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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1월의 시애틀공항 보관소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빨간 우산을 든 남자를 봤을 때 나는 자연스레 레드군을 떠올렸다. 빨간색을 병적으로 좋아해 '레드'라고 불리던 녀석은 나와 준과 더불어 회사에서 일명 트로이카였다. 갑자기 시애틀로 출장을 오게 되었다는 녀석의 연락을 받고 라스베이거스에서 부랴부랴 날아오긴 했지만, 레드가 거기서 내 배낭을 찾고 있을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빈 컨베이어가 돌아가는 소리만 가득하던 그 공간에 내가 가까이 가자 의문의 남자는 마치 내 발자국 소리를 기억이라도 하는 듯 고개를 돌렸다.

"여어, 왔어?"

며칠 전에 약속한 모임에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넨 그는 역시 레드였다. 나는 한국이라면 하지 않았을 포옹으로 녀석을 반겼다. 여행 중 누군가 나를 마중 나온 것이 처음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그리워할 사람이 필요한 때였다. 내게 살이 빠졌다며 19kg의 배낭을 메고 앞서 걷는 레드는 변한 것이 없었다. 언제나 남 챙기기에 바쁜 그였다.

호텔방에서, 우리는 레드의 출근시간이 불과 몇 시간 남지 않았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빈 술병이 늘어나는 만큼 우리의 이야기는 깊어졌고 녀석은 마침내 결혼을 결심한 듯이 보였다. 한참 동안 나를 빤히 쳐다보는 레드의 눈빛에 뭐라고 답할까 하던 순간, 왈칵 눈물이 솟았다. 아, 이별이었구나. 나는 "사랑이 끝났다"라고 짧게 답했고, 그렇게 하얀 새벽이 왔다.

시애틀과 커피

힘 없이 호텔방에 누워지내면서도 나는 그 방을 감싼 이상하고도 묘한 공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따뜻한 기류였다. 출장 와서 웃을 일이 없었는데 덕분에 웃는다는 레드의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덕분에 나는 해가 보이는 시간이 하루에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혹독한 겨울의 시애틀에서 마음이 그윽해진 채 머물 수 있었다.

 - 일주일에 평균 6일 비가오는 시애틀의 겨울은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하루에 해가 비추는 시간이 한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 시애틀의 겨울 - 일주일에 평균 6일 비가오는 시애틀의 겨울은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하루에 해가 비추는 시간이 한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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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가 출근하고 없는 동안의 대부분을 나는 침대에서 보냈다. 가까운 쇼핑센터에 들러 점심 먹는 것을 빼고는 마치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침대 위에 머물렀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 한 손에 꼽힌다는 겨울의 시애틀은 어디든 붐비지 않고 고요하다. 그저 축축할 뿐. 세계를 호령하는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가 거점을 튼 도시로 보이지 않는다.

문득 시애틀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기 좋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애틀 공동묘지에 묻힌 이소룡도 어쩌면 같은 생각이지 않을까'하고 뜬금없는 생각과 함께.

 - 이소룡과 그의 아들 브랜던 리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
▲ 레이크뷰 공동묘지 - 이소룡과 그의 아들 브랜던 리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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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의 한 줄 글귀가 궁금했던 나는 안개가 낮게 깔린 레이크뷰 공원묘지(Lake View Cemetery)를 찾았다. 하지만 잠시 후 본격적으로 퍼붓는 비 때문에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아무런 이정표도 없었다. 인간 관계란 한 번 뒤틀리면 비 오는 날처럼 우중충하게 떠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일까.

전등이 밝히는 겨울 시애틀의 밤은 낮보다 환하다. 해가 지고 마침내 거리의 불빛이 하늘에 걸릴 즈음 레드가 퇴근을 하면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시애틀에게 커피란 이 우중충한 날씨를 이길 수 있는 한 잔의 유머와도 같다. 거리 귀퉁이마다 자리잡은 시애틀 카페의 커피 향은 비 내음과 뒤섞여 지나가는 행인을 유혹한다.

 - 시애틀에는 골목마다 커피전문점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스타벅스 1호점이 가장 인기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유일하게 스타벅스가 탄생했을 당시의 로고를 그대로 쓰고 있으며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다
▲ 시애틀의 스타벅스 1호점 - 시애틀에는 골목마다 커피전문점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스타벅스 1호점이 가장 인기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유일하게 스타벅스가 탄생했을 당시의 로고를 그대로 쓰고 있으며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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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설명이 필요없는 스타벅스가 시애틀에서부터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1호점에만 허락된 오리지널 로고도 뱃사람을 유혹한다는 인어, 세이렌이 아닌가. 사시사철 안개와 비에 덮인 도시와 묘하게 잘 어울리는 로고를 내세운 스타벅스는 무려 1971년에 처음 생겼단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이 향긋한 커피 향으로 지독한 날씨를 버텨왔을 것이다.

