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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초입이지만 가을의 끝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떠나본 진도행이었다. 빈 들판은 황량해 다소 을씨년스런 모습이다. 하지만 며칠 전 내린 비는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 놓았다.

들판에는 푸른 겨울 배추와 대파가 펼쳐진다. 그래서 겨울을 기다리며 무럭무럭 자라 있는 푸른 들판은 생명처럼 눈부시다. 겨울의 끝에서 봄을 찾아 떠나는 남도 여행처럼 겨울의 초입에서 찾는 남도여행 역시 그 푸름이 충만감을 느끼게 한다.

어쨌든 푸름은 생명 같은 것이다. 진도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세월호가 먹먹한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아직도 어둡고 긴 터널 속에 갇혀 있는 듯한 지금, 그 어린 생명들의 스러짐 위에서 다시 생명을 느낄 수 있다면 그래도 다행한 일이 아닌가. 가을의 끝 모퉁이를 돌아 찾아온 진도는 인적 드문 고요함과 한적함, 그래서 가슴 속에는 허허로움이 느껴진다. 어찌할 수 없는 가슴속 묵직함이다.
 
해남과 진도를 이어주는 명량대첩의 현장이다. 고려 삼별초군의 무대이기도 하다.
▲ 울돌목 명량대첩 현장 해남과 진도를 이어주는 명량대첩의 현장이다. 고려 삼별초군의 무대이기도 하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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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를 가려면 영화 <명량>으로 인기를 끈 울돌목 위 진도대교를 지나야 한다. 거대한 교각에 두 개의 다리가 울돌목 해협 위에 놓여있다. 이곳에서 용장산성 유적을 찾아 가려면 다시 10여 분 떨어져 있는 군내면 용장리로 향해야 한다.

용장산성으로 가다보면 이 울돌목이 명량해전 이전 고려 삼별초의 역사적 사건과도 맥이 연결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명량해전이 이루어지기 전 이순신 장군은 진도의 벽파진에 며칠간 머무르게 되는데 이곳은 전략적으로 요충지인 수군진이 설치된 곳이었다.

이 벽파진은 용장산성의 임금이 머무른 행궁을 중심으로 바다로 들어오는 용장산성의 입구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벽파진이 뚫리면 용장산성은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이를 보면 전략전 요충지는 고려 사람들도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며 이순신 장군은 자신의 시간에 이를 잘 활용했던 것 같다.

진도는 1년 농사를 지어 3년 동안 먹고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토지가 많아 넓은 간척지도 많다. 울돌목을 지나 용장산성으로 가는 길도 넓은 간척지를 지나야 한다. 당시는 바닷물이 들어왔을 간척지 가운데로 곧게 도로가 뚫려 있다. 이 들판을 지나다 보면 둔전마을이 나온다. 들판의 상류에 있는 저수지 이름도 둔전저수지다.

둔전(屯田)은 군량을 충당하기 위해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설치한 토지다. 인근에 벽파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관에서 둔전을 직접 경영한 것으로 보인다. 섬 지역은 왕자대군·공주·옹주 등 궁방에서 소유한 토지인 궁방전(宮房田)이 있어 섬 주민들이 이를 경작해야 했다. 둔전이나 궁방전을 벌어야 하는 백성들의 어려움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용장산성의 행궁터

용장산성은 군내면 용장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돌 표지석을 보면 용장산성에 다 왔음을 알 수 있다. 용장산성은 그저 적막하기만 하다. 산 위의 햇살이 산성 행궁터 위를 고즈넉하게 비추고 있었다. 마지막 단풍을 보기 위해 찾는 관광버스의 도회인들도 찾아보기 힘들다. 차라리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란이 없는 게 다행이라는 느낌이다.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용장산성 행궁의 아래쪽 부분으로 현재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 용장산성 성벽 계단식으로 이루어진 용장산성 행궁의 아래쪽 부분으로 현재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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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터는 발굴을 하고 있어 여기저기 파헤쳐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용장산성은 그동안 발굴을 통해 많은 유물들이 나와 그 역사적 실체가 하나하나씩 밝혀져 왔다. 발굴.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하나씩 밝혀가는 작업이다. 하지만 과거의 역사는 어느 정도 상상력에 맡겨두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사람들은 항상 과거의 역사를 밝히고 싶어 한다. 그러나 현실로 다가온 과거의 실체는 차라리 상상했을 때가 더 아름다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E.H. 카(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용장산성 앞에서 나는 어떤 대화를 나누어야 할까. 순간 그 수많은 영혼들의 옹송거림이 느껴진다.

