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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큼 모임을 좋아하는 국민이 또 있을까 싶다. 동창회, 동문회, 환영회, 송별회, 신년 하례회, 청년회, 동기회, 해병전우회... 어디 그 뿐인가. 뜻이 맞는 사람들은 서너 명만 모여도 온갖 아이디어를 짜내서 '회'의 이름을 짓고, 그것을 구심점으로 결속을 다진다. 최근에는 '밴드'라는 걸 만들어서 끼리끼리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기도 한다. 

해마다 이맘 때가 되면 줄을 잇는 망년회도 예외가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참으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망년회는 가까운 친구들 몇몇이 모여서도 하고, 직장이나 단체의 구성원끼리 식당 같은 곳에서 만나 함께 밥도 먹고, 술도 마신다. 사실은 이를 구실로 얼굴 한 번 더 보고, 술이나 한 잔 더 하자는 뜻도 있을 것이다.

'망년회(忘年會)'는 말 그대로 '그 해의 온갖 괴로움을 잊자는 뜻으로 만드는 모임'이다. 한 해를 살면서 괴로운 일 한두 가지쯤 겪지 않은 이가 누가 있을까. 더구나 올해의 경우는 이 땅과 바다를 가리지 않고 하도 끔찍하고 어이없는 사건과 사고가 줄줄이 터져서 할 수만 있다면 깨끗이 잊고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정도다. 

망년회는 가끔 곡해되기도 한다. '망(忘)'이 '망했다'나 '망쳤다'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한 해를 송두리째 망쳐버리는 모임' 같은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망'은 또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왜색'이 짙은 말이라고 해서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송년회'라는 이름이 무난한다. '송년회(送年會)'는 '한 해를 보내는 모임이나 자리'의 뜻이니 '망년회'에 비하면 우선 어감부터 좋다. 지난해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한 해를 설계한다는 뜻도 담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다. (아무리 그래도 2014년 한 해 만큼은 예외다. '망년회'나 '송년회로는 성에 안 찬다. 전국 도처에서 아예 '망국회'라도 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심정이어서 하는 말이다)   

작년 이맘 때쯤 어느 자치 단체 공공 도서관 직원들의 송년 모임에 참석했다. 도서관장을 비롯해 대략 열다섯 명 정도가 함께한 그 자리에서도 술은 어김없이 돌고 돌았다. 모두들 유쾌해 보였다. 그런데 방 한쪽 벽을 보니 작은 현수막 한 장이 걸려 있는 게 아닌가. 제목은 <책읽는 지식도시, 완주 도서관 13대 뉴스>다. 그 아래에는 한 해 동안 도서관 사업을 추진하면서 거둔 성과나 주요 실적을 중요도에 따라 글자의 크기를 조절해서 재미있게 배치했다. 시계 방향으로 하나씩 읽어보았다. 

완주군 도서관 송년회 자리에 걸린 작은 현수막
 완주군 도서관 송년회 자리에 걸린 작은 현수막
ⓒ 송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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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아래에는 '2014년! 도서관에서 시작하세요'라고 적어 새해를 여는 구성원의 마음을 한 곳에 모으고 있었다. 다 읽고 나니 고개가 끄덕여졌다. 구성원들의 깜찍함과 재기발랄함에 빙긋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그랬을 것이다. 한 해 동안 의욕적으로 추진한 여러 가지 사업에서 다양하고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었으니 자체 뉴스를 열세 가지나 선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송년회 자리에 이런 현수막을 걸어놓고 한 해를 돌아보며 새로운 한 해를 다짐할 줄 아는 센스 만점인 구성원들이 있는 한 이 조직은 지속적으로 발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자리에 참석한 도서관장에게 왜 하필 13대 뉴스를 선정했느냐고 물었다. 2013년 사업을 정리하는 뜻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이었다. 내년에는 14대 뉴스를 선정할 거냐고 되물었더니 당연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실 없고 쓸 데없지만, 재미난 걱정을 잠깐 했다. 계속 그런 식으로 가다 보면 2098년에는 98대 뉴스를 어떻게 선정하려고 그러는 걸까, 하고.


태그:#망년회, #송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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