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드디어 기다리던 책이 나왔다. 예전 <오마이뉴스> 박상규 기자의 산문집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를 감동 깊게 읽고 나서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었다. 이런 독특하고 흥미로운 유년 시절 이야기가 한 권의 산문 소재로만 소비되기에는, 소설을 여전히 문학의 핵심 장르로 믿고 있는 한 사람의 소설 애호가로서 아까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보신탕집 아들, 부모의 조기 이혼, 산속 외딴집과 시장통 여인숙의 상반된 광경. 평균적인 질에 못 미치는 주변 인물들의 삶, 소외된 사람들끼리의 진한 인정과 우정. 이정도면, 자전소설 주인공 역할로는 최고의 '스펙'이었다.

그리고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에서 박상규 작가는 텍스트가 요구하는 한도 내의 자신의 모든 것을 '커밍아웃'했다. 그런 용기는 독자와의 신뢰를 더욱 공고히 했고 산문 이상의 '소설'을 기대해봄직 했다.    

부족분의 경험을 후천적으로 습득하기 위해 파리와 런던 거리를 자발적인 부랑자가 되어 몇 년씩 떠돌아야 했던 '조지 오웰' 같은 중산층 작가의 생고생을 생각하면 박상규는 이미 그득한 보물창고를 지니고 있는 셈이었다. 게다가 박상규 기자는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에서 훌륭한 소설가로서의 가능성을 다분히 풍기고 있었다.

한 편의 훌륭한 성장소설 <똥만이>

<똥만이> 책표지
 <똥만이> 책표지
ⓒ 웃는돌고래

관련사진보기

이런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듯 작가는 동일 소재로 한편의 훌륭한 성장소설 <똥만이>를 우리 앞에 내 놓았다. 그리고 소설 <똥만이>는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다. '팩트 과잉'의 이 소설은 작가의 솔직한 술회와 어우러져 싱크로율 100%의 만족감을 안겨준다. 나는 <똥만이>를 붙들고 세 시간 내내 미소 짓다가 큰소리로 웃다가, 했다.

산문집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를 넘기며 울다가, 웃다가 당황스런 독서 경험을 했던지라, 이번엔 영악한 똥만이 녀석의 능청스러운 행적만을 주시하며 작가가 행간 곳곳에 매설해 놓은 슬픔의 뇌관을 슬기롭게 건너뛰고 유쾌한 독서를 즐기는 데 성공했다. 
       
청계산 보신탕집 '오작교'는 원래 별장이었다. 아늑한 숲속의 아담한 별장이 아버지의 창조적인 발상과 만나 보신탕집으로 명도 변경되었다. 별장으로서의 천혜의 주변 환경은 보신탕집으로서도 최상의 입지조건이었다.

인적이 드물어 고성방가와 음주가무에도 민폐를 끼치지 않을 것이고 집 앞을 흐르는 계곡에 영업용 평상을 놓으면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먹고 마시고 놀기에 딱 좋았다. 아버지의 상업적 안목은 적중했다. 보신탕집 오작교는 성황을 이루었다.

애초 별장 관리인으로 청계산에 입산한 아버지는 세상과 외딴집을 잇는 나무다리를 손수 짓고 스스로 '오작교'라 명명했다. 완공된 '오작교' 위에 엄마와 동만이를 앉혀놓고 아버지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시인 하이네의 저주처럼 '행복 아가씨'는 다섯 살 동만이의 이마를 살짝 스치듯 지나갔고, '불행 부인'은 유년시절 내내 동만의 곁을 맴돌았다.

엄마 품에 안겨 오작교 다리 위의 피사체로 '찰칵' 빛나던 찰나만큼이나 행복했던 유년의 시기는 짧았다. 고된 보신탕집 업무와 술, 여자, 도박을 넘나드는 아버지의 전횡에 지친 엄마는 어느 날 오작교를 떠나버린다. 엄마가 떠나고 아버지마저 원정도박으로 집을 비우는 밤, 산속 외딴집에서 체온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는 개, '동미'였다.

개, 닭, 오리 모든 가금류가 모두 상품으로만 취급되는 보신탕집 오작교에서 동미는 유일하게 식용 아닌 애완용으로 목숨부지하고 사는 동물이었다. 보신탕 집 가마솥으로 투척되기 전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동미를 구해준 사람은 동만이었다. 이런 인연으로 유기견 출신 동미와 청계산 자락에 방목된 소년 동만은 동병상련의 끈끈함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동만이 처지를 향한 독자들의 섣부른 동정이나 연민은 금물이다. 동만이는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환경변화에 의연하게 적응해 나간다. 표면적으로는 도시의 엄마 집과 보신탕집 본가를 오가는 이중생활을 즐기는 듯도 하다.

집을 나간 엄마는 '신라장' 목욕탕 때밀이 '유프로'로 화려하게 변신해 있었다. 청계산 집에서 한 시간을 걷고 다시 버스로 40분을 가면 엄마의 새로운 거처 '창신 여인숙 206호'가 나온다. 동만이의 유년은 창신여인숙 206호와 청계산 오작교를 오가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엄마의 일터인 여자목욕탕은 여인왕국이었다. 한쪽 다리를 저는 남영이 누나, 룸쌀롱 여주인 장닭 아줌마, 룸쌀롱 종업원 소영이 누나. 엄마 주변여인들은 모두 친절했다. 동만이는 엄마를 따라 소영이 누나 직장인 룸쌀롱에도 놀러 갔다.

일주일 중 하루 이틀은 창신여인숙 206호 '동만'으로 나머지 시간은 보신탕집 '똥만이'로 살았다.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오작교에서의 삶은 격음화된 '똥만이'만큼 척박하고 신산했다. 잦은 외박과 돌출행위로 자신을 자주 곤란에 빠뜨리는 아버지지만 동만에게 아버지는 호적에 등재된 유일한 가족이었다.

나무다리 오작교는 세 번 붕괴되었는데 공교롭게 보신탕집 오작교의 운명과 시기를 같이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묵묵히 오작교 재건에 집착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힘겹게 조성해 놓은 새 다리를 딛고 그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작가는 소설 속 가족, 인물 누구도 편파적으로 옹호하거나 내치지 않는다. 다만 묵묵히 껴안는다. 그러다보면 독자도 어느덧 조숙한 동만이의 선택을 공감하고 지지하게 된다.  

더 이상의 귀띔은 불필요한 스포일러가 될 것이다. 다만 아직 '똥만이'를 읽지 않은 행복한 독자들을 위해 팁을 하나 준다면, 읽기에 앞서 느닷없는 슬픔에 대비하라는 것이다. 특히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라는 백신을 통해 면역체계가 갖춰지지 않은 독자라면 울렸다가 웃기는 것이 주특기인 이 작가의 술수에 휘말리기 십상이다.   

동만이의 유년 시절은 어린이가 자라날 환경으로는 부적합하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작가가 탄생하기에는 더없이 기름진 토대가 될 것이다. 과거 경험에 기초한 자전적 소설 쓰기를 시도하는 작가라면 동만이가 보유한 과거 기억 중 어느 한 가지라도 탐내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두 권의 저작에서 보듯이 박상규 작가는 과거라는 보배를 작가적 재능이라는 바늘로 꿸 수 있는 충분한 재능을 지녔음이 증명되었다. 이 책 <똥만이>가 그 확실한 증거이다.


똥만이

박상규 지음, 장경혜 그림, 웃는돌고래(2014)


태그:#똥만이, #박상규, #유년시절, #보신탕, #오작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