용장산성은 그동안 몇 차례 발굴을 진행해 왔다. 지난 2010년 대몽항쟁 유적지인 용장산성의 고려 왕궁지가 전체 윤곽을 드러낸 바 있으며 세부적인 부분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허물어진 역사의 터에서 느껴지는 그 존망의 흔적들은 항상 애잔함이다. 진도로 온 삼별초 세력들은 이곳에서 어떤 이상향의 세계를 꿈꾸었을까? 또 하나의 고려정부 삼별초는 세계를 제패한 몽골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왕조의 부활을 꿈꾸었다는 데에서 고려의 기백이 느껴진다. 나약한 성리학적 사대주의에 빠졌던 조선에 비해 확실히 고려는 그 기백이 더 뛰어났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우리가 아는 용정산성은 1270년 고려가 몽고군에게 항복하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의 환도를 결정하자 이에 반발한 무신정권하의 삼별초 지휘관들이 진도로 남하하여 몽고에 항전하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당시 세계는 몽고의 정복시대였고, 고려 또한 1231년부터 1258년까지 7차례에 걸쳐 몽고의 침략을 당하였다.

고려는 몽고의 침입을 받은 다음 해인 1232년(고종 19) 바다로 에워싸인 강화도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10여 년간 세 번씩이나 정권이 바뀌는 등 혼란을 거듭하다가 결국 1270년(원종 11) 몽고와 화평이라는 형태로 굴복하고 만다.

개경으로 환도한 조정은 더 이상의 항전을 중지하고 고려의 핵심 군사세력인 삼별초를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강화도에 남아있던 삼별초는 배중손(裵仲孫)을 중심으로 조정에 반기를 들고 대몽 항전을 계속하였다.

삼별초는 1270년 6월 1일 배중손과 노영희 등이 주도하여 고려 11대 문종의 동생인 평양공 기의 직계 후손인 승화후 왕온(承化候 王溫)을 왕으로 받들어 새로운 관부를 구성하고 관리를 임명하는 등 새로운 정권을 세운다. 그리고 해전에 약한 몽고군과 끝까지 항전하기 위해 배 1천여 척에 군사, 가족과 상당량의 무기들을 싣고 70여 일에 걸쳐 새로운 근거지 진도로 남하하게 된다.

이들은 벽파진에 도착하여 지금의 용장산에 산성을 구축한다. 벽파진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아본 셈이다. 삼별초는 용장산성 안의 용장사를 궁궐로 삼아 황제를 칭하면서 오랑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왜에 국서를 보내 자신들이 유일한 정통 고려 정권임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고려 조정과 몽고군은 이곳의 삼별초를 수차례에 걸쳐 공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순신의 명량해전이 있기 전 이곳 울돌목 해협은 난공불락 천혜의 요새를 만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을 것이다. 1271년(원종 12) 5월 15일에 김방경(金方慶), 홍다구(洪茶丘)가 이끄는 고려·몽고 연합군의 10여 일간에 걸친 공격으로 왕온과 배중손 등 핵심 세력이 죽임을 당하고 성은 함락되고 만다. 이후 삼별초의 잔여 세력은 제주도로 건너가 3년간에 걸쳐 항쟁하지만 1272년 진압되고 만다.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꿈꾸었던 사람들의 흔적은 산 중턱을 따라 길게 계단식으로 조성한 성터의 흔적만 남기고 있다. 무너진 제국의 흔적이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742년 전 일이다. 고려 사람들의 함성과 아우성이 들려올 것 같지만 마지막 가을 햇살 아래 지금은  적막감만 감돈다.    

용장산성 행궁터 아래에는 용장산성 홍보관이 있다. 유물 몇 점이 전시되어 있지만 이곳에 전시된 발굴 유물 중에 귀면와는 압권이다. 귀면와는 두 개의 뿔이 좌우로 사슴뿔처럼 위로 향하고 있고, 눈동자는 앞으로 귀는 옆으로 돌출되어 있다. 귀신치고는 기괴한 모습이지만 달리 보면 조금 정겹게도 느껴진다.

