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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지구에 우뚝 선 십자가, 과연 저 교회는 재개발지구의 아픔을 얼마나 품고 있을까?
▲ 재개발지구와 교회 재개발지구에 우뚝 선 십자가, 과연 저 교회는 재개발지구의 아픔을 얼마나 품고 있을까?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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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6일자 <한겨레>에 곽병찬 대기자의 현장칼럼에서는 '연 수입 17조... 가난한 이웃엔 4%, 교회가 세금납부를 거부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부제는 '종교인에 세금 부과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는 대한민국, 막대한 수입과 불투명한 회계 드러날까 두려운가'였다.

개신교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이 기사를 읽고 부끄러웠다. 더군다나 내가 속해 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조차도 지난 99회 총회에서 종교인 세금에 관한 논의를 1년 연구하기로 하면서 사실상 종교인 세금납부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종교인 세금납부에 대해 반대하는 많은 주된 이유로는 헌금의 많은 부분이 선교비로 사용된다는 것이며, 교인들의 헌금은 이미 세금을 납부한 후에 내는 것이므로 이중과세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작 선교비로 4%밖에 지출하지 않는다니, 그런 주장도 헛헛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헌금에 대해 성경에서는 중요한 두 가지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나는,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으냐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예수의 대답이다.

결국, 이 대답은 질문자의 의도를 비웃고 더 나아가 가이사의 것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다른 하나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한번 읽어볼 만하기에 각색하여 옮겨본다.

예수가 성전 헌금함 맞은 편에 앉아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헌금을 하는지 보고 있었다. 많이 넣는 부자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자랑스럽게 자신들이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고 있음을 과시하며 헌금을 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두 렙돈(화폐 단위 중 가장 작은 단위라고 생각하면 됨)을 부끄러운 듯이 헌금함에 넣었다. 그때 예수는 제자들에게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많이 넣었다. 과부는 자기의 생활비 전부를 털아넣았다."

이것이 유명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다. 개신교에서는 이 이야기를 헌금의 모범 사례로 들고 있다. 물론, 사이비 성향이 강할 수록 '생활비 전부'라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초점은 다른 데 있다. '모든 헌금은 귀한 것이니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자의 헌금이든 가난한 자의 헌금이든 하나님 앞에 바쳐진 헌금은 과부의 생활비 전부와 마찬가지이니 허투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밝힌대로 17조 수입에 4%만을 선교비로 사용하며, 그 선교비 중에서도 상당수는 국가의 부담을 주는 이슬람 국가의 선교비로 사용되고 심지어는 교역자 사례비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한다.

결국,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수익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주차장이 잘 갖춰진 대형 교회나 사회적으로 유명 인사들이 많은 교회가 아니면 부흥할 수 없다고 한다. 이젠 과거처럼 작은 교회에 출석하면서 헌신봉사하는 이들을 찾아볼 수 없다. 그간 한국 교회가 개척을 한 후 교회 건축을 목표로 달려오고, 대형화되는 것을 곧 부흥이라고 여겨온 여파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결국 대형 교회가 한국의 교인들을 대거 흡수하고, 세계적인 대형 보수 교회가 형성되고 거기서 수많은 문제들이 파생되는 것이다. 물론, 오늘 한국 교회의 문제는 대형 보수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작은 교회들 역시도 만만치 않은 문제들을 안고 있는데 그 근저에 들어가보면 결국 신학의 부재와 신앙 양심의 부재가 큰 몫을 하고 있다.

눈만 들면 보이는 십자가, 그만큼 세상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치는가?
▲ 십자가탑 눈만 들면 보이는 십자가, 그만큼 세상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넘치는가?
ⓒ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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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부터 기독교 절기로 '대림절'이 시작되었다. 대림절은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절기다. 아기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기에 적합한 마음으로 만들어가는 절기가 대림절인 것이다. 이 기간엔 교회마다 성탄절 준비로 바쁘다. 그리고 일 년 중에서 교회가 불우이웃에 대해 가장 관심을 많이 갖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개신교가 행사 치례로 맞이하는 성탄절, 대림절이 아니라, 이제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감히 아기 예수를 자기 안에 모시겠다고 건방떠는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런 중에 아기 예수도 찾아오지 않겠는가?

회개는 구체적인 회개로 이어져야지 마음 속에서 주문처럼 반복되는 습관적 기도는 의미가 없다. 그 추체적인 회개의 기도란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현재 개신교가 처한 현실을 냉혹하게 돌아보고 왜 개신교가 개독교라 불리우는 지, 목사들을 왜 먹사가 되었는지, 그 많은 헌금 수입 중에서 겨우 4%만 선교비로 사용될 뿐 나머지는 교회의 양적인 확장과 유지를 위해 쌓아두어야 하는지, 대사회적으로 왜 비난의 대상이 되었는지...

자신의 치부를 솔직하게 드러내놓고 그것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를 심사숙고하고, 이번 성탄절을 계기로 기독교인들에게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주는 것이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진정한 마음이 아닐까?

이제 헌금의 4%가 아니라 십일조에 해당하는 10%를 제외한 90%를 이웃을 위한 선교비로 쓰겠노라고 다짐하고 행동한다면, 누가 개신교인들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누가 거기에 종교인도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할 것이며, 누가 개신교를 개독이라 하겠으며, 목사를 먹사라고 하고, 평신도를 병신도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너무 요원한 희망사항일지 모르겠다. 날이 춥다. 가난한 이들에게 가장 힘든 계절이다. 이 계절만큼이라도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는 개신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냥, 그 정도만 해도 좋겠다.

눈이 내리고 나니 연말 분위기도 나고, 성탄 분위기도 난다. 기독교인으로서 이 계절 당연히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의미를 돌아보니, 그를 믿는다는 이들의 모임인 교회가 말이 아니다. 이래서는 예수가 백 번을 이 땅에 다시오고 백 번을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셔도 교회 개혁은 일어날 수 없을 것 같다. 한국의 개신교에게 희망을 볼 수 있는 것인지 난감하다.


태그:#개신교, #헌금, #선교비, #종교인 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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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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