자화상을 그릴때 사용하였다는 거울이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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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공재 특별전을 통해 새로 밝혀진 부분 중에 하나는 백동경(구리거울)이다. 그동안 공재가 자화상을 그릴 때 사용했다는 이 구리거울은 일본 에도시대(토쿠가와 막부, 17세기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구리거울의 뒷면에는 배면 전체에 만개한 3개의 모란꽃과 굽이치는 줄기와 잎이 장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거울의 문양이나 배경처리가 일본거울임을 알 수 있으며 우측에는 '天下一森田武藏守(덴카이츠 모리타 무사사카미)'라 새겨져 있다. 무사사카미(武藏守)는 현재의 도쿄지역 일대로 거울을 제작한 경사(鏡師)의 이름과 일본 궁중에서 허가받은 수령국명(受領國名)이 결합된 명문으로 보고 있다.

공재는 '일본여도'를 그려 일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할 수 있는데 당시 통신사들이 일본을 오간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과정속에서 구입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정확한 입수 과정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공재의 고향 녹우당과 백포 고택

공재 윤두서는 1668년 해남 연동 녹우당에서 태어났지만 대부분 서울살이를 하였다. 그가 고향 해남 녹우당에 다시 내려 온 것은 1713년 46세 였다. 녹우당이 지금의 당호를 사용한 것은 이 무렵 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재와 아주 절친하였던 옥동 이서가 '녹우당'이라는 당호를 짓고 써주었다.

호남문화예술의 산실로 녹우당이라는 당호는 공재의 절친한 친구인 옥동이서가 짓고 써주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눈내린 녹우당 호남문화예술의 산실로 녹우당이라는 당호는 공재의 절친한 친구인 옥동이서가 짓고 써주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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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문화 예술의 산실이라 할만한 녹우당이 그 집에 걸 맞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 공재로 인해서였다는 것이 아주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재가 고향 해남으로 내려와 산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공재는 모든 정치적 꿈과 희망을 다 버리고 서울에서 고향 해남 녹우당에 내려와 종손으로서 집안을 경영하며 살아야 했다.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많은 토지가 있는 곳으로 공재는 녹우당과 이곳을 오가며 집안의 토지를 경영하였다.
▲ 해남 백포 윤두서 고택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많은 토지가 있는 곳으로 공재는 녹우당과 이곳을 오가며 집안의 토지를 경영하였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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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재는 집안의 토지가 많은 해남 백포에 전택을 짓고 녹우당을 오가며 토지를 경영 하기도 하였다. 이곳은 선대로부터 간척을 하여 많은 토지를 확보하고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공재 고택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고택 뒤에는 공재의 무덤이 고택을 지키고 있다. 공재는 48세에 녹우당에서 생을 마친다. 천재의 삶은 항상 짧다. 30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삶을 평가하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

오래 전 사람들의 가치를 평가받고 증명받기 위해서는 무언가 남아 있어야 한다. 사라진 것은 허공의 바람 같은 것이다. 공재 윤두서와 아들 낙서 윤덕희는 집안 선대의 서책들과 유물들을 수집하고 이를 하나로 잘 꾸며 놓아 지금까지 그 유산들이 남아있게 하였다.

6천여 점이 넘는 녹우당 사람들의 문화유산은 온갖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지킨 덕에 이를 보존하는 유물전시관이 다시 번듯하게 지어져 이제 수백년의 세월도 끄덕 없게 되어 있다.


태그:#자화상, #공재 윤두서, #녹우당, #국립 광주박물관, #특별기획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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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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