귀신을 형상화 한 것이지만 뿔이 있어 도깨비의 모습에 더 가깝다.
▲ 홍보전시관의 귀면기와 귀신을 형상화 한 것이지만 뿔이 있어 도깨비의 모습에 더 가깝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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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보관 바로 뒤쪽에는 용장사가 있다. 요즘 대부분의 절이 그런 것처럼 깨끗하게 신식 건물로 정비되어 있는 용장사 약사전 안에는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이 석불은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어 용장산성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푸르게 끝없는 대파 밭

용장산성을 나와 삼별초 유적을 찾아 해변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푸른 배추밭과 대파밭들이 연이어 이어진다. 그래서 겨울에도 겨울 같지 않은 것이 진도의 겨울이다.

길을 가다보면 대파의 산지 진도대파가 끝없이 펼쳐진다.
▲ 진도의 명물 대파 길을 가다보면 대파의 산지 진도대파가 끝없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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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나 이곳의 고군면 해변을 따라가다 보면 넓은 양배추 밭이 이어진다. 해변을 배경으로 푸른 대파와 겨울 배추, 그리고 양배추가 아름다운 삼색의 수채화 한 폭으로 펼쳐져 있다. 인간과 자연이 빚어낸 조화로움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드넓은 양배추와 겨울배추 밭이 이국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 드넓은 양배추, 겨울배추밭 드넓은 양배추와 겨울배추 밭이 이국적인 느낌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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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는 용장산성이 함락되자 그 잔존 세력들이 금갑진과 남도석성을 통해 제주도로 퇴각을 해야 했다. 완전한 패망이 아니었던 셈이다. 제주도에 가서도 몇 년간 항전을 지속했던 것을 보면 고려인들의 기개가 다시 느껴진다.

남도석성을 가기 위해서는 해변 도로를 쭉 따라가야 한다. 해변 길은 그 풍광이 항상 아름답다. 일부러 해변길을 따라 길을 내는 것 또한 이러한 경관 때문이기도 하다.

수군진이 있었던 금갑포구를 지나면 중간 지점의 임회면 굴포리에 배중손 사당이 있다. 조선시대 고산 윤선도가 간척을 하였다는 이곳에 배중손이 긴 칼을 옆에 차고 나를 따르라고 외치고 있다.

삼별초군을 이끌었던 배중손 사당과 동상이 임회면 굴포리에 있다.
▲ 배중손 동상 삼별초군을 이끌었던 배중손 사당과 동상이 임회면 굴포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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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잔존 세력은 이곳 남도석성을 통해서도 제주도로 퇴각을 해야 했다고 한다. 남도석성은 현재 석성 안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다 이주시키고 성안의 옛 건물지 들을 복원시키고 있다. 진도 사람들의 정겨운 소리가 들려오는 성이었으면 더욱 좋으련만 이제 남도석성은 정형화된 성의 모습으로 하나씩 변모화 되어 가고 있을 뿐이다.

팽목항 세월호의 아픔

이곳 남도석성에서 인접한 곳에 팽목항이 있다. 진도 본섬의 서남부 가장 끝 지점이다. 팽목항은 서남해의 바다로 나가는 관문이기도 하다. 그 관문에서 바다는 오랫동안 통곡하였다. 그 통곡소리는 아직도 그치지 않고 있다. 그 영혼들을 달래는 수륙제가 스님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그 수많은 어린 영혼들을 삼킨 바다는 말이 없다. 그 끔찍했던 일들을 모른 척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이 현재라는 시간도 얼마 있으면 삼별초 패망의 역사처럼 서글픈 기억 속에 남을 것이지만 현재라는 시간은 그저 믿기지 않을 뿐이다.

세월호에 희생된 영혼들을 위해 수륙제가 열리고 있다.
▲ 세월호 수륙제 세월호에 희생된 영혼들을 위해 수륙제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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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망각도 때론 필요하지만 이제 발달된 현대의 기록 문명 속에서 우리들의 숨소리 하나까지도 수백 년 후 사람들은 다 알게 될지도 모른다. 조금은 끔찍한 일이다. 기억하지 말아야 할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태그:#용장산성, #발굴, #용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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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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