"무엇을 드릴까요?"

레드와 내가 주문하려고 하자 턱수염이 제법 자란 백인 점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명쾌한 한국말로 물어왔다. 깜짝 놀라 눈만 깜박이니 점원은 으쓱하며 "여기는 한국인이 자주 온다"고 말했다. 계산을 마치고 나니 이번에는 아주 크고 우렁차게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던 점원. 좌석도 테이블도 없는 이 작은 카페를 멀리서 찾아온 여행자에 대한 보답이었다면 아주 후한 점수를 점수를 주고 싶다. 레드와 함께 또 다른 친구를 만난 듯, 아무도 없는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의 핑크빛 네온사인 아래서 내내 흐뭇했으니 말이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구름이 파도처럼 몰려오던 그날 밤에 레드와 나는 도시의 전망을 내려다 볼 수 있다는 케리파크(Kerry Park)에 올랐다. 가득한 커피 향에 취했는지 잠이 오지 않기도 했지만 어쩐지 이 도시의 밤이 궁금했다.

다운타운을 지나쳐 조용한 민가의 뒷동산인 케리파크에 오르자 나는 마침내 이 도시의 진면목을 봤다. 겹겹이 쌓인 구름 아래로 불을 밝힌 시애틀은 내가 본 도시의 야경 중 최고일 만큼 아름다웠다.

 - 케리파크에서 바라 본 시애틀의 야경은 내 생애 최고의 야경 중 하나로 손꼽힌다.
▲ 시애틀의 야경 - 케리파크에서 바라 본 시애틀의 야경은 내 생애 최고의 야경 중 하나로 손꼽힌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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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비행장같은 모습의 스페이스니들(Space Needle) 은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른다. 마치 UFO가 하늘 위에 정차해 있는 듯하다. 하얗게 빛나는 기둥의 불빛이 노랗고 빨갛게 바뀌면 외계의 비행선이 구름을 뚫고 어디론가 날아갈 것만 같다. 문득 어릴적 즐겨했던 부루마블의 '우주비행선'이 떠올랐다. 가고 싶은 곳 어디든 갈 수 있던 그 우주비행선을 타고 지금쯤 멕시코 어딘가에 있을 준을 데려오는 상상을 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 텅 빈 도시를 셋이서 활보하다 모노레일을 타고 스페이스 니들에 올라 우리의 재회를 축하하고 싶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그렇게 누군가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홀아비 톰 행크스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아직 한 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 없는 학생이었다. 싱겁다고 생각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키스는 커녕, 서로 만나지도 못하는 두 주인공에게 사랑이라는 굴레를 씌우는 것 자체가 말이다.

 종일 비가 오던 날의 늦은 밤, 안개 가득 들어찬 하늘아래 불빛을 밝힌 시애틀의 밤 풍경은 좀처럼 잠들 수 없게 만든다.
 종일 비가 오던 날의 늦은 밤, 안개 가득 들어찬 하늘아래 불빛을 밝힌 시애틀의 밤 풍경은 좀처럼 잠들 수 없게 만든다.
ⓒ 김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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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알고 있다. 사랑이란 만나기 전의 두근거림과 만나는 순간의 흔들리는 눈동자라는 것을. 사람이 누군가를 알고 사랑하게 되는 것도 결국은 그 작은 흔들림에 의해서다. 그러고 보니 제법 많은 로맨스 영화를 히트시킨 노라 애프론 감독도 왜 속편을 만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사랑에는 속편이 있을 수 없다"고 했던 것 같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해밀턴 뷰포인트 파크(Hamilton Viewpoint Park)에서도 스페이스 니들 만큼은 또렷하게 보였다. 나는 벌써 그 기묘한 모양의 건물이 그리워진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영화 속에서 두 주인공이 만나는 곳은 스페이스니들이 아니라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이었음을 떠올렸다. 결국 스페이스니들에는 오르지 않기로 했다.

그곳에서 누구를 만날 계획이 없기도 했거니와 더 이상 내 발걸음이 가볍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차가운 겨울바다를 알록달록 물들인 불빛을 보면서 나는, 여행의 끝을 생각하고 있었다.

간략여행정보


시애틀 도심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둘러보기에 무리가 없다. 메트로와 버스가 다운타운과 주요 명소를 모두 연결하며, 시애틀 시티패스(citypass.com)를 이용하면 스페이스 니들, EMP 박물관, 항공박물관 등 시애틀 대표 관광지 6곳을 45% 할인된 가격에 둘러볼 수 있다. 단 올림픽 국립공원과과 카미노 아일랜드 등 시애틀 근교 여행은 차를 렌트하는 것이 최선이다.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스타벅스 1호점은 오후 10시면 문을 닫기 때문에 저녁에 미리 방문하는 것이 좋다. 단, 1호점은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다.



태그:#시